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다니엘 6:7-10 죽을 줄 알고도 기도함 2010. 10. 13

 

7 나라의 모든 총리와 지사와 총독과 법관과 관원이 의논하고 왕에게 한 법률을 세우며 한 금령을 정하실 것을 구하나이다 왕이여 그것은 곧 이제부터 삼십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의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이니이다 8 그런즉 왕이여 원하건대 금령을 세우시고 그 조서에 왕의 도장을 찍어 메대와 바사의 고치지 아니하는 규례를 따라 그것을 다시 고치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매 9 이에 다리오 왕이 조서에 왕의 도장을 찍어 금령을 내니라 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다니엘은 죽을 줄 알고도 기도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기도는 죽기위한 기도입니까? 살기 위한 기도입니까? 한국교회만큼 기도가 많은 나라가 없을 것입니다. 외국에서 배우려고 옵니다. 새벽기도회와 금요철야기도회 등을 봅니다. 주여 삼창을 부르면서 뜨겁게 기도하는 것을 보고 이것이 한국교회 부흥의 원동력이구나! 하면서 자기들도 기도해야 되겠다고 하면서 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보고 가겠습니까? 아니면 많이 모여서 눈물 흘리고 고함지르며 기도하는 그런 분위기만 보고 갈까요?

 

지난주에 예를 들려고 원고에는 기록하였는데 빼먹은 내용이 있습니다. 서울의 ‘ㅅ’ 교회 ‘ㅈ' 목사에 대한 내용이 뉴스 엔조이에 나왔습니다. 그 교회 건물이 나오니 사람들이 다 알아보는 건물인데 그 교회는 기도의 열정으로 대단한 교회입니다. 특히 젊은이들의 야성을 키우는 곳으로 소문이 나서 무려 만 명이 넘는 젊은이들 이 많이 모이는 곳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바쁜 젊은이들도 하루에 한 두 시간 기도는 보통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낙타무릎이 되도록 기도하자는 책도 나왔는데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라고 하고 본인도 기도 많이 한 목사가 시험에 넘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당회에서 치리하기를 아주 가벼운 치리를 하였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하였는지 기사를 보니 그 목사가 설교를 하지 않으면 벌써 몇 천 명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ㅈ’ 목사 없는 ‘ㅅ’교회는 생각할 수 없다면서 그렇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어느 특정 목회자가 없는 교회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은 교회의 머리가 예수님이 아니라 특정 사람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는 교회들이 왜 시험에 드는 것입니까? 그들이 믿은 것은 그들의 기도의 열정과 기도의 시간과 기도에 바친 자신들의 에너지를 믿은 것이지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기도에 투자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과연 자신이 죽기 위하여 기도한 것입니까? 기도로 인생의 승부를 걸기 위한 것입니까? 전능한 신의 능력을 빌려서 세상에서 한번 이겨보고 싶은 마음이지 않았겠습니까? 과연 기도하면 죽을 줄 알고도 그렇게 기도하기 위하여 만 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모여들겠습니까? 낙타무릎이 되도록 기도하면 놀라운 능력을 받게 되고 세상에서 리더가 되고 성공 한자가 되기 위하여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뉴스엔조이가 이렇게 전합니다. “<뉴스앤조이>는 2000년에 ㅈ 목사의 '성공주의 조장 설교', '표절 설교', '약자를 업신여기는 태도' 등에 대해서 1년가량 지속적으로 비평해 왔다.”

 

제가 특정인을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 사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거의 대부분 기도하라고 하는 이유가 세상의 성공입니다. 그런 기도가 가능한지 요한일서 2:15-16절을 봅니다.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말씀이 자신에게 이루어지도록 새벽기도 하고 금식하고 철야 기도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데 돈을 사랑하지 않기 위하여 릴레이 기도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란 본능이며 그 본능적인 기도란 자신이 살기위한 기도입니다. 그것도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멋있게 살고 싶은 본능이 기도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에는 죽을 줄 알고도 기도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런 기도를 한 사람이 오늘 읽은 말씀의 다니엘입니다. 그러면 다니엘은 어떻게 이런 기도를 하였을까요?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소년이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왕궁에 발탁이 되어 교육을 받았습니다. 우상숭배의 제물을 먹지 않기로 결심하여 그들을 감독하는 자들에게 요청하여 채소만 먹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얼굴이 더 좋았고 3년 교육을 받은 후에 시험을 치르니 가장 우수한 성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았습니다. 이런 것은 다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1:17). 그들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셔서 비록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있지만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합니다.

 

느부갓네살 왕 때 금 신상을 만들어 그것에 절하지 아니하면 풀무 불에 넣는다고 하였습니다. 다니엘은 여기에 나오지 않는데 세 친구들이 금 신상에 절하지 아니함으로 풀무 불에 들어갑니다. 그때 하는 말이 우리가불에 들어가도 하나님이 구하시겠지만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않겠다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 하실지라도’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나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에 죽는 자리도 아멘 하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이 시대에 다니엘이 해석하는 일들과 그 아들 벨사살이 잔치하면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금은 그릇으로 술을 마시다가 벽에 글씨가 나타나고 그 글씨를 다니엘이 해석하여 그 왕이 저울에 달려 가벼워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왕이 그 밤에 죽임을 당하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왕이 되었습니다. 다리오가 전국에 고관 120명을 세우고 총리 세 명을 세우는데 그 중에 다니엘이 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이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고관들 위에 뛰어나니 왕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려고 합니다. 이에 다른 총리들과 고관들이 모함을 하기 위하여 뒷조사를 합니다. 아무리 털어도 먼지가 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다니엘을 제거하기 위하여 여호와의 율법에서 그 근거를 찾기 위하여 살펴보니 다니엘이 매일 세 번씩 창문을 열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을 모함하는 자들이 보기에는 율법으로 보였지만 율법에서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이런 규례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고부터 생긴 것으로 봅니다. 다니엘의 대적들이 다니엘의 기도의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율법의 규례인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모함하기 위하여 왕에게 긴급하게 법을 만들어 공포하게 합니다.

 

다니엘은 동의하지 않았는데 모든 총리와 고관들이 다 동의한 것이라고 하면서 앞으로 30일 안에 누구든지 다리오 왕 외에 다른 신에게가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즉 왕이여 금령을 세우시고 조서에 왕의 도장을 찍어 매대와 바사의 고치지 아니하는 규례를 따라 선포하라고 합니다. 왕이 기분 좋은 일이기도 하고 모든 신하들이 그렇게 법을 만들어 왔는데 거절할 수도 없고 하여 도장을 찍었습니다. 왕이 도장을 찍으면 왕도 바꿀 수가 없는 법입니다.

 

다니엘 6:10절을 봅니다. 이 조서에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 윗방에 올라가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고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사자 굴에 던져지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총리 다니엘입니다. 그런데도 기도합니다. 죽을 줄 알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의 내용이 감사의 기도입니다. 자기를 살려달라는 기도도 아닙니다. 죽어도 아무른 상관이 없는 것처럼 담담하게 감사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23절에 보시면 그가 자기의 하나님을 믿음이었더라고 합니다. 믿음이 이런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니엘은 어떻게 이런 믿음이 있었습니까? 앞에서 본 대로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리고 느부갓네살 왕과 벨사살 왕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는지 알았던 것입니다. 비록 지금 거대한 제국이 예루살렘을 집어 삼키고 있지만 이들이 영원히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계시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다니엘을 죽이려고 하는 그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기에 감사의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 28:36-37절입니다. “36 여호와께서 너와 네가 세울 네 임금을 너와 네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나라로 끌어가시리니 네가 거기서 목석으로 만든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이며 37 여호와께서 너를 끌어가시는 모든 민족 중에서 네가 놀람과 속담과 비방거리가 될 것이라” 이것이 어떻게 감사가 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와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나라가 망하였고 포로로 잡혀왔으니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었으니 감사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이루시는 일에 아멘하고 감사하는 것이 믿음인데 이런 심판을 받으면서도 감사하며 기도하는 것이 어떻게 사람으로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런 믿음이란 바로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자신이 기도하면 사자 굴에 들어가서 죽임 당하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도 감사가 나오는 것은 약속대로 이루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으니 감사한 것입니다. 당신이 내일 죽습니다. 그것도 기도하였기에 사자 굴에 던져져서 비참하게 죽을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도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구약에도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들의 모습입니다(벧전 1:11).

 

우리는 다니엘의 결론을 알고 있습니다만 다니엘은 모릅니다. 히브리서 11:33-40절을 봅니다. “봉독”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다니엘입니다.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다니엘의 세 친구들입니다. 죽은 자식이 살아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씀을 보시면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롱, 채찍질, 결박, 옥에 갇히는 것, 돌로 치는 것, 톱으로 켜는 것, 칼로 죽임 당함, 유리하고 궁핍한 모습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을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것입니다.

 

그러면 다니엘이 죽을 줄 알고도 감사하며 기도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신명기의 말씀만이 아니라 또 하나의 말씀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나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열왕기 상 8:46-53절입니다. “봉독” 범죄 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범죄 하여 포로로 잡혀갔을지라도 그곳에서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돌이켜 달라고 합니다. 그 근거는 쇠 풀무 애굽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소유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은 이 언약을 말씀들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와 있지만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합니다. 기도하면 사자 굴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기도합니다. 나라가 망하고 자신이 죽어도 하나님의 약속은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이루어지고 만다는 사실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와서 더욱 생생하게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렇게 틀림없이 시행되고 있는 일에 대하여 감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왕의 신하들이 왕에게 독촉하여 하루를 지연시키다가 사자 굴에 던지게 합니다. 그러나 천사들이 사자의 입을 막아 안전하게 됩니다. 왕이 새벽부터 달려와 확인하고 다니엘을 모함한 자들과 그 가족까지 사자 굴에 던지니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 것입니다. 다니엘의 이런 기도의 모습은 그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어떤 것인지를 다니엘이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으로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실 것을 아시고 기도하시는 것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기쁨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 기도대로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자 죽음 앞에서도 담대하였습니다. 주를 위하여 죽임 당하는 것도 감사하며 기도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였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