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설교 바로듣기]  [음성설교 다운받기]

다니엘 9:20~24 일흔 이레 2015. 10. 21

 

20 내가 이같이 말하여 기도하며 내 죄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고 내 하나님의 거룩한 산을 위하여 내 하나님 여호와 앞에 간구할 때 21 곧 내가 기도할 때에 이전에 환상 중에 본 그 사람 가브리엘이 빨리 날아서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즈음에 내게 이르더니 22 내게 가르치며 내게 말하여 이르되 다니엘아 내가 이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왔느니라 23 곧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이제 네게 알리러 왔느니라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그런즉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환상을 깨달을지니라 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5:39). 구약은 오실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신약은 오신 그리스도와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알고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6:29).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보아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신 일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내가 구원받을 것인지, 어떻게 하면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인지를 먼저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서나 요한계시록을 보면서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지를 염두에 두고 보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죄 인줄 알지 못합니다. 죄라는 것은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어 세상을 해석하고 성경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악과 사건 이후의 모든 인간이 다 이렇습니다. 자기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기에 성경을 통하여 나는 구원받아야 한다는 식으로 보게 됩니다. 구원 받기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가르쳐 주는 사람들에게 사람들이 몰려갑니다. 그러나 구원이란 사람에게서 기술 배우듯이 배우고 익힌다고 구원이 되는 것이 압니다. 구원이란 사람의 소관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의 창세전 언약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서 12:1절도 보시면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 책에 기록되는 것은 우리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뜻입니다. 우리가 애를 쓰고 노력한다고 책에 기록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우리의 구원 중심으로 읽으면 오독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피조물은 창조주의 의도대로 만들어진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음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어떤 자들은 진노의 그릇이 있으며 어떤 그릇은 긍휼의 그릇이 있습니다. 긍휼의 그릇으로 택한 자들은 무엇을 알게 됩니까? 자신이 진노를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압니다. 성경에 나타는 긍휼의 대상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긍휼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긍휼을 베풀기 위함이라고 로마서 11:32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일흔 이레에 대한 내용입니다. 일흔 이레는 전에 성경에서 칠십 이레라고 하였습니다. 공동번역은 칠십 주간이라고 합니다. 이 칠십 이레에 대한 해석을 보수주의 입장이 다르고 진보주의 입장이 다릅니다. 안식교의 해석이 다르고 안식교에서 나온 몇 사람들의 해석이 다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장 많이들은 내용으로는 세대주의 해석입니다. 이 세대주의적이 해석은 몇 년 전 수련회 때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세대주의 안에서도 여러 가지 견해가 또 나옵니다. 한국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세대주의적인 해석입니다. 세대주의 안에서도 천년왕국의 기점을 언제 보느냐로 또 나누어집니다. 오늘은 일흔 이레에 대한 전체적인 내용을 다니엘 9:20~24절을 통하여 보고 25~27절은 다음 주에 보겠습니다.

 

본문 20절을 봅니다. “20 내가 이같이 말하여 기도하며 내 죄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고 내 하나님의 거룩한 산을 위하여 내 하나님 여호와 앞에 간구할 때다니엘의 이 기도는 지난주에 본 언약을 따른 회개에서 본 그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하게 된 동기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통하여 말씀하신 70년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70년의 내용은 2주 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그 70년의 내용과 연결하여 일흔 이레의 대략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미 앞에서 본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안식년을 지키지 못함으로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 있는 동안 70년 동안 땅이 안식을 누렸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도 이미 율법에 다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 역사 속에서 이루어내심을 보여주십니다. 그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지 계시하십니다.

 

창세기 2:1~3절입니다.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육일 동안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십니다. 이 창조와 안식은 하나님을 위한 창조와 안식입니다.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셨습니다. 완료형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천지 창조의 다 이루심을 보여주시는 것이 천지 창조의 이후의 역사입니다. 천지 창조 이후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다 이루심과 그 안식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도 하나님의 안식 안에 거하여야 참된 안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 먹은 인생들은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쫓겨나야 합니다. 이렇게 쫓겨나서 고생을 할 것을 하나님께서 모르시지 않습니다. 타락한 인생들이 참된 안식을 얻으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공로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게 됨을 인간이 타락하기도 전에 보여주시려고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 옆구리에서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아담은 이 여자를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합니다. 결국 한 몸이라는 말입니다. 깊은 연대이며 연합입니다. 이것이 이미 타락 이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아담은 오실자의 표상이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그의 신부된 교회를 만드실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천지만물의 창조는 하나님의 안식을 완료한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기희생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참된 안식에 들어가게 됨을 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그리고 이 역사 전체를 통하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2주 전에 본 대로 안식일의 확대가 안식년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안식을 스스로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안식년을 지키지 않음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더구나 안식년을 일곱 배하면 49년과 그 다음에 50년을 희년이라 하여 2년을 연속하여 안식년으로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없기에 안식년도 지키지 못하였는데 어떻게 희년을 지킬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안식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70년 동안 포로로 잡혀간 것입니다. 이 뜻을 깨달은 다니엘은 처절하게 회개의 기도를 합니다. 자신들의 조상들과 자신들의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 포로로 잡혀 온 것이 당연하다고 합니다. 나라가 망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가 되고 포로로 잡혀오게 됨으로 공의는 하나님께 돌아가고 치욕은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기도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면 다니엘의 이런 기도가 나오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이 이렇게 멸망해도 마땅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 하여 간구합니다.

 

다니엘 9:18~19절입니다. “18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 19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우리의 의가 아닌 오직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간구합니다. 그리고 주님 자신을 위하여 주의 이름으로 위하여 일하여 달라고 간구합니다. 다니엘의 이런 간구의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은 자신의 안식을 위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것을 압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이런 안식을 설명하기 위하여 부르신 것이기에 주의 이름으로 일하시고자 하신 그 뜻을 이루어달라고 합니다. 우리의 그 어떤 애씀으로도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인 안식에 들어갈 수 없사오니 오직 주의 이름과 주 자심을 위하여 일하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이런 간구를 하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벧전1:10,11).

 

본문 21~23절입니다. “봉독 다니엘이 70년의 뜻을 깨닫고 언약을 따라 회개하는 중에 다시 계시를 받습니다. 다니엘이 기도하는 중에 이전에 환상 중에 본 그 사람 곧 가브리엘이 저녁 제사드릴 때 즈음에 다니엘에게 빨리 날아온 것입니다. 가브리엘이 다니엘에게 가르치며 말하기를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왔다고 합니다.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이미 명령이 내렸기에 이제 알리러 왔다고 하면서 은총을 크게 입은 자라고 합니다. 다니엘이 이렇게 말씀을 깨닫고 기도한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환상을 깨달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깨달아야 할 내용이 무엇입니까?

 

본문 24절입니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자들이 70년 만에 돌아가서 성전을 재건하고 성벽을 재건하는 것은 70년의 계시를 통하여 알았습니다. 그 말씀대로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이 성전을 재건하고 성벽을 재건한 내용이 에스라 느헤미야와 학개서에 상세하게 나옵니다. 재건된 성선은 스룹바벨이 주관하였다고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합니다. 이 성전에 여호수아가 제사장으로 세워집니다.

 

그러나 재건된 성전에서 본문 24절의 내용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24절의 내용은 죄가 끝나고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고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는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성전에 재건되고 제사가 드려지고 여호수아가 대제사상으로 세워지지만 죄가 끝나고 영원히 용서 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계속하여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재건 된 성전은 그러므로 다니엘이 기도할 때에 가브리엘 천사가 알려준 내용은 다시 일흔 이레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70년 포로에서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였지만 이것으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학개서 2:1~3절입니다. “1 일곱째 달 곧 그 달 이십일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너는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남은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라 3 너희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

 

학개 선지자를 통하여 유다의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말씀이 임한 것입니다. 재건된 성전이 이전 솔로몬 성전과 비교하면 초라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재건된 성전의 나중에 올 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클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재건된 성전이 초라하기에 에스라에서 보면 솔로몬 성전의 영광을 본 자들이 울었습니다. 그러나 장차 나타날 성전의 영광은 솔로몬 성전보다 더 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어지는 4~5절입니다. “4 그러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5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재건된 성전이 초라하지만 힘을 내라고 합니다.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격려합니다. 그 이유는 애굽에서 나올 때에 언약한 말이 있고 하나님의 영이 너희 가운데 머물러 있기에 너희는 두려워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이루시는 이 놀라운 신실함을 보시기 바랍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구속 받아 나왔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과 사랑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애굽에서 나올 때에 그 언약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배반하였지만 하나님은 그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심으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고 성전을 재건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을 기대하라고 합니다.

 

이어지는 6~9절입니다. “6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7 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1)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8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9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 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재건된 성전의 초라함을 보고 낙심하는 자들에게 조금 있으면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할 것이라고 합니다. 모든 나라를 진동시킨다고 합니다. 그러면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 성전에 이를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유대인들은 어떻게 해석하겠습니까? 장차 성전이 회복되면 온 세상의 보배가 예루살렘 성전에 이른다고 봅니다. 한국 사람들은 어떻게 해석합니까? 우리가 힘들게 성전을 건축하면 세상의 보물이 우리가 지은 성전으로 몰려온다고 합니다. 엉터리 같은 부흥사들이 많이 인용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7절의 보배라는 단어 앞에 각주가 있습니다. 각주를 보면 사모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나라를 진동시키시면 각 나라에서 사모하는 것이 성전으로 모여들 것입니다. 그러면 이 보배란 금이나 은 같이 없어질 것이 아닌 오직 보배로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주고 산 자들이 주께로 몰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루터는 라틴어 번역본 성경(불가타)을 따라서 그리스도와 관련시킵니다. 그래서 모든 이방인들의 위로가 이르리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의 위로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보배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보배이며 우리의 위로입니다. 지금 성전 된 우리의 모습이 비록 초라할지라도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성전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아직 이 역사 속에서 십자가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이나 스가랴나 학개 선지자를 통하여 참된 성전의 영광이 나타날 그 날이 일흔 이레입니다.

 

요한복음 2:13~22절입니다. “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합니다. 그러나 이 성전이 초라합니다. 때로는 적들이 쳐들어와서 부분적인 파괴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성전을 다시 수리하여 봉헌하였다고 해서 수전절을 지키기도 합니다(10:22). 예수님 당시에서 헤롯이 어머 어마한 수리와 증축을 하였기에 헤롯 성전이라고 불려 집니다. 그런데 이런 성전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 쫓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도둑의 소굴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삼일 만에 일으키신다고 합니다. 이 말씀으로 십자가에 처형하라는 고발이 받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자기 육체가 성전임을 말씀하신 것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성령의 임하심으로 알고 믿게 된 것입니다.

 

성령이 임한 사도들은 이제 성전을 말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이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들이 성전이 됨을 증거 합니다. 이러한 성전이 된 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오늘 본문 24절을 다시 봅니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일흔 이레가 되면 허물이 그쳐집니다. 죄가 끝납니다. 죄악이 용서됩니다. 영원한 의가 드러납니다. 환상과 예언이 응합니다. 환상과 예언이 다 이루어지는 자리가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일흔 이레가 응한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죄가 끝이 나고 용서가 되는 자리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영원한 의가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은 것입니다. 기름 부음 받은 분 곧 메시아,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흔 이레란 예수 그리스도의 오셔서 십자가로 승리하신 것이 일흔 이레에 대한 예언입니다.

 

히브리서 9:23~28절입니다. “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25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구약의 성전 재건이나 제사들이 결국 무엇을 보여주시는 것인지 증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24절의 죄가 끝나고 영원한 속죄가 일어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는 일을 보여주기 위하여 70년 말에 돌아온다는 뜻을 알게 하시면서 동시에 일흔 이레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일흔 이레는 히브리어에서는 일곱이 일흔입니다. 이것이 역사 속의 연대기로도 사용됨을 다음 주에 보겠습니다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완전함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무에서 죄가 끝나고 영원한 속죄가 일어나는 것이 일흔 이레인데 예수님의 말씀에서 완전한 용서가 무엇인지 찾아보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마태복음 18:21~22절입니다.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바로 앞의 말씀에서 형제끼리 죄의 용서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형제가 죄를 범하면 일곱 번을 용서해 주면 되느냐고 묻습니다. 우리는 삼세번이라는 말이 있지만 베드로는 일곱 번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일곱이라는 말을 쓰기는 하였지만 완전한 용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일곱 번 만이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일흔 이레입니다. 490번 용서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영원한 용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베드로 자신부터 영원한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씀이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백 데나리온 빚 진자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우리가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흔 이레 만에 죄가 끝나고 죄가 영원히 가려지는 용서를 받는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흔 이레란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영원한 용서를 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속죄 일곱 번의 일흔 번 곧 일흔 이레와 같은 완전한 용서를 받았다면 우리가 우리를 용서할 뿐 아니라 형제에 대하여도 용서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일흔 이레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더욱 풍성하여 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