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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56:1~13 두려워하는 날에는 2021. 6. 16

 

1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하나이다 2 1)내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하게 치는 자들이 많사오니 3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4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5 그들이 종일 내 말을 곡해하며 나를 치는 그들의 모든 생각은 사악이라 6 그들이 내 생명을 엿보았던 것과 같이 또 모여 숨어 내 발자취를 지켜보나이다 7 그들이 악을 행하고야 안전하오리이까 하나님이여 분노하사 뭇 백성을 낮추소서 8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9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들이 물러가리니 2)이것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내가 아나이다 10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11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12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13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56편의 표제어를 봅니다. 다윗의 믹담 시, 인도자를 따라 요낫 엘렘 르호김에 맞춘 노래, 다윗이 가드에서 블레셋인에게 잡힌 때에표제어가 깁니다. ‘믹담은 시편 16편에 나왔는데 정확한 뜻을 몰라서 히브리어의 비슷한 단어를 찾아서 황금시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요낫 엘렘 르호김이라는 단어들을 조합하면 먼 느티나무 위의 비둘기 한 마리또는 멀리 있는 잠잠한 비둘기라는 뜻이 됩니다. 이런 곡조의 이름은 시편 저자가 외로운 비둘기의 모습이기에 주의 도우심을 구하는 내용입니다.

 

배경은 다윗이 블레셋인에게 잡힌 때라고 하니 사무엘상 21:10~15절을 봅니다. 봉독다윗은 이스라엘 안에서도 쉴 곳이 없습니다. 기름 부음 받은 다윗을 기름 부음이 떠난 사울이 죽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땅 블레셋의 아기스 왕에게 망명하려고 합니다. 그러자 아기스 왕의 신하가 다윗이 어떤 자인지 말합니다. 그러자 다윗은 죽음의 위협을 감지합니다. 다윗은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미친 체하여 겨우 살아남았습니다. 고대사회에서 미치광이를 해치면 그 사람을 미치게 한 악한 영에 사로잡힐까 하여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다윗은 이스라엘 땅에서도 이방인의 땅에서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두려울 때 다윗은 어떻게 합니까?

 

그 답변 이전에 오늘 우리는 어떤 두려움들이 있습니까? 육십 평생에 독감 예방주사를 맞은 적이 없는데 월요일 코로나19 백신주사를 맞았습니다. 그래서 코로나 백신도 맞지 않으려고 했는데 직업이 다중 접촉을 하는 자라서 주사를 맞는데 간호사가 겁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별 겁 없이 주사를 맞았는데 많은 사람이 겁을 내서 여러 질문을 하였는지 주사실 앞에 이런 글귀가 있었습니다. 운전 중에 말을 많이 걸면 방해되는 것처럼 주사 중에 말을 걸지 말아 달라고 하였습니다.

 

몇 주 전에 서울에 어떤 분이 코로나 백신에 관한 영상을 보냈습니다. 미국에서 만든 동영상인데 백신을 맞으면 유전자 조작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백신을 맞아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제가 다음 주에 백신 맞으러 간다고 하면서 빨리 죽어 천국 가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함께 가자고 하면서 예수님의 다 이루심의 복음으로 자유 해야 하는데 억압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분은 전에는 세대 주의 해석을 따랐기에 아직 그런 두려움이 있는 겁니다. 그러나 백신주사를 맞아도 맞지 않아도 결국은 사람들이 다 죽습니다. 진짜 죽음은 두려워하지 않고 한평생 가짜 죽음을 두려워하며 사는 것은 죄와 사망의 종이라서 그런 겁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는 날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본문을 봅니다.

 

오늘 본문을 두려움과 사람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단락으로 나누어봅니다. 1~3절에서 두려움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두려움을 주는 자가 사람(에노쉬)입니다. 그러므로 주를 의지합니다. 4~10절에서도 두려움을 주는 자가 인생(바사르)이라고 나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11~13절도 두려움이라는 단어가 나오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의지하였기에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여기서 사람(아담)이 내게 어찌하겠느냐고 합니다. 사람이 두려움을 주지만 그런 두려운 때에 주를 의지합니다.

 

본문 1~3절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한다고 합니다. 내 원수 앞에 각주가 있습니다. 나를 엿보는 자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에서 보았습니다만 이스라엘 나라 안에서도 나라 밖에서도 종일 엿보며 압박하고 죽이려고 합니다. 사람이 누구의 감시를 받는다면 어떻게 일상생활을 하겠습니까? 이렇게 두려워하는 날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주를 의지하겠다고 합니다. 두려움을 스스로 해결할 수가 없기에 주를 의지합니다.

 

여기서 성경에서 최초의 두려움은 언제 왔는지 보겠습니다. 창세기 3:10절입니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선악과를 따 먹기 전에는 벌거벗고 있어도 부끄럽지도 두렵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 먹고 나니 벗고 있음이 두려운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때부터 자기가 자기를 가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자기의 치장한 옷이 벗겨지고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의의 옷을 입게 됩니다. 그러함에도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인생들의 삶은 사람이 두려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살해하는 세상입니다.

 

본문 1~3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 하나님께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하는 이유는 사람 때문입니다.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하고 삼키려고 합니다. 교만하게 치려고 합니다. 이러한 자들이 사나운 짐승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로 인하여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사람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에노쉬입니다. 시편 10315절입니다. 인생은 그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여기서 인생이 에노쉬입니다. 풀과 같은 인생이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은 사람이 핍박하고 삼키려고 하여도 잠시 후에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두렵게 할 때 또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겁니다.

 

잠언 29:25절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이사야 51:12절입니다. 이르시되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지만 타락한 이후의 인간들은 사람이 두렵습니다. 지금 다윗도 사람이 심히 두려워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였더니 사람(에노쉬)이 허약한 인간임을 알았기에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를 의지합니다.

 

본문 4절입니다. “봉독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는 것은 방금 찾아본 잠언과 이사야 두 곳의 말씀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의지하였기에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겠느냐고 합니다. 여기서 사람이란 바사르입니다. 사람이 육신인 바사르를 그의 힘으로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17:5). 하나님의 영이 떠나 버린 인간은 바사르가 됩니다(6:3). 몰락할 인간이 되었는데 그런 인간의 힘을 두려워하는 것은 마음이 여호와께 떠난 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사람을 두려워하며 주의 은혜를 구하였더니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한계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5~10절입니다. “봉독사람 곧 바사르, 몰락할 인생들이 주의 택한 백성을 종일 곡해하며 칩니다. 그들의 모든 생각이 사악합니다. 생명을 엿보고 있습니다. 호시탐탐 그 발자취를 지켜봅니다. 그런데 그 바사르들의 세계에서는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제거하는 일이 선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므로 이런 악을 행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분노하셔서 낮추어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들은 그런 자들의 악행으로 인하여 떠돌아다니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 눈물을 병에 담아주시고 책에 기록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 아신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들이 물러감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내가 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의 말씀을 찬송한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다윗의 찬송이기에 모든 주의 택한 백성들의 찬송이기도 하지만 그 중심은 그리스도입니다.

 

본문 5~6절을 보면 다윗을 호시탐탐 노리는 자들이 예수님을 책 잡기 위하여 노리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시든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엿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언행을 보고서 율법으로 책잡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부러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그러자 왜 안식일을 어기느냐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으로 안식을 이루려고 오셨다는 말씀을 그들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병자를 고쳐주시면서 내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몰아붙입니다. 도둑의 소굴이 된 성전을 헐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그들은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일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죽음의 자리에도 자기 백성과 함께하실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2:14~18절입니다.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4)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사람이 혈과 육에 속하였다는 것은 죽기를 무서워하는 겁니다. 그래서 한평생 죽음을 무서워하면서 살아갑니다. 죽지 않으려고 무슨 짓이든 다 하는 게 연약한 인생들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혈과 육의 죽음도 두려운 거지만 사회적인 죽음도 두렵기에 사람들은 자살까지 하면서 자기의 사회적인 매장을 피하려고 합니다. 이런 두려운 죽음의 자리에 과연 누가 함께 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여도 죽음의 자리에 아무도 함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우리의 죽음의 자리에 오셔서 사망의 권세에서 생명의 권세로 옮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주님을 믿는 자들은 사람이 두렵게 하는 날에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합니다.

 

본문 11절입니다. “봉독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기에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1절에서 10절까지 두 번이나 사람이 나를 두렵게 하는 날에는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두려움이 극복되었기에 이제 세 번째는 하나님을 의지하였기에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람이 내게 어찌하겠느냐고 합니다. 여기서 사람은 아담입니다. 아담의 어원은 흙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사람은 처음이 허약한 인간이라는 에노쉬이며 두 번째는 몰락하는 바사르이며 세 번째가 아담곧 땅의 먼지입니다. 이런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출애굽기 14:13절입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홍해 바다 앞에서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을 보라고 합니다. 우리가 가만히 서 있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하심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가만히 서 있음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서 있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1:29~33절입니다. “29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30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31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32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약속의 땅 문 앞에서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갈렙은 가나안 원주민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성이 튼튼하고 거인족이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들어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열 명은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지 못한 자들을 광야 40년 동안 죽이신 후에 다시 말씀하시는 내용이 신명기입니다. 너희들이 40년 동안 사람이 어린아이를 안듯이 안아왔음에도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구름 기둥 불기둥이 함께 하여도 믿지 않았기에 두려운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 속에 들어와야 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10:28~31절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우리가 두려운 것은 몸이 죽는 겁니다. 그러나 참으로 두려워할 분은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할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몸에만 관심이 있고 영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혼이 죽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는다는 말이 제일 두렵습니다. 심지어 제자들조차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다 도망갔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는 자리에도 함께하겠다고 큰소리쳤지만, 몸의 죽음 앞에 다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그런 제자들을 부활하신 주님이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약속하신 후에 승천하시고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니 죽음 앞에서도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몸을 죽이는 자들이 두려운 자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전합니다. 이 내용 자체가 목숨을 걸어야 하는 내용입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다 싫어하는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두려움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이 영으로 제자들 안에 오셔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도 임하면 사람과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본문 11~13절을 표준 새 번역으로 보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11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니, 그 어느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사람이 나에게 감히 어찌하겠습니까? 12 하나님, 내가 주께 서약한 그대로, 주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겠습니다. 13 주께서 내 생명을 죽음에서 건져주시고, 내가 생명의 빛을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거닐 수 있게, 내 발을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