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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63:1~11 영혼의 갈망 2021. 8. 4

 

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2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3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4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5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6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7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8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9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그들은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10 칼의 세력에 넘겨져 1)승냥이의 먹이가 되리이다 11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께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

 

본문의 표제어는 다윗의 시로 다윗이 유다 광야에 있을 때라고 합니다. 1절을 보면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2절에서는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6절에서는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유다 광야만이 아니라 다윗이 사는 곳 어디서나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은 자기의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함으로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우리의 갈망은 무엇입니까?

 

본문 1절입니다. 하나님을 부르면서 주는 나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누구누구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친밀감을 말합니다. 어느 집사님은 남편과 함께 교회를 다녔는데 자신의 남편이 미워서 당신의 하나님이 싫다고 하였답니다. 그럴 때 집사님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고 제가 물었답니다. 그때부터 자신의 하나님이 누구신지 생각해 보았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주의 영이 임하여 하나님을 맛본 자들이 말할 수 있습니다.

 

시편 34:8~10절입니다. “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9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10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고 합니다. 주의 선하심을 맛보아 안 자들만이 주께 피하는 겁니다. 주를 경외하고 주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좋은 것이란 세상이 말하는 좋은 것들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젊은 사자같이 힘센 자들이 차지하지만, 주의 인자는 맛본 자만이 구합니다.

 

다시 본문 1절을 봅니다. 나의 하나님을 간절히 찾습니다.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는 생물이 살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뜨거운 여름날에 물이 없는 메마른 광야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 절박한 심정을 주를 찾습니다. 그래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바라고 사모한다고 합니다. 영혼과 육체가 주를 갈망하고 사모한다는 말은 전인이 주를 갈망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영혼이라는 단어가 네페쉬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살아있는 존재란 하나님을 갈망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뱀의 유혹으로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선악을 자신이 판단하면서 살아가겠다는 말은 내가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겁니다. 선악과를 따 먹었기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생명 나무가 있는 에덴동산에서 추방하십니다. 추방하시면서 하나님께서 땅이 너희로 인하여 저주를 받았기에 너희는 평생 수고하며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때부터 인생들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흙에서 나온 것을 먹고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사람들의 갈망은 썩어질 것만 갈망하면서 살아갑니다. ‘네페쉬는 갈망하는 인간인데 타락하니 생명이 아닌 썩을 것만 갈망합니다.

 

창세기 6:1~8절을 보면 사람들이 자기 마음의 좋은 대로 살아갑니다. 자신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모습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2:3). 이런 세상이 된 것은 사람이 육신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육신이 바사르입니다. 네페쉬가 갈망하는 인간인데 타락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그런데 타락하고 나니 썩어질 것만 갈망하다가 몰락하는 인간 곧 바사르가 되었습니다. 이런 육신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습니다.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며 자기의 이름을 내는 일이 생의 최고의 갈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은 이들과 함께하실 수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자들만이 하나님을 갈망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다윗의 네페쉬가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간절히 주를 찾는데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육체란 바사르입니다. 몰락할 인생이 썩어질 것을 갈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갈망하는 자체가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갈망이 있습니까?

 

본문 2절입니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이 말을 완료형으로 보면 지금 광야에서 과거 주님의 임재의 장소인 성전에서 주를 바라보았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다른 번역은 현재형으로도 말하고 있습니다. 현재형이 된다면 지금 성전에 들어갔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표제어대로 지금 다윗이 광야에 있다면 광야에서 주를 갈망하는 그 장소가 성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건물로 된 성전이 있어도 그 안에서 주를 갈망하지 않으면 그 성전이 우상 숭배의 장소가 됩니다. 그러므로 광야와 같이 메마른 땅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주를 갈망하면 이것은 주의 영이 임한 것입니다. 그곳이 비록 광야일지라도 주께서 임재하시니 성전입니다.

 

본문 3~4절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다고 합니다. 지금 유다 광야로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유다 광야에서 주의 은혜가 임하여 주를 갈망하게 되니 그곳이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다고 합니다. 주의 인자함이란 헤세드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따른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이 인자함을 맛보았다면 지금 메마른 광야라도 주님을 찬양합니다. 육신이 된 다른 사람이 볼 때 메마른 광야에서 죽을 것 같은 삶인데 주의 인자로 찬양하면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라고 합니다. 주의 인자를 맛보지 못한 자는 알 수 없습니다.

 

육신이 된 사람 곧 바사르는 세상의 섞어질 것을 기준으로 성공과 실패를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처럼 광야에서 아무것도 없는데 주를 찬양한다고 하면서 주의 인자하심이 내 생명보다 귀하다고 하면 육신의 사람들은 전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생명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 형태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그 어떤 생명이라고 하는 것도 주의 인자함이 없으면 결코 살 수가 없습니다. 바닷속의 물고기조차 주의 인자함이 없으면 당일에 흙으로 돌아갑니다.

 

시편 104:26~30절입니다. “26 그곳에는 배들이 다니며 주께서 지으신 3)리워야단이 그 속에서 노나이다 27 이것들은 다 주께서 때를 따라 먹을 것을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28 주께서 주신즉 그들이 받으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그들이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29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30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모든 생물만이 아니라 바다의 리워야단 조차 주께서 주시면 먹고 주께서 낯을 숨기시면 떨고 그들의 호흡을 거두시면 죽어 먼지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땀을 흘려서 먹고 살아가는 양식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인데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고 썩어질 것들만 갈망합니다. 그러므로 온 세상에 죄악이 가득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성경은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합니다(17:9). 그러므로 30절 말씀처럼 주의 영을 보내셔서 그들을 새롭게 창조하셔야만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낫다고 찬송합니다.

 

본문 5절입니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한다고 합니다. 여기의 영혼도 네페쉬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거듭나야만 하나님을 갈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다고 찬양하는 것은 비록 그의 삶이 광야의 삶이라고 하여도 주의 영이 임하였기에 주의 인자하심을 찬양하는 겁니다. 이런 자들의 영혼은 만족합니다. 육체가 좋은 음식으로 만족하는 것처럼 나의 영혼이 만족하는 것은 주의 인자함을 맛보기 때문입니다. 주의 인자함을 따라 주어진 영혼의 만족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윗도 성령으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였습니다(110:1, 22:43). 그러므로 다윗이 대적들에 쫓겨서 광야를 전전할지라도 그곳에서 주의 인자함을 찬송하는 겁니다.

 

우리도 주의 영으로 인하여 주의 인자함을 맛보지 못하면 세상의 썩어질 것을 찾아 만족을 구하려고 합니다. 아무리 채워도 해갈되지 않는 것들인데 이 세상의 신은 그런 것을 채우면 만족할 것이라고 유혹합니다. 온 세상이 다 그렇게 달려갑니다. 우리가 배고픈 시절에 배만 부르면 소원이 없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배가 부르고 나이 배가 고플 때의 욕망은 하나였지만 배가 부르고 나니 욕망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끝없이 우리 속에서 솟아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온갖 취미가 있고 온갖 갈망들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물 좀 달라고 노래는 가수들도 많습니다. 목마른 이유를 봅니다.

 

예레미야 2:13 절입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사람들이 목이 마른 이유가 여기에 나옵니다. 터진 웅덩이가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만족을 위하여 아담의 타락 이후로 인간들이 해보지 않은 일이 없습니다. 솔로몬의 전도서에 이미 다 나와 있습니다. 세상에서 자기의 기쁨과 만족을 위하여 권력과 지혜를 가지고 해볼 수 있는 일을 다 해보았지만, 해 아래 행한 그 모든 일은 사람에게 참된 만족을 줄 수 없는 헛되고 헛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인자함을 맛본 자들만이 광야에서든 침상에서든 주를 기억하며 주를 찬송합니다.

 

본문 6~7절입니다.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한다고 합니다.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린다고 합니다. 밤이든 새벽이든 주님과 동행하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나의 도움이 되셨다고 하는 도움은 어떤 도움입니까? 많은 사람이 기도 응답을 간증합니다. 그런데 그 응답이라고 하는 내용이 나의 생명보다 나은 것입니까? 나는 세상이 볼 때 약하고 병들고 죽어 없어져도 괜찮은 내용입니까? 그러므로 다윗이 주의 도움이 되었다고 하는 찬송은 주의 날개 그늘에 피하여 들어간 겁니다. 주의 날개 그늘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3:37~39절입니다. “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3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주의 날개 아래 피하였다는 것은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자들은 선지자들을 죽인 자들의 후손입니다. 선지자들을 보낸 이유는 주의 날개 아래 모으기 위함입니다. 다윗이 주의 날개 그늘에 피하였다는 것은 주의 영으로 예수님을 증거 한 일입니다. 이 날개라는 말은 덮어주고 가려주는 날개인데 노아의 방주와 언약궤의 뚜껑들이 다 덮어주는 역할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그 날개 아래 오지 않는 이유는 자기들이 원하는 구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심으로만 구원하십니다.

 

본문 8~11절입니다. 8절에서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나의 영혼이란 네페쉬입니다. 영혼이라고 해서 영육 이원론이 아니라 나의 전 존재가 주를 가까이 따르는 겁니다. 이것이 주의 오른손의 구원을 받은 자들의 갈망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에 대적이 나옵니다. 그래서 9절에서 나의 영혼 곧 주를 갈망하는 그 영혼을 멸하려는 자들은 땅 깊은 곳에 들어가게 된다고 합니다. 칼의 세력에 넘겨서 짐승이 먹이가 됩니다. 이 짐승도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용과 바다짐승 땅의 짐승에게 삼키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그러나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합니다. 그러므로 주께 맹세한 자마다 자랑합니다. 주께 맹세한 자란 주의 인자함을 맛보았기에 주의 언약을 믿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주의 날개 아래 피하는 자들입니다. 주를 가까이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주의 인자함을 자랑합니다. 주의 인자함이 나의 생명보다 낫다고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거짓말하는 자들은 그 입이 막힐 것입니다. 거짓말하는 자들이 둘째 사망에 들어가는 자들입니다(21:8). 거짓말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요한일서 4:9~12절입니다. “9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것이니라 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증거는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겁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믿지 않는 자들이 거짓말하는 자들입니다(요일 2:22). 그러므로 다윗이 맛본 주의 인자함과 다윗이 피한 주의 날개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윗도 죄인이지만 어떻게 이런 갈망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주의 영이 임하여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자들은 새로운 갈망이 생깁니다.

 

베드로전서 1:8~12절입니다.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이러한 갈망이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