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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28:18~28 자기 생각을 믿는 자 2018. 7. 25

 

18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나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곧 넘어지리라 19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으려니와 방탕을 따르는 자는 궁핍함이 많으리라 20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하리라 21 사람의 낯을 보아 주는 것이 좋지 못하고 한 조각 떡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범법하는 것도 그러하니라 22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고 빈궁이 자기에게로 임할 줄은 알지 못하느니라 23 사람을 경책하는 자는 혀로 아첨하는 자보다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느니라 24 부모의 물건을 도둑질하고서도 죄가 아니라 하는 자는 멸망 받게 하는 자의 동류니라 25 욕심이 많은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되느니라 26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 27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하려니와 못 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크리라 28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고 그가 멸망하면 의인이 많아지느니라

 

지난주에 18절이 마지막 구절이었습니다. 그때 성실한 자란 앞 구절과 연결하여 여호와를 경외하여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성실한 사람은 구원을 받겠지만 굽은 길을 행하는 자는 자기가 부자라고 여기기에 지혜롭다고 여기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물질만의 부자가 아니라 자기 의로 가득한 자는 자기 죄를 모르기에 굽을 길로 행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가 성실한 사람입니다.

 

오늘은 18절로 시작합니다.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나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곧 넘어지리라고 합니다. 새 번역은 이렇습니다. “흠 없이 사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그릇된 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언젠가는 한 번 넘어지고야 만다.” 성실하게 행한다는 것은 흠 없이 사는 것을 말하지만 히브리어 단어의 뜻에는 순전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흠 없이 사는 사람이며 순전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구원을 얻을 자신이 있습니까? 저는 이 말씀만 보아도 자신이 없습니다. 저는 성실하게 살지도 못하고, 흠 없이 살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성실하게 사는 사람과 대비되는 단어가 굽은 길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굽은 길로 행한다는 것은 그릇되게 두 길을 걷는 자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영어로 보면 사악하게 자기의 길을 걷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굽은 길을 가는 자는 두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성실하게 행하는 사람은 한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마태복음 6:24절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두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실하지 못합니다. 성실(誠實)은 사람의 속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물론 사람도 성실한 사람이 있지만 언제나 상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약속에 성실하시고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로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성실함이며 신실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이 얼마나 두 마음으로 살아가는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마음을 믿지 않고 주님만 의지합니다. 26절에서 다시 보겠습니다.

 

19절입니다.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으려니와 방탕을 따르는 자는 궁핍함이 많으리라고 합니다. 새 번역입니다. “밭을 가는 사람은 먹을 것이 넉넉하지만, 헛된 것을 꿈꾸는 사람은 찌들게 가난하다.” 옛날에는 농사가 주업이었기에 밭을 경작하는 것을 성실함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성실하게 자기의 일을 하지 않고 헛된 것이나 꿈을 꾸는 자는 찌들게 가난해 진다고 합니다. 불로소득(不勞所得)을 바라는 자들이 헛된 꿈을 꿉니다. 저는 경제를 잘 모르지만 부동산 투기, 주식투자, 비트코인, 다단계 같은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20절에서 봅니다.

 

20절입니다.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공동번역입니다. 꾸준한 사람은 많은 복을 받지만 벼락부자가 되려는 사람은 벌을 받고야 만다.” 성실한 사람과 연결이 되는 단어가 충성된 자, 꾸준한 자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복을 받지만 속히 벼락부자가 되려고 하는 자들은 결국 벌을 받는다고 합니다. 오늘날 경제의 구조가 복잡해져서 공장 하나 없어도 어마어마한 돈을 버는 회사들이 있습니다. 이런 회사는 주로 정보를 다루는 회사들입니다. 이런 정보들을 통합하고 처리하여 새로운 이익을 창출해 냅니다.

 

이런 것을 세상은 성공이라고 하지만 성경적인 원리로 보면 이런 벼락부자의 탄생들이 벌을 받고 있습니다. 벼락부자가 된 것이 왜 벌이 되느냐고 물으신다면 이 세상을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가치관들이 모두 경제적인 문제로 함몰되어 버린 것입니다. 돈이면 다 통한다는 물질주의가 만연합니다. 이것을 맘모니즘이라고 합니다. 맘몬이라는 말은 조금 전에 보았던 마태복음 6:24절의 재물을 헬라어로 마모나(μαμωνα)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종교를 찾는 것도 자기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면 결국 이 맘몬을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저것 필요하다고 하지만 자본주의에서는 돈이 제일 힘이 있기에 이런 재물에 함몰이 되는 것이 맘모니즘에 빠지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6~10절입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부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 벌을 받는 것을 바울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온 세상이 지금 벌을 받고 있습니다. 정치가들이 제일 큰 정치 슬로건으로 걸어 놓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두가 경제를 말합니다. 만약 어느 정당의 후보가 디모데전서 6장의 말씀을 공약으로 내세우면 몇 사람이 표를 주겠습니까? 그러므로 지금 대한민국이 벌을 받고 있으며 온 세상이 벌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을 고발해야 할 교회마저 예수 믿고 세상 사람보다 더 빨리 부자가 되고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간증으로 하고 있다면 이것이 맘모니즘에 빠져 있기에 벌을 받고 있습니다.

 

21절입니다. 사람의 낯을 보아 주는 것이 좋지 못하고 한 조각 떡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범법하는 것도 그러하다고 합니다. 새 번역입니다. “사람의 얼굴을 보고 재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람은 빵 한 조각 때문에 그런 죄를 지을 수도 있다.” 재판 하는 자리에도 얼마나 불법이 많은지 요즈음 뉴스를 보면 나옵니다. 대법원장도 재판으로 정부와 거래한 것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세상의 재판은 공정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정확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주님 앞에서 살아갑니다. 내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살든지 만물을 그 중심까지 살피시는 주님 앞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22절입니다.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고 빈궁이 자기에게로 임할 줄은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새 번역입니다. 죄악에 눈이 어두운 사람은 부자가 되는 데에만 바빠서, 언제 궁핍이 자기에게 들이닥칠지를 알지 못한다.” 악한 눈. 곧 죄악에 눈이 어둔 사람은 부자가 되는 데에만 마음을 두기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자가 되려고 하다가 궁핍함이 자기에게 임할 줄을 알지 못합니다. 세상에서 부자가 되려고 하다가 망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부자가 되려고 하는 길을 멈출 줄을 모릅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 안에 자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에 본 디모데전서 6장의 말씀이 자족을 모르는 자의 모습을 말한 것입니다.

 

23절입니다. 사람을 경책하는 자는 혀로 아첨하는 자보다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는다고 합니다. 아주 오래전에 어떤 청년이 다단계를 한다고 해서 제가 야고보서의 말씀으로 경책을 했습니다. 어디 가서 장사하여 이익을 보려고 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물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그것이 옳은 길이라고 하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로 인하여 안 그래도 가난한 청년이 빚을 져서 몇 년을 고생하였는지 모릅니다. 이제는 하라고 해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싼 수업료를 지불한 것입니다. 그렇게 빠진 이유는 속히 부자가 되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24절입니다. 부모의 물건을 도둑질하고서도 죄가 아니라 하는 자는 멸망 받게 하는 자의 동류라고 합니다. 자기의 부모의 것을 도둑질 하고서 죄가 아니라고 한 것은 이것은 자기 것이 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자는 살인자와 한 패라고 합니다. 사사기에 보면 미가라는 사람이 자기 어머니의 돈을 훔칩니다. 어머니는 돈을 훔쳐간 자는 저주를 받으라고 합니다. 아들이 저주가 겁이 나서 자기가 돈을 가져갔다고 하다 어머니는 그 아들이 착하다고 하면서 그 돈으로 에봇을 만들어 집안의 우상으로 섬깁니다. 사사 시대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모습니다. 자기 마음의 생각이 진리의 기준으로 자리 잡고 있기에 이렇습니다.

 

25절입니다. 욕심이 많은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된다고 합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이 왜 다툼을 일으키는 것입니까? 남의 것이라도 자기가 차지하려고 하기에 다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여호와를 의지하면서 믿음으로 경건하게 사는 자들이 악인들 보다 고난을 받습니다. 시편 37편과 73편과 하박국서와 욥기가 이런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주님으로 만족함을 배우기에 풍족하게 여기며 살아갑니다.

 

27절을 먼저 봅니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하려니와 못 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크리라고 합니다. 가나한 자를 못 본체하는 자는 왜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본 것처럼 속히 부자가 되려고 하는 자는 가난한 자를 돌볼 틈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요하신 분으로서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가 부요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께 한 것이 됩니다. 그런데 가난한 자를 못 본체 하면서 자기만 속히 부요하게 되려면 이것이 저주입니다.

 

28절도 먼저 봅니다.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고 그가 멸망하면 의인이 많아진다고 합니다 이런 말씀은 우리의 일상에도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독재자가 권력을 잡고 있으면 몸을 숨길 수밖에 없지만 그 악한 자가 멸망하면 의인들이 세력을 펼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적용보다는 이 세상의 악한 자는 반드시 멸망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처럼 성실하게 사는 사람은 영원한 의의 통치가 펼쳐지는 그 나라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본문 26절입니다.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라고 합니다. 공동번역입니다. 제 생각만 믿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 지혜롭게 살아가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 자기 마음을 믿는 다는 것은 자기 생각만 믿는다는 말입니다. 이런 자가 미련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지혜롭게 행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 마음의 생각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자는 주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오늘 본문 전체를 정리하여 보면 지혜롭게 행하는 자가 어떤 사람입니까? 성실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속히 부자가 되려고 하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성실한 사람입니다. 물론 이런 성실한 믿음은 은혜의 선물입니다. 이런 은혜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지만 이런 은혜가 없는 사람은 자기의 마음을 믿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마음을 믿는 사람, 곧 자기 마음의 생각을 믿는 사람이 미련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혜롭게 행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자기 생각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 성실한 자이며 지혜로운 자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아갑니까? 내 마음의 생각과 판단을 믿고 살지 않습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무수한 약속들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자기 마음의 생각과 계획과 판단을 믿고 산다면 이것이 미련한 자이며 악한 자입니다. 이들은 결국 멸망한다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거듭하여 나온 말씀입니다. 여기서 더 심각한 것은 성경을 보고 설교도 듣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의 마음의 생각대로 보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말씀을 들었다면, 욥처럼 의롭게 살았다고 하여도 입을 닫고 재 가운데서 회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것은 여전히 자기 마음의 생각으로 의롭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하다고 합니다(6:5,8:21).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17:9). 그러므로 이런 인간에게서는 의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자기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옳다고 여기는 것이 미련한 자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실상입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 모든 인간이 가진 생각이 이렇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명백하게 인간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지만 타락한 인간들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근대철학의 아버지라는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하여도 의심하고 있는 자신은 의심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온 명제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근대 철학의 창시자라는 자의 말입니다.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이 진리의 척도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하고 있는 그 자신의 마음의 생각이 항상 악하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미련함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정신만이 아니라 타락 이후의 모든 인간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고 성경이 증거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말씀을 믿는 것이 지혜입니다.

 

오늘 본문 26절을 다시 봅니다.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과 판단을 믿는 것이 미련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함을 알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얻은 자는 자기 마음의 생각이 항상 악함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자는 자기 마음의 생각을 믿을 수가 없음을 너무나 잘 알기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믿습니다. 자기를 자랑할 것이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자신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을 믿게 됩니다(고전1:30). 이러한 지혜가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