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창세기 27:28-40 에서의 방성대곡 2009. 12. 16

 

28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30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기를 마치매 야곱이 그 아비 이삭 앞에서 나가자 곧 그 형 에서가 사냥하여 돌아온지라 31 그가 별미를 만들어 아비에게로 가지고 가서 가로되 아버지여 일어나서 아들의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32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그가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아들 곧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33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가로되 그런즉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너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 34 에서가 그 아비의 말을 듣고 방성대곡하며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35 이삭이 가로되 네 아우가 간교하게 와서 네 복을 빼앗았도다 36 에서가 가로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치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또 가로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 37 이삭이 에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공급하였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38 에서가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 39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며 40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

 

지난주에 언약을 따른 간구라는 제목으로 좀 넓게 보았습니다. 오늘은 에서와 야곱의 관계를 좀 더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미 태중에 있을 때에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만 이삭은 장남을 좋아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좋아한 것입니다. 이삭은 에서에게 축복하기 위하여 사냥하여 별미를 만들어 오면 축복하겠다고 합니다. 이 말을 리브가가 듣고서 야곱을 변장시켜 이삭의 축복을 받게 합니다. 왜 아버지의 축복이 중요한가 하면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세 명이 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것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이 세 사람을 축복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이 세 사람을 저주하면 하나님께서 저주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온전해서가 아닙니다. 그들도 죄인이라서 아내를 동생이라고 속이고 믿음 없는 행동을 하고 야곱은 간교합니다. 이들이 이러함에도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책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축복하면 복을 받고 그들을 저주하면 저주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른 기준으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런 기준을 우리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왜 일방적으로 누구를 선택하셔서 그를 축복하면 복을 주시고 그를 저주하면 저주를 하시는 것은 불공평하여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은 바로 선악과를 따 먹고 난 이후의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의 결정, 진리의 기준을 자기 자신에게 두고 있기에 하나님의 처사가 못마땅한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죄를 배경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펼쳐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에서의 간구를 봅시다. 사냥하여 별미를 만들어 이삭에게 가져갔는데 이미 야곱이 축복을 다 받았습니다. 그 축복의 내용은 28-29절입니다. “봉독”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하신 약속이 연결되는 축복입니다. 이 축복을 다 한 후에 에서가 별미를 만들어 와서 축복하여 달라고 이삭에게 왔습니다. 이삭은 눈이 멀고 별미를 탐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는 상관없이 자기 좋아하는 사람을 축복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대로 야곱이 축복을 받았습니다.

 

야곱이 간교하게 속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언약은 야곱에게로 가게 되겠지만 이삭과 리브가와 에서와 야곱의 관계를 통하여 인간들의 죄가 어떠한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언약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33절을 봅니다. 이삭이 심히 크게 떱니다. 부사가 두 번이나 붙으면서 강조를 합니다. 이 심히 크게 떨었다는 것은 자기는 자기 욕심대로 축복을 했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처음 말씀대로 된 것이기에 떨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축복을 해 달라고 방성대곡하는 에서에게 축복을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야곱이 정녕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삭이 에서를 위로한다고 그러는지 네 아우가 간교하게 와서 네 복을 빼앗았다고 합니다. 에서가 그의 이름이 야곱이라고 함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발꿈치를 잡았다는 말이 속이고 사기 친다는 뜻과 같은 것입니다. 자신을 두 번이나 속였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다고 합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과 복을 따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장자의 명분이 바로 복입니다.

 

장자의 명분을 왜 가볍게 여긴 것입니까? 자신이 이미 장자이가도 하였지만 바로 눈앞에 있는 만족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긴 것입니다. 즉 자신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넘겨버린 것입니다. 이런 배치를 통하여 약속 밖의 사람들이 무엇을 위하여 사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자기 만족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장자의 명분이란 혈통상의 서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희생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임을 야곱의 열 두 아들을 통하여 보여줍니다.

 

장자의 명분도 축복도 다 빼앗겨버린 에서가 방성대곡하면서 아버지께 축복하여 달라고 합니다. 36-38절입니다.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겨두지 않았습니까? 아버지의 복이 이 하나뿐입니까? 내게도 축복하여 주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하면서 웁니다. 애처로워 보입니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축복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그냥 에서에게도 축복하여 주면 안 되는 것입니까? 이삭으로는 안 됩니다. 심히 크게 떨었습니다. 그러니 에서를 아무리 사랑하여도 하나님의 축복을 빌어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삭이 에서에게 하는 말이 39-40절입니다. 이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번역이 이해하기가 어렵게 되어있습니다. 개역개정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39 그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 40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 이 말대로라면 에서는 이 땅에서 아주 고생하고 살아야 하고 자기 칼을 믿고 살아야 하고 동생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서는 나중에 어떻게 살았습니까? 창세기 33:1-11절을 봅니다. 아브라함의 군사 318명보다 더 많은 400명의 군사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에게 일곱 번이나 절합니다. 짐승 떼를 야곱이 에서에게 선물로 줍니다. 그러자 에서가 하는 말이 내개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가 두라고 합니다. 그러자 야곱이 형님의 얼굴을 보니 하나님을 보는 것 같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이렇게 되었으니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아달라고 강권하기에 에서가 마지못해 받아들입니다.

 

도대체 이삭의 축복과 저주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오히려 반대로 된 모습처럼 보입니다. 형이 동생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동생이 형을 일곱 번이나 엎드려 절하고 형이 훨씬 강하고 부자입니다. 언약 밖의 사람이 이 땅에서 오히려 강하고 부자로 살아가는데 야곱보다 훨씬 잘 살아갑니다. 야곱과 같은 고난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삭의 축복을 받은 야곱은 죽도록 고생합니다. 아내를 위하여 14년을 보내고 자신의 재산을 위하여 6년을 외삼촌 집에서 얼마나 고생을 하였는지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었다고 합니다(31:40).

 

뿐만 아니라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하다가 환도뼈가 위골되어 평생 절뚝거리며 지팡이를 짚고 장애인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자기 딸이 강간을 당하였습니다. 자기 큰 아들이 자기의 아내를 건드린 것입니다. 비록 첩이지만 아내인데 이런 험한 꼴을 당하였습니다. 노년에는 요셉이 죽었다는 슬픈 소식을 들어야 했습니다. 양식을 구하기 위하여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결국 바로 왕 앞에 선 야곱의 고백처럼 험악한 세월을 보낸 것입니다. 이런 야곱이 이 땅에서 과연 에서보다 나은 복을 받았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난 주 보았습니다만 한 번 더 봅니다. 히브리서 12:15-17절입니다. “15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17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히브리서 12:1-14절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자 마다 징계하신다고 하십니다.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라고 합니다. 에서에게는 하나님의 징계가 없습니다. 자기 칼을 믿고 삽니다. 자기 힘을 믿고 삽니다. 부자가 되고 강하게 삽니다. 그러나 야곱은 정말 죽을 고생을 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된 자는 반드시 징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주가 아닙니다. 사랑하시기에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징계를 저주로 여깁니다. 그래서 징계가 없는 에서처럼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방향을 보시기 바랍니다. 에서처럼 성공하고 부자 되고 강한 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합니다. 야곱처럼 고생하면 저주를 받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말씀에서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을지 두려워하라고 하면서 에서를 말합니다.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가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버린바 되었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에서 버림받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기도합니까? 에서가 되기를 기도합니까? 야곱이 되기를 위하여 기도합니까? 모두가 에서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에서가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하나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땅에서 저주를 받는 모습으로 말하였습니다만 오히려 야곱보다 더 부자가 되고 강하게 되었다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결국 히브리서가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에서는 하늘의 기업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부자로 성공하고 자기 힘을 키우고 자기 힘을 믿고 살아도 하늘의 기업을 얻지 못한 자는 영원한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에서가 이삭에게 축복을 받지 못하여 방성대곡 하였지만 그러나 오히려 이 땅에서 강하고 부자로 살았습니다. 이삭의 축복을 몽땅 받은 야곱은 죽을 고생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그 고생을 하면서 결국 무엇을 붙잡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약속 하나를 붙잡게 되는 것이 야곱의 일생을 통하여 이삭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결국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무엇이 영원한 복인지를 에서와 야곱을 통하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2:18-29절을 봅니다. “봉독” 에서는 아무리 축복을 울면서 구하여도 하늘의 기업에는 이를 수가 없는 약속 밖의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땅에서 고난이 많습니다. 그 고난을 통하여 결국은 무엇을 붙들게 되는 것입니까? 땅의 기업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입니다. 이곳은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님의 피로만 들어갑니다. 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만들어진 것을 영원히 보존하기 위하여 다 흔들어버리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지금 흔들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던 모든 것 무너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가 아닌 사람은 이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자기 칼과 자기 힘을 믿고 살 것입니다. 그러나 언약을 받은 성도는 지금 흔들리면서 하나님의 약속만을 붙들게 됩니다. 이것이 좁은 문 좁은 길입니다. 누가복음 13:22-30절입니다. “봉독” 지금 울어도 주님 오시는 그날에 울지 않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