[음성 설교] 

예레미야 7:16-20 기도하지 말라 2010. 9. 15

 

16 그런즉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어 구하지 말라 내게 간구하지 말라 내가 네게서 듣지 아니하리라 17 너는 그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행하는 일을 보지 못하느냐 18 자식들은 나무를 줍고 아버지들은 불을 피우며 부녀들은 가루를 반죽하여 하늘의 여왕을 위하여 과자를 만들며 그들이 또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나의 노를 일으키느니라 19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나를 격노하게 함이냐 자기 얼굴에 부끄러움을 자취함이 아니냐 20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나의 진노와 분노를 이곳과 사람과 짐승과 들나무와 땅의 소산에 부으리니 불 같이 살라지고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제목이 ‘기도하지 말라’입니다. 16절에 보시면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만 간단하게 기도하지 말라는 제목을 잡고 보니 상당히 도발적인 제목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라는 말만 들었습니다. 기도를 하되 많이 하고 정성을 다하여 기도하고 금식하고 철야하면서 연속적으로 기도하라는 말만 듣고 교회를 다녔습니다. 물론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도 깨어서 기도하라는 말씀도 성경에 다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도 성경입니다. 이 둘 중에 목사가 설교를 하려면 어느 것을 취하겠습니까?

 

기도하지 말라는 말씀은 뺄 것입니다. 그런 말씀은 목회에 아무른 도움이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려는 교인들도 좋아하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자기 좋은 대로 취사선택을 합니다. 그러므로 목사가 설교를 하여도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성경에서 끌어다가 사용하는 것입니다. 저도 예외가 아니고 어느 누구도 예외가 아닙니다. 자기가 좀 자신이 있는 말씀은 강하게 전하고 자신이 없으면 슬쩍 넘어가는 것입니다. 제목설교를 하여도 강해설교를 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런 본문은 기도라는 설교에서 빼버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에서 기도에 대하여 보면서 이 본문을 빼 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런 말씀이 한두 번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16절에서만 기도하지 말라는 말씀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지 말라. 내게 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왜 이렇게 세 번이나 기도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보다 먼저 듣는 자이기에 이 백성들이 당할 심판의 모습을 먼저 봅니다. 그러니 기도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늘 기도를 합니다. 자기 민족이 비록 범죄 하여 심판을 당한다는 말씀을 전하지만 기계적으로 전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자기 민족이 심판을 당하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신약에서 바울사도도 자신의 민족이 주께로 돌아온다면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좋다고 할 정도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기도하지 말라고 하시는 이유는 왜 그렇습니까? 이제는 심판이 집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용서 하여 줄 수가 없는 지경입니다. 그러면 그 심판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성경 전체에 다 나옵니다. 그리고 특별히 선지 서에 더 많이 나옵니다. 그 내용들 중에 예레미야에서 기도하지 말라는 말씀의 전후의 아주 좁은 부분만 살펴보려고 합니다. 너무 넓게 잡으면 몇날 며칠을 말해도 다 할 수가 없기 때문이며 또 몇 가지의 내용만 보아도 왜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하시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 7:1-15절입니다. “봉독”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성전에 부지런히 제물을 바치려고 몰려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향하여 이곳에 오는 자들에게 이곳이 성전이라고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하십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어야 할 성전이 도둑의 소굴이 되었다고 하십니다. 9-10절을 봅니다. 평소에는 바알에게 분향합니다. 그러면서 성전에 오는 이유가 구원의 확신을 하려고 옵니다. 성전에 나아와 기도하고 제물을 바치니 구원을 얻었다는 확신을 하고서는 다시 우상숭배 하러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에 대하여 어떻게 행하였는지 보라고 하십니다. 실로에 언약궤를 두었던 곳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황폐화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건물 성전이 이렇게 있다고 하여도 이 성전이 파괴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선지자들을 부지런히 보내어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새벽부터 부지런히 돌아오라고 하여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에브라임을 쫓아낸 것처럼 너희를 쫓아낼 것이니 기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늘 읽은 본문 17-20절을 봅니다. 자식들은 나무를 줍고 아버지는 불을 피우고 부녀는 반죽을 합니다. 하늘의 여왕을 위하여 과자를 만들고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붓습니다. 가족 모두가 우상숭배자입니다. 여호와를 격노하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를 부으시는데 인간의 죄로 인하여 사람만이 아니라 짐승과 들나무와 땅의 소산에 붓는다고 하십니다. 인간의 범죄로 온 땅이 불에 살라지고 꺼지지 않는다고 하시는 말씀이 구약에서 모델로 보여주셨다면 이제 예수님의 재림 시에는 온 세상이 꺼지지 않는 불에 살라질 것입니다.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짐승과 들나무와 땅의 소산물까지 고통을 받습니다. 예레미야 14:1-6절을 봅니다. “봉독” 어느 정도의 기근인지 우물에 갔어도 물을 얻지 못합니다. 비가 없어서 땅이 갈라집니다. 들의 암사슴이 새끼를 낳아도 풀이 없어서 내 버립니다. 들 나귀들은 벗은 산 위에서 서서 승냥이 같이 헐떡이며 풀이 없으므로 눈이 흐려집니다. 지난주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발정 난 암나귀처럼 우상을 향하여 달려갔는데 이제는 기근으로 인하여 다 죽게 되었습니다. 우상을 따라갈 힘조차 없습니다. 이런 형편을 보고 선지자는 기도합니다.

 

7-9절이 기도입니다. “7 여호와여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언할지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우리의 타락함이 많으니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8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고난당한 때의 구원자시여 어찌하여 이 땅에서 거류하는 자 같이, 하룻밤을 유숙하는 나그네 같이 하시나이까 9 어찌하여 놀란 자 같으시며 구원하지 못하는 용사 같으시니이까 여호와여 주는 그래도 우리 가운데 계시고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오니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 기도하지 말라고 하여도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런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10-12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의 응답이 또 기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들이 어그러진 길을 갔기에 이들을 위하여 복을 빌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제 그들에게 벌을 주실 것이기에 그들이 금식할지라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 지라도 그것을 받지 아니하고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내가 그들을 멸하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신다고 하시고 선지자는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기도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따랐기에 그렇습니다. 우상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를 위한 신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고 예수님을 불러도 자기를 위한 것이며, 세상의 욕망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기도란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여야 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기도하면 무언가 능력도 없어 보이고 힘도 없어 보입니다. 제가 환자를 심방하며 기도할 때도 이런 문제가 곤란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낫게 하여 주실 것이라고 기도하면 환자도 좋아 할 텐데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기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왜 기도만 하면 마치 만사가 다 자기 소원대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것입니까? 기도 만능주의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제는 금식하여도 번제와 소제를 드려도 내가 받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기도하지 말라고 하시고 이 백성들을 위하여 복을 빌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 중에 또 하나는 백성들로 하여금 우상숭배로 이끈 거짓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13-14절을 봅니다. “봉독”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없을 것이며 확실한 평강을 주신다고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지금 하나님의 심판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있는데 거짓 선지자들을 기도하면 된다고 제물을 바치면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확실한 평강을 주신다고 합니다. 이것이 다 거짓 예언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지 않았는데도 거짓 계시와 점술과 헛된 것과 자기 마음의 거짓으로 너희에게 예언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듣는 백성들까지 함께 심판을 당한다는 것입니다(15-18).

 

그러면 이제 예레미야가 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또 기도합니다. 19-22절입니다. “봉독” 주께서 유다를 온전히 버리시며 싫어하십니까? 어찌하여 우리를 치시고 치료하여 주지 않습니까? 평강을 바라도 없고 치료 받기를 기다리지만 두려움만 본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죄와 조상의 죄를 인정하며 기도합니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미워하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주의 보좌를 욕되게 말게 하여 달라고 합니다. 주께서 우리와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폐하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언약을 믿기에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15: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 내보내라” 모세와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중보기도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세와 사무엘이 기도하여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이 백성들이 어디로 나아가야 하느냐고 묻자 죽을 자는 죽음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과 포로로 나아갈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15:6절입니다. 내가 뜻을 돌이키기에 지쳤다고 하십니다. 모세의 기도로 사무엘의 기도로 지금 예레미야의 기도로 하나님은 뜻을 많이 돌이키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돌이킬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오래 참으시고 뜻을 많이 돌이키셨습니다. 언약을 배반하였기에 그 언약 배반자들에게 심판을 벌써 집행하셔도 아무른 할 말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참으로 오래 참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심판을 하십니다. 그 결과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갑니다.

 

이런 과정에서 예레미야는 참으로 고통을 받습니다. 다른 선지자들은 확실한 평강을 예언하고 축복을 하는데 예레미야 선지자는 입만 열면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니 백성의 지도자들과 거짓 선지자들과 백성들까지 예레미야를 핍박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었기에 주의 말씀이 자기에게 기쁨과 즐거움이지만 주의 분노도 함께 채워져 있기에 고통이 얼마나 계속 되는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그들이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이름과 그 영광의 보좌와 그 언약을 위하여 용서하여 달라고 간구합니다. 이런 기도와 거절이 예레미야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결론은 어떻게 됩니까? 결국은 유다가 멸망합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갑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은 어떻게 됩니까? 나라가 망하여도 하나님의 언약은 파기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우상을 따르며 하나님을 배반하면 그들을 심판을 하셔서 그들이 섬기는 우상도 함께 파괴하여 버리십니다.

 

그리고 그 심판에서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알려주십니다. 70년 만에 바벨론에 돌아올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또 알려주십니다. 왕 다윗을 섬길 것이라고 하십니다. 죽은 다윗이 어떻게 왕이 되겠습니까? 다윗에게 허락한 언약을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 언약에 대하여 알려주십니다. 예레미야 31:31-34절입니다. “봉독” 새 언약은 돌 판이 아니라 마음에 기록하시며 죄를 사하시고 기억도 하지 아니하시는 언약입니다. 그 언약이 바로 예수님의 살과 피로 이루신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하지 말라고 하여도 예레미야가 기도한 것은 하나님의 자기 이름과 자기 영광을 위하여 그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이심을 알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하셨고 또 이루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의 기도가 우리에게도 이루어지기를 소원합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