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마태복음 6:9-13 우리의 죄를 사하소서! 2011. 1. 12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나서 죄 용서에 대한 내용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먹고 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속담을 보면 짐작이 됩니다. ‘삼일 굶어 담 넘지 아니할 자가 없다.’ ‘뭐니 뭐니 해도 배고픈 슬픔이 제일 서럽다’는 우리 어른들의 말을 오늘 이 시대는 이해하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먹고 살기 위하여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일들이 죄가 아닌 것이 있습니까? 어떤 분들은 자기는 정당한 직장에서 정당한 일을 하기에 죄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보면 우리가 스스로 일하며 먹고 살아야 하는 이 상태가 하나님 앞에 범죄 한 일로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서 행하는 모든 일이 헛되며 죄인 것입니다. 왜 헛되며 죄가 되는가 하면 나의 노동력으로 겨우 먹고 살다가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신세이니 헛될 뿐입니다. 이런 노동력을 바탕으로 아무리 인간 스스로 선을 생산해 내려고 하여도 그런 선으로는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죄 아래 갇혀 일평생 수고하다가 죄의 결과인 사망으로 가야 하는 인생이기에 사는 것이 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날마다 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날마다 용서를 구하여야 하는 삶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용서를 구하라고 하면 가장 먼저 자신의 행위를 돌아봅니다.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는데 어떤 방식으로 돌아보는가 하면 자신의 삶의 문화에서 돌아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어느 인간이나 그 시대의 환경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 문화라는 것이 도덕, 윤리, 관습, 법의 형태로 나옵니다. 이런 기준에서 죄를 논하는 것은 상대적인 의만 나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죄 관으로는 성경의 죄를 전혀 모르게 됩니다.

 

죄가 무엇인지 알아야 죄의 용서를 구하는데 죄를 모르니 구할 용서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데 죄가 가려있으면 기도가 안 된다고 하니 죄를 회개하는데 어떤 회개만 나오는가 하면 유대인들은 율법을 범하는 것을 죄로 여기고 율법을 지키면 의로 여깁니다. 이방인은 이방인의 죄가 따로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교인들의 죄도 따로 있습니다. 어기면 중요한 죄로 여기는 것이 주일성수, 십일조, 교회에 충성과 헌신 등을 말합니다. 이런 것만 잘하면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과연 그러할까요? 율법 하나면 어겨도 다 죄가 되는데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무지하든지, 알고 한다면 사기입니다(갈3:10, 약2:10).

 

먼저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의 죄에 대한 것을 봅니다. 세 가지 범주로 인식하고 있는데 첫째는 회개하고 희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입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회개하고 돌아올 수는 있으나 용납되리라는 희망을 별로 가질 수 없는 이방인 죄인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자비가 미칠 수 있는 범주 밖의 사람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셋째는 이방인들처럼 되어버린 유대인들인데 이들은 회개해도 소용없고 받아들여질 희망이 없는 자들인데 목동, 창녀, 문둥병자, 세리등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마태복음 9:9-13절입니다. “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세리를 부르시고 세리의 집에서 음식을 먹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이런 행위를 보고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왜 세리와 죄인의 집에서 먹느냐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 의원이 필요하다고 하시면서 호세아서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예수님이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하시면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이보다 더 놀라운 복음의 소식이 어디에 있습니까?

 

율법을 받은 유대인의 죄에 대한 생각이나, 이방인이 서로 상대적으로 죄인이라고 하는 것이나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러한 죄에 대한 판단자체를 예수님은 뒤 엎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심 자체가 용서를 가지고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용서가 임하는 자리에 죄가 무엇인지가 나옵니다. 사람들이 죄를 먼저 고백하고 그 다음에 용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용서가 임하니 그 자리에서 죄가 무엇인지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용서를 받지 않으면 자기의 죄를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율법 자체가 사람을 죄 아래 가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3:22절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왜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인 아브라함의 언약만으로 의롭다 함을 받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율법이라는 말입니다.

 

로마서 3:9-12절입니다. “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죄 아래 갇혀 있다는 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모두가 죄 아래 갇혀있습니다. 또한 스스로 순종하여 나올 수도 없도록 불순종 아래 갇혀있습니다(롬11:32).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는 이런 자들에게 용서를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용서가 임하여야 죄를 죄로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용서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자들이 율법의 의로서 의롭다고 여기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면서 자기들은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이들을 향하여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습니다. 독사의 새끼들이라도 하십니다. 이들의 잘못된 의를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다 드러내십니다.

 

행동으로 나오지 않고 마음으로 생각만 해도 동일한 죄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들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속에서 도대체 무엇이 나옵니까? 마태복음 15:18-20절입니다. “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자기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청원하는 자들은 용서를 받은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를 회개하여 용서 받는 것이 아니라 용서가 일어난 자가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회개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참된 회개입니다. 성령이 임하여 죄에 대하여 책망하신다고 하셨는데 성령이 임하여 죄가 무엇인지 책망하는 내용이 요한복음 16:9절입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용서를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용서를 받은 자는 자신의 어떤 죄인인지를 압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용서를 모르는 자는 아직 자신이 죄인인줄 모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달라는 이 기도의 내용을 이해하려면 예수님의 비유를 한 곳 더 보아야 합니다. 거저 용서를 청원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하는 것이 단지 율법이나 윤리도덕차원에서의 용서를 구하는 차원이라면 회개하여 용서를 받은 자는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대가를 다 치렀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용서는 한량없는 용서이기에 결코 나의 어쭙잖은 회개라는 행위, 눈물로 통곡, 듬뿍한 헌금, 과도한 열심 등으로 상쇄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빚입니다. 그런데 죄의 용서를 받았기에 죄의 빚이라고 하지 않고 바울사도는 사랑의 빚(롬13:8)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복음이기에 복음에 빚진 자(롬1:14)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18:21-35절입니다. “봉독” 이 비유의 말씀이 주어지는 질문은 베드로가 하지만 베드로가 이런 질문을 하는 배경이 바로 앞의 15-20절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형제가 죄를 범한다는 것이 어떤 사본에 네게 죄를 범하거든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나에게 죄를 범하였는데 그 사람에게 혼자 가서 이야기해 보고 안 되면 두세 증인이 가고 그래도 안 되면 교회에 말하고 교회에서도 듣지 아니하면 이방인과 세리같이 여기라고 합니다. 이것은 두 세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자리는 땅의 문제만이 아니라 하늘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인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묻는 것입니다. 어떤 형제가 잘못하면 일곱 번을 용서하여 주면 되겠느냐고 하십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시면서 천국이 어떤 곳인지를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임금님이 종들과 결산하는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결산을 하는데 한 종을 데려오니 만 달란트 빚진 자가 옵니다. 만 달란트가 얼마나 되는지 계산을 한번 해 보았습니다.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인데 6천 데나리온이 1달란트라고 합니다. 6천일을 일하려면 20년을 일해야 합니다. 그러면 40년을 일해도 겨우 두 달란트도 갚지를 못합니다. 이자는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 결코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그런데 갚을 것이 없습니다. 주인이 어떻게 말합니까? 25절입니다. 자기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팔아서 갚게 하라고 합니다.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다 갚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말은 그렇게 하지만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줍니다. 그런데 그 종이 나가면서 자기에게 백 데니리온 빚 진자를 만나서 멱살을 잡고 빚 갚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갚겠다고 합니다. 백 데나리온은 백일만 일하면 갚을 수 있는 작은 금액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 사람을 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이 소위를 본 사람들이 주인에게 이릅니다. 주인이 그를 다시 부릅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불쌍히 여겨 탕감하여 주었는데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않느냐고 하시면서 그 빚을 다 갚도록 옥졸에게 넘기라고 하십니다. 이 사람은 영원히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이와 같이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어떤 분이 이 말씀을 보면서 이것이 용서냐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천국비유입니다. 천국이 어떤 곳인지를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오직 용서 받은 자만이 간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조건이라면 하늘 아버지의 용서도 없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천국은 아무도 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도 예수님이 이루어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용서의 효력을 성령님을 통하여 보내주십니다. 이 용서를 받은 자는 모든 성경을 보면서 자기의 죄를 보게 됩니다. 구약의 율법만이 아니라 신약의 모든 명령문을 통하여도 자신의 죄와 용서를 보게 됩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을 보면서 자기의 죄를 보게 됩니다. 나는 돈을 사랑하는 죄인이라서 일만 악의 뿌리가 나오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죄인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용서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용서가 임한 자가 회개하는 모습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도, 나는 나만 사랑하는 죄인인데 용서를 받았다는 것을 알므로 이웃에 용서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 기도의 능력이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