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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2:11~13 무엇이 위로인가? 2016. 1. 13


  

11 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이 모든 재앙이 그에게 내렸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지역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12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13 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

 

군중속의 고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도시에 이렇게 사람들이 많지만 자신은 외롭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도 외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커피숍에 사람들이 많이 않아있는 것을 봅니다. 다들 외롭기 때문에 위로할 자들이 필요해서 그런 모양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척 하고 있을지라도 그 사람의 마음은 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내가 너를 이해한다는 말이 얼마나 영혼 없는 말인지 우리도 알고 그 사람도 압니다. 이런 세상에서 종교 비슷한 단체들이 마음 다스리는 법을 가르쳐 준다고 합니다. 종교라는 곳에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치유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정말로 원하는 위로가 무엇인지 알기는 알고 위로한다고 합니까?

 

고린도전서 2:11절입니다.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이 말씀은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영 곧 성령님만이 아시고 그 성령이 임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안다고 하는 문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 중에 사람의 일은 사람의 속에 있는 그 사람의 영이 아는 것이지 다른 사람은 모른다는 말입니다. 내가 그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 어떤 말로도 그 사람의 마음을 알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위로한다느니 이해한다느니 사랑한다느니 하는 것들은 얼마나 피상적인 단어들인지 모릅니다.

 

잠언 26:23~25절입니다. “23 온유한 입술에 악한 마음은 낮은 은을 입힌 토기니라 24 원수는 입술로는 꾸미고 속으로는 속임을 품나니 25 그 말이 좋을지라도 믿지 말 것은 그 마음에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 있음이니라온유한 입술에 악한 마음은 낮은 은을 입힌 토기라고 합니다. 질 낮은 은을 토기에 입히면 겉으로는 은그릇으로 보이지만 그 안이 토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수는 입술로 꾸미고 속으로는 속임을 품습니다. 구밀복검(口蜜腹劍)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말이 아무리 좋아도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마음에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 있습니다. 일곱이란 성경에서 완전하다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복선을 까는 정도가 아니라 끝이 없이 가증한 것이 나오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런 자들이 환난을 당한 자들에게 도대체 무엇으로 위로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11절을 봅니다.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이 모든 재앙이 욥에게 내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모든 재앙이란 지금까지 욥이 당한 재앙입니다. 자녀와 모든 재산들이 까닭도 없이 한꺼번에 날아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욥의 몸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악창이 생겨서 쓰레기 더미에서 기왓장으로 긁고 있습니다. 이러한 욥에 대하여 아내는 욥에게 당신이 이렇게 되어도 하나님을 욕하지 않고 그 믿음의 순전함을 지키려고 하느냐고 하면서 그런 하나님이라면 차라리 하나님 욕하고 죽으라고 합니다. 얼마나 솔직담백한 사람입니까? 우리의 본성을 욥의 아내를 통하여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재앙의 소식을 들은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서로 약속을 하고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고 옵니다.

 

이 세 사람은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입니다. 여기서 데만이란 에돔의 성읍입니다. 이 데만을 지혜로운 자들이 많은 도시로 말합니다. 예레미야 49:7절입니다. 에돔에 대한 말씀이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데만에 다시는 지혜가 없게 되었느냐 명철한 자에게 책략이 끊어졌느냐 그들의 지혜가 없어졌느냐하나님께서 에돔을 심판하시는 말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지혜로 자신들의 삶을 안전하게 구축하여 가는 그런 지혜를 심판하시는 말씀이지만 데만 사람들이 지혜롭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유상종이라고 욥의 친구들도 다 지혜롭고 부요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그 시대의 모든 지혜를 대변하는 자들로 봐야 합니다. 이런 지혜 자들이 욥을 위로하려고 왔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세 친구가 욥을 위로하려고 서로 약속을 하고 욥을 찾아왔는데 도저히 전에 알던 욥으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얼마나 그 고난이 심하였으면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웁니다. 각기 자기의 겉옷을 찢습니다.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립니다. 이런 모습은 가장 슬픈 몸짓입니다. 욥도 자기의 겉옷을 찢고 울었습니다. 이제는 쓰레기 더미 곧 땅의 티끌에 앉아서 땅의 티끌로 만든 기와조각으로 땅의 티끌과 같이 된 자기 몸을 긁고 있습니다. 이러한 욥과 함께 자신들도 땅의 티끌을 뒤집어씀으로 욥의 고난에 함께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땅의 티끌을 뒤집어쓰는 것에 대하여 다른 성경도 찾아보겠습니다.

 

땅의 티끌이란 처음 사람 아담을 만드셨을 때에 땅의 티끌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을 불어넣으심으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타락 하였을 때에 하나님은 아담에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면서 에덴동산에서 추방하였습니다. 이제 스스로 생명나무로 나갈 수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땅의 티끌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생들은 자신을 땅의 티끌로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만 자신이 땅의 티끌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소돔 성을 멸하신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인도 함께 죽이시는 것이 공의롭지 못하다고 말씀드리면서 소돔에 의인 오십 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느냐고 하자 하나님은 용서 하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그 수를 줄이기 위하여 하나님께 청원할 때에 자신은 땅의 티끌과 재와 같지만 감히 주께 아뢰겠다고 합니다(18:27). 욥의 친구들이 티끌을 날려서 자기 머리에 뿌리는 것은 극한 슬픔의 표현입니다. 욥의 처참한 몰골에 함께 하는 모습니다. 이것이 위로가 될까요?

 

로마서 12:15절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 수가 있습니까? 신약에서 한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한 지체가 되었다면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즐거워하는 것도 같을 것이며 우는 것도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거저 나를 중심으로 내가 즐겁고 내가 기쁜 것으로 사람들이 함께 해 주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16절의 말씀을 보시면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는 무엇이 즐겁습니까? 높아지는 것입니까? 낮아지는 것입니까? 지금 욥은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자리까지 낮아졌습니다. 이런 욥에게 함께 운다고 위로가 됩니까?

 

본문 13절을 봅니다. 밤낮 칠일을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다고 합니다. 저는 이 친구들이 일주일동안 밥은 먹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어디서 밥을 먹고 와서 위로한다고 땅에 함께 앉아 있었을까요? 아니면 친구의 처참한 형편을 보고 함께 아파하기 위하여 일주일을 금식하였을까요? 그것은 모르는 내용입니다만 이정도로 함께 하는 것은 상당한 위로를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욥의 처참한 몰골 앞에서는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못함을 이들이 압니다. 그래서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일주일이 지나고 입을 먼저 연 사람이 욥입니다. 3장에서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면서 시작된 욥의 말은 자신은 이런 재앙을 당할 만큼 죄를 지은 적이 없다는 항변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엘리바스가 그렇지 않다고 공격하는 내용이 욥기 4~5장입니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나라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의지하겠다고 합니다. 이러한 엘리바스의 말을 들은 욥이 답하는 내용이 6장입니다. 그 중에 9~10절을 봅니다. “9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하나님이 그의 손을 들어 나를 끊어 버리실 것이라 10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

 

욥이 이런 재앙을 당한 것은 욥이 잘못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욥을 멸하시기를 기뻐하심으로 그의 손을 들어 나를 끊어버리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할지라도 욥이 받는 위로가 무엇입니까?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위로를 받고 기뻐하는 것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으면 복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음에도 고통이 그치지 않는데도 이것이 위로와 기쁨이 된다는 이 말씀이 도대체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가 됩니까? 아니면 욥이 하나님에 대한 반항이나 오기입니까?

 

6:14절을 봅니다. 낙심한 자가 비록 전능자를 경외하기를 저버릴지라도 그의 친구로부터 동정을 받느니라정말로 낙심하여 전능자 경외하기를 저버릴지라도 그의 친구로부터 동정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 말은 친구라면 그 사람이 너무 낙심이 되어 나 이제 전능하신 분을 경외하지 않겠다고 하면 저주하고 책망할 것이 아니라 얼마나 낙심이 되었으면 전능자를 경외하지 않겠느냐며 동정을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동정을 받는다는 말이 헤세드입니다. 긍휼과 자비가 나타나는 신실한 사랑을 말합니다. 그런데 지금 욥의 친구들은 자신을 동정하고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공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인과응보적인 위로가 욥에게는 상처가 되는 것입니다.

 

욥기 7:13~14절입니다. “13 혹시 내가 말하기를 내 잠자리가 나를 위로하고 내 침상이 내 수심을 풀리라 할 때에 14 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라게 하시고 환상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사람이 극심한 고통이 있을지라도 아주 잠시 고통이 멈추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럴 때에 잠시라도 잠을 자게 됩니다. 그러면 잠시 쉬어집니다. 그런데 욥은 잠자리에서 위로를 받고 수심을 그치리라고 생각했지만 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라게 하시고 환상으로 두렵게 하시니 잠시 자는 잠자리도 자신에게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욥기 15:11~13절입니다. “11 하나님의 위로와 은밀하게 하시는 말씀이 네게 작은 것이냐 12 어찌하여 네 마음에 불만스러워하며 네 눈을 번뜩거리며 13 네 영이 하나님께 분노를 터뜨리며 네 입을 놀리느냐욥이 친구들의 위로를 거절합니다. 너희가 말하는 그런 위로는 나에게 아무른 소용이 없고 오히려 고통이라고 말하자 엘리바스가 다시 공격하는 말이 하나님의 위로와 은밀하게 하시는 말씀에 네게 작은 것이냐고 하면서 어디서 마음에 불만을 품고 눈을 번뜩거리며 하나님께 분노를 터뜨리고 네 입을 놀리느냐고 합니다. 엘리바스는 지금 하나님의 말씀으로 욥을 위로한다고 하면서 욥을 다시 공격을 합니다.

 

욥기 16:1~5절입니다.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 3 헛된 말이 어찌 끝이 있으랴 네가 무엇에 자극을 받아 이같이 대답하는가 4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나니 가령 너희 마음이 내 마음 자리에 있다 하자 나도 그럴 듯한 말로 너희를 치며 너희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 수 있느니라 5 그래도 입으로 너희를 강하게 하며 입술의 위로로 너희의 근심을 풀었으리라엘리바스의 말에 욥이 대답하는 내용입니다.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라고 합니다. 위로가 아니라 오히려 재난이라는 말입니다. 너희 마음이 내 마음 자리에 있다면 나도 너희를 그렇게 조롱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라면 입술의 위로로 너희의 근심을 풀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욥기 21:1~2절입니다.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너희는 내 말을 자세히 들으라 이것이 너희의 위로가 될 것이니라고난 당하는 욥이 위로하려고 온 친구들에게 말하기를 내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이 것이 너희의 위로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구체적인 내용은 나중에 본문에게 보겠습니다만 오늘은 욥의 친구들이 욥을 위로하려고 왔지만 결코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서는 그런 위로가 오히려 재난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21:34절에서는 너희가 나를 헛되이 위로한다고 합니다. 위로에 대하여 얼마나 치열한 논쟁이 이어이지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욥기 29:24~25절입니다. “24 그들이 의지 없을 때에 내가 미소하면 그들이 나의 얼굴 빛을 무색하게 아니하였느니라 25 내가 그들의 길을 택하여 주고 으뜸되는 자리에 앉았나니 왕이 군대 중에 있는 것과도 같았고 애곡하는 자를 위로하는 사람과도 같았느니라욥의 친구들이 돌아가면서 욥이 공격하는 말이 까닭 없이 이런 재앙이 올 리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 말들에 대하여 자신은 그런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하면서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위로가 되어준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을 위로한다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 오늘 말씀을 통하여 보게 됩니다. 그러면 정말 성도가 성도에게 위로할 내용이 없는 것입니까? 무엇이 참된 위로입니까?

 

창세기 5:28~29절입니다. “28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창세기 5장에서 이미 사람들은 위로가 필요한 자들입니다.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심으로 수고롭게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저주의 땅에서 안위가 필요하다고 라멕이 아들을 낳고서 이름을 노아라고 짓습니다. ‘노아안위라는 말이 오늘 본문의 위로와 같은 내용입니다. 그러면 노아를 통하여 보여주는 참된 안위와 위로가 무엇입니까? 온 세상이 물의 넘침으로 멸망 받는 곳에서 참된 위로가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먹고 마시며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위로입니까? 지금 한국의 젊은이들이 칠포세대라고 합니다. 한동안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삼포세대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여기에다가 집, 인간관계, , 희망을 포기한 칠포세대라고 합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을 헬 조선 이라고 합니다. 지옥 조선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교회가 어떤 위로를 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주신 위로가 무엇입니까? 홍수의 심판 속에 방주를 만들게 하셨습니다. 그 방주에 타는 것이 안위입니다. 그 방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그림자입니다.

 

고린도전서 7:29~31절입니다. “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0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이 말씀이 위로가 되십니까? 이 말씀이 위로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직 세상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지나는 이 세상의 외형이 아니라 영원한 그 아들의 나라가 우리 안에 침투하여 들어와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유일한 위로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만이 유일한 위로가 되는 현장이 노아의 홍수 때이며 욥의 환난의 때입니다.

 

고린도후서 1:1~6절입니다.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바울사도가 고린도 지역의 교회에 편지하면서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모든 위로의 하나님께서 환난을 주시지 않고 위로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환난 중에 사도들을 위로하였다고 합니다. 그런 환난 중에 위로는 받은 자들이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환난을 당하지도 않은 주제에 환난을 당하는 자에게 위로한다는 것이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받는 그 수많은 환난들을 통하여 무엇이 위로가 되었다는 것입니까? 그 환난 중에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들의 위로입니다. 사도들이 받은 이 위로가 너희에게도 임하여 너희가 당하는 환난을 견디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어지는 7~10절입니다.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언제 위로가 주어집니까? 살 소망 까지 끊어지게 되는 그런 자리에서 위로가 주어집니다. 이런 위로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낡아지지 아니하는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위로를 얻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무엇이 사람들에게 진정한 위로입니까? 지금도 노아의 때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바울이 복음 전하던 그 때와 다름이 없습니다. 노아 홍수 때에 무엇이 위로입니까? 방주에 타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때에 정말 무엇이 위로입니까? 영원한 피난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참된 위로입니다.

 

그리스도 영이 임한 노아와 욥은 장차 그리스도로 임할 참된 안위를 예언한 선지자들입니다. 이들이 받은 안위에 대한 소망은 온 세상이 물로 심판을 받은 홍수를 통하여 참된 위로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욥은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이 날아가고 자녀들이 다 죽어버리고 자신의 몸도 전신에 악창이 되었습니다. 그런 때에 참된 위로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선지자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선지자들이 증거 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들이 바라본 그 위로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십자가입니다. 모두가 사고팔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기 바쁜 시대에 홀로 방주를 예비하면서 조롱당한 그 노아처럼 예수님은 홀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욥처럼 모든 사람들이 다 조롱하는 십자가에서 자기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느냐는 조롱을 받으시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느냐는 그 절규에도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절대의 고독이 그 절대의 소외됨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생명의 길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구약에서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들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의 영광을 내다보고 위로를 받았듯이 오늘날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그 말씀이 우리의 참된 위로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람과 하나님께 버림받은 그 절대고독의 자리가 위로가 되는 사람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들도 위로가 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참된 위로를 받은 자들은 서로 위로를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위로가 우리 안에 더욱 풍성하여 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