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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1:8-21 하갈의 방성대곡 2009. 12. 2

8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의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대연을 배설하였더라 9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10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매 11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 1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13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14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취하여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자식을 이끌고 가게 하매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들에서 방황하더니 15 가죽부대의 물이 다한지라 그 자식을 떨기나무 아래 두며 16 가로되 자식의 죽는 것을 참아 보지 못하겠다 하고 살 한 바탕쯤 가서 마주 앉아 바라보며 방성대곡하니 17 하나님이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가라사대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18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19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매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웠더라 20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 거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21 그가 바란 광야에 거할 때에 그 어미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 여인을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더라

기도를 주제로 첫 번째는 피의 호소, 두 번째는 아브라함의 기도, 오늘은 하갈의 방성대곡입니다. 앞의 두 번은 약속의 노선입니다. 그런데 하갈은 약속의 노선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 그러면 제일먼저 생각나는 것이 신에게 지극한 정성을 바쳐서 응답을 받자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성경적인 기도가 아니라고 누누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약속을 받지 못한 자가 부르짖는데도 응답을 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하갈은 아브라함이 흉년으로 애굽에 내려갔다가 데리고 온 종으로 보입니다. 자기 아내 사래가 아름다웠기에 아브라함을 죽이고 아내를 빼앗아 갈까봐서 동생이라고 하고 내려갔습니다. 예상대로 바로 왕의 신하들이 사래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자 바로 왕이 자기 아내로 삼으려고 데리고 간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많은 선물을 주었는데 그 중에 노비(奴婢)도 들어있습니다(창12:16). 이때 하갈이 종으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 후에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온 아브라함은 롯과 헤어지고, 롯을 구하고, 멜기세덱을 만나는 사건 이후에 하나님과 언약을 맺게 됩니다. 그것이 창세기 15장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너의 방패며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나에게 무엇을 주시겠느냐고 합니다. 자신은 자식이 없다고 하면서 집에서 기른 엘리에셀이 자기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너의 후사가 될 것이라고 하시면서 밖의 별을 보라고 하시면서 네 자손이 이와 같이 많을 것이라고 하시자 아브라함이 그 말씀을 믿습니다. 그러자 그 믿음의 의로 여기십니다.

그런데 아브람과 사래에게서 아이가 생기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래가 한 일이 아브람에게 자기 여종과 동침하여 자녀를 얻자고 합니다. 아브람이 여종 애굽 사람 하갈과 동침하여 임신을 하게 됩니다. 임신을 하게 되자 종이 여주인을 멸시합니다. 창세기 16:4-14절을 봅니다. “봉독” 아브람에게 사래가 말하자 아브람이 사래의 처분에 맡깁니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니 하갈이 견디지 못하여 도망갑니다. 그런데 도망간 그 하갈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먼저 찾아와서 다시 사래에게로 들어가서 복종하라고 합니다.

이뿐 아니라 하갈에게 그 아이의 장래에 대하여도 하나님의 사자가 말하여줍니다.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가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 아이의 이름도 지어줍니다.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하라고 합니다.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어떻게 될 것도 말씀하십니다. 하갈이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을 듣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데 그 이름이 브엘라헤로이라고 합니다. 즉 감찰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니 이 본문만 보아도 여호와는 들으시고 감찰하시기에 우리도 기도하면 들으시고 감찰하여 주신다는 본문으로 삼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하갈의 고통을 들으시고 응답하여주셨는데 그 결과는 12절입니다. 그 아이가 들 나귀처럼 될 것이며 이들이 모든 사람을 치고 모든 사람이 그를 치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자식을 얻는 것이 축복입니까? 그런데도 왜 하나님께서 이런 하갈의 고통을 들으시고 응답하여 주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노선이 어떤지를 비 약속의 노선과 대비하여 보여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밖에 있는 사람들도 기도하여 응답받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응답을 받고 사라에게로 돌아가서 복종을 합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이 출생할 때에 아브라함 나이가 86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마엘 출생 후 99세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할례를 행하라고 합니다. 할례를 행하면서 이름을 바꾸어버립니다. 아브라함과 사래로 열국의 아비와 여 주인이 되게 한다는 이름으로 바꾸어주십니다. 그리고 얻은 아이가 이삭입니다. 아브라함도 사라도 믿지 못하여 웃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이삭 즉 웃음을 주신 것입니다.

그 이삭이 젖을 뗄 때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벌입니다. 이때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힙니다. 이것을 사라가 보고서는 아브라함에게 말하기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인간적인 시각으로 보면 사라가 모질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수가 있고 당연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정이 많은 사람이라면 모질다고 볼 것이고 그 당시의 주인과 종의 관계를 알면 당연하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라의 요구에 아브라함이 근심이 됩니다. 그래도 자기 씨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라의 말을 다 들으라고 합니다. 단지 여인의 질투로 내어 쫓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어 쫓아야 하는 것은 이삭을 통하여 나온 자식만이 네 씨라고 칭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능력만으로 나오는 것이 이삭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마엘은 인간의 능력으로 나온 자식입니다. 그러함에도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씨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약속의 자녀와 비 약속의 자녀가 어떻게 되는지를 보이시기 위한 것입니다.

천국을 말하면 지옥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지옥이 없는 천국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구원을 말하면 반드시 구원받지 못함이 있는 것입니다. 선택을 말하면 반드시 버림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벨과 가인이며 이삭과 이스마엘이며 야곱과 에서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스마엘이 나오는 과정을 보면 하나님께서 하갈의 고통을 들으시고 감찰하시며 한 민족으로 키우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이 떡과 물 한 가죽 부대를 하갈의 어깨에 메워주고 그 자식을 데리고 나가게 합니다.

하갈이 이스마엘을 데리고 광야를 헤맵니다. 떡도 물도 다 떨어집니다. 아이가 목이 말라 죽을 지경입니다. 그 아이가 죽어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볼 수가 없어서 그 자식을 떨기나무 아래 두고서는 화살을 쏘면 닿을 수 있는 거리만큼 떨어져서 아이를 마주보며 방성대곡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갈의 소리를 들으셨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로부터 하갈을 부릅니다. 하갈에게 두려워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저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아이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갈이 임신하여 있을 때에 이미 받은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갈의 눈을 밝혀주시니 샘물을 보게 됩니다. 하갈이 가죽부대에 그 샘물을 담아가서 아이에게 마시고 살게 합니다.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 거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이스마엘이 나중에 열 두 아들을 낳고 열 두 방백이 됩니다(창25:12-18). 이 말씀만 보면 하나님은 하갈의 방성대곡도 들으시고 아이 이스마엘의 소리도 들으셔서 살려주시고 큰 민족을 이루어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도 기도하여 응답을 받자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12방백을 가진 큰 민족을 이룬다고 하여도 약속의 자손은 이삭을 통하여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우리 인간의 애씀과 노력과 부르짖음이 응답이 되었다고 하여도 그것으로는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갈도 기도하여 응답받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간증 자들이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 것보다 더욱 생생하게 하나님을 체험한 하갈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을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수많은 응답들을 구별하여 보아야 합니다. 하갈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도 들어주셔서 나의 소원을 이루어주셨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아주 강력한 힘을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능력 있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응답받았다고 하는 그것이 예수님께서 과연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내용입니까? 아니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소원하고 부러워하는 땅의 속한 것들입니까?

마태복음1:21절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12월이 되기도 전에 백화점에서 아주 세련된 크리스마스 장식을 먼저 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 장식을 하고 그 장식을 보면서 연말분위기에 들뜨는 사람들이 자기 죄가 무엇인지를 알고 자기 죄에서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겠습니까? 그들이 원하는 바는 바로 하갈과 이스마엘이 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런 하갈과 이스마엘의 모습이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받았다는 내용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 죽어도 기도하는 사람은 살아남고, 다른 사람은 다 져도 기도하는 사람은 이기고, 박주영을 보십시오! 한 골 넣으면 기도합니다. 그것이 대단한 신앙적인 고백 같지만 그러나 평생 축구를 하고서도 국가 대표는커녕 실업팀에도 못 뽑히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이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데 세계적인 축구영웅들은 무슨 능력입니까?

그렇다면 하갈의 부르짖음과 응답이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주는 배경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합작으로 나온 이스마엘의 역할과, 아브라함도 사래도 믿지 못한 이삭의 역할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부모들이 다 하갈과 같은 것입니다. 내 자식 죽는 꼴을 못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능을 앞두고 새벽기도회 한다고 하면 평소에는 나가지 않아도 자식 위해서라면 40일도 100일도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대학가고 그래서 좋은 회사 취직하면 기도 응답이라고 하시겠습니까?

갈라디아서 4:21-31절을 봅니다. “봉독” 아브라함의 두 아들이 하나님의 두 언약을 보여주시기 위한 모델들입니다. 하나는 계집 종=시내산=지금의 예루살렘이고, 하나는 자유 하는 여자=위에 있는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므로 하갈이 방성대곡하여 응답받아 낳은 아들이 하는 역할이 약속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육체로 따라 난자가 성령으로 따라 난 자를 핍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유 하는 여자의 아들과 함께 유업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약속의 자녀들이 무엇을 부르짖겠습니까? 골로새서 3:1-11절입니다. “봉독”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만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한곳만 더 봅니다. 갈라디아서 6:6-8절입니다. “봉독”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육체로 심어도 거두기는 하는데 썩어질 것을 거둡니다. 성령으로 심으면 성령으로 영생을 거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심고 있습니까? 무슨 기도를 하면서 방성대곡을 해야 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