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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6:36-46 내 뜻대로 마옵시고 2010. 3. 24

 

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3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44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창세기로부터 기도가 무엇인지를 보고 있습니다. 차례대로 하자면 오늘은 사울이 하나님께 묻는 내용을 보려고 하였습니다. 화요일에 전체적인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새벽기도의 본문이 방금 읽은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보다가 오늘 저녁에 이 말씀을 다시 증거 하여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의 기도의 내용들을 보면 사람들이 자기 소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언약에 따른 기도도 있지만 그러나 기도의 정점이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는 겟세마네의 예수님의 기도가 됩니다.

 

오늘 예수님의 기도를 미리 당겨서 보기를 원하는 것은 이번주간이 고난주간입니다. 수많은 교회들이 교회력을 따라서 설교를 하지 않지만 특정절기에는 교회력을 따라서 설교를 합니다. 특히 고난 주간이 되면 특별새벽기도회와 금요철야와 금식까지 합니다. 그러나 절기의 참된 의미보다는 사람들의 결단과 헌신을 독려하는 절기들이 되는 것을 수도 없이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의 기도를 먼저 보는가 하면 과연 예수님의 고난이 무엇인지 예수님의 기도를 통하여 보기 원하는 것입니다.

 

36절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라는 곳에 이릅니다. 이곳은 감람산의 한 지역인데 겟세마네란 ‘기름통’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감람 즉 올리브를 으깨어 압착을 하면 기름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곳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장면과 오버랩이 됩니다. 예수님이 땀이 핏방울 떨어지듯이 기도하는 곳이었습니다. 평소에도 종종 가서 기도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 중에 다른 제자들은 여기에 있으라고 하고서 베드로와 세배대의 두 아들만 데리고 그들과 떨어져서 기도하려고 가십니다. 이 세 명은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영광을 본 제자들입니다.

 

37-38절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예수님의 마음을 알려줍니다. 그들은 이해할 것으로 여겼는지 아니면 이들이 예수님의 기도의 증인으로 삼으려고 하였는지 이 세 명에게 예수님이 고민하여 슬퍼한다고 합니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너희는 여기서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는 의아해집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갈릴리 나사렛에서 예루살렘으로 오시면서 계속하여 말씀하신 것은 예루살렘에서 장로들에게 잡혀 고난을 받고 죽음에 넘겨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따라갔지만 예수님은 세 번(마16:21, 17:22-23, 20:18-19)이나 분명하게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중에 마태복음 16:21-24절의 한 곳의 말씀만 봅니다. “봉독” 베드로가 제대로 된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알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비로소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그런 일이 일어지 않기를 만류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피하려고 하는 것을 사탄의 유혹으로 보신 것입니다. 이렇게 결연하게 예루살렘으로 가셨는데 막상 잡히시기 전에 이렇게 죽도록 고민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역사상에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죽어갔습니다. 그들이 죽어갈 때에 구차하게 목숨을 구하지 않고 의연하게 죽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영웅이라고 합니다. 지금 백령도 해상에서 군함이 침몰하여 그 가족들이 오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나라의 어떤 높은 사람이 와도 반갑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원망을 합니다. 그런데 고마워하는 분이 한 사람 있습니다. 자기 자녀들을 구하기 위하여 잠수하여 침몰한 배로 몇 번이나 들어갔다가 나오든 특수부대원의 죽음에 감사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런 죽음을 의로운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면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잡혀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삼일 만에 살아나실 것을 세 번이나 말씀하시고 오셨는데도 왜 이렇게 죽음 앞에서 죽도록 고민하시고 슬퍼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도 우리와 꼭 같은 몸을 가지셨기에 목도 마르시고 배도 고프시고 매를 맞으면 아픈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수치스러운 십자가의 처형을 생각하니 죽기가 싫어서 이렇게 근심하며 고민하였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죄인인 우리가 죽기를 무서워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요?

 

히브리서 2:14-15절입니다.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예수님이 혈과 육에 속하신 것은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멸하시고 죽기를 무서워하여 일평생 죽음에 벌벌 떠는 자들을 죽음의 세력에서 놓아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죽음을 이기려고 오신 분이 죽음 앞에서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죄인들 중에서도 영웅호걸들이 죽음을 의연하게 맞이하기도 합니다. 또는 죽기를 무서워서 벌벌 떠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람들이 다 사망의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의연하게 맞이하는 사람도 사망의 종노릇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의 고민과 기도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오늘 새벽에 잠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예수님 외에 죽음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니 모든 사람이 죽는 것을 누가 모르느냐고 하시겠지만 사람이 죽는 것은 죄인이라서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 진정한 의미에서 죽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아래 태어나서 죽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과 같은 모습으로 오셨지만 유일하게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의미를 바로 알고계시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죽음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 됨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나실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만이 생명의 관계 속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생명도 모르고 죽음도 모르는 것입니다. 참된 생명이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속에만 있기에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다고 해도 그것은 사망의 권세아래서 일어나는 것이기에 가족이 죽었다고 슬퍼하여도 진짜 죽음의 의미는 모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21-23절입니다.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예수님의 고별기도입니다. 대제사장의 기도라고도 하는데 이 기도가 바로 잡히시기 전날 밤에 하신 내용입니다. 이 기도에 보시면 예수님과 아버지의 하나 됨을 말합니다. 이 하나 됨의 관계가 십자가에서 실제로 끊어지는 것이기에 눈물과 탄식으로 심히 근심하며 죽도록 고민하여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산자만이 느낄 수 있는 고통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에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끊어져서 태어났기에 하나님 아버지와 끊어지는 고통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죽은 살이나 굳은살은 칼로 도려내도 아프지 않지만 연약한 살에는 작은 가시만 박혀도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에 대한 고통이 있습니까?

 

에스겔 선지자는 36:26절에서 이렇게 예언합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하면서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돌과 같이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고기와 같은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새 영이 임하지 않으면 마음이 굳어져 있기에 참된 죽음의 의미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버지와의 생명의 관계가 끊어지는 그 고통을 유일하게 아시는 분이시기에 이렇게 십자가에서 저주받아 끊어지는 방법 외에 달리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길이 없느냐고 마지막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6:39절을 봅니다. 세 명의 제자들과도 조금 거리를 두고서 기도합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 기도를 하고 제자들에게 와 보니 누워 자고 있습니다.

 

40-41절을 봅니다. 베드로에게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고 하십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아십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다고 합니다. 깨워놓고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시고 와 보니 또 자는 것입니다. 이제는 깨우지도 않고 혼자 기도하러 가십니다. 세 번째 같은 기도를 합니다. 이제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다른 길이 없습니다.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예수님이 순종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가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린다고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가자고 합니다. 이렇게 잡히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오히려 기도의 응답입니다.

 

히브리서 5:7-10절입니다.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예수님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 기도를 들으신 것입니다. 그 기도의 응답이 십자가로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그 십자가로 인하여 참된 순종을 배워 온전하게 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온전하지 못하심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난으로 온전하게 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 십자가를 통하여 온전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겠다고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바울사도가 십자가, 십자가만 한 것이 아닙니다. 죄와 의에 대하여서도 세상에 대하여서도 교회에 대하여서도 책망하고 권면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말씀들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며 십자가로 모아져야 하는 것이게 십자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사망에 사로잡혀있는 자를 해방하여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런 눈물과 탄식과 죽게 되었다는 마음이 이해가 되십니까? 예수님께서 죽도록 기도하시고 죄인들에게 넘겨지신 것은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망아래 들어감으로 사망을 이겨버린 사건이 됩니다. 자신이 저주의 잔을 다 마신 것입니다. 자신이 아버지에게서 끊어지는 그 고통을 감내하면서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한다고 기도하신 후에 그 십자가의 길로 홀로 걸어가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께서 지금도 기도를 멈추지 않고 계십니다.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기도는 하나님아버지와 예수님이 하나인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자들도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아버지와 함께 하도록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의 혜택을 받는 자는 주님과 멀어짐이 고통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