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성 설교] 

예레미야 1:4~10 선지자의 소명(召命) 2013. 3. 27

 

4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6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8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9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10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본문을 보기 전에 선지자(先知者)에 대하여 잠시 보겠습니다. 한글 성경에서 선지자라는 말은 거짓 선지자를 포함하여 451회가 나옵니다. 또 다른 말인 선견자(先見者)는 25회 나옵니다. 그리고 예언자(預言者)는 1회가 나오지만 예언이라는 말은 151회가 나옵니다. 우리는 이런 단어를 통하여 선지자는 미리 알고 앞을 내다보는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가 꼭 장래의 일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그들의 반역들도 함께 말하면서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선지자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4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야 됩니다. 자기 스스로 말하는 자는 거짓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도 말씀이 임하였다고 합니다. 거짓말 하는 영이 그들에게 역사하는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왕상 22:22). 그러면 누구의 말이 진짜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신약으로 말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인가 사람을 기쁘게 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바울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갈1:10).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사람들이 기뻐할 내용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역할은 사람들의 생각들을 무너뜨립니다.

 

5절입니다. 선지자는 그 사람의 자격을 보고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뜻대로 일방적으로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르시기로 작정하신 것은 예레미야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배에서 즉 자궁에서 나오기 전에 성별하였고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다고 합니다. 선지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백성의 선택도 이와 같습니다. 에서를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한 것은 태어나기도 전에 어떤 선악을 행하기도 전인 어미의 태에 있을 때에 일방적인 결정을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롬11:11). 이런 말씀들에 대하여 우리는 늘 반발이 일어납니다. 반발이 일어난다는 것이 이미 선악과를 따 먹은 죄인이라는 증거입니다. 선악의 판단을 자기가 하고 있기에 이런 반발이 나오는 것입니다.

 

6절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부르심에 대하여 선지자는 거절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슬프다고 합니다. 자신은 아직 어린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모세처럼 거절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자기는 말을 할 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모세가 거절한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분노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40세에 민족을 위하여 일어나서 애굽 관원을 쳐 죽이고 살인자가 되어 도망갈 때에는 도와주지 않으시고 이제 늙어서 80이 되었을 때에 부르신다는 것에 대하여 분노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시고야 마십니다. 그러면 예레미야는 왜 거절하였을까요?

 

예레미야는 사역의 기간이 긴 것으로 보아서 처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였을 때에 젊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들이 어떤 꼴을 당하는지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자신은 그런 일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말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레미야 시대가 어떤 때 입니까? 나라가 멸망하기 직전입니다. 이런 때에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던 영향을 받은 선지자들이 호세아, 아모스, 미가, 이사야, 에스겔 등입니다. 이런 선지자들을 알고 있는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선지자로 부름을 받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짐인지 알기에 거절한 것으로 봅니다.

 

7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가 태어나기도 전에 선지자로 세우셨기에 반드시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네가 네게 무슨 말을 하든지 너는 말하라고 합니다. 왕에게도 가야하고, 대제사장에도 가야하고, 궁중의 권력과 결탁한 거짓 선지자에게도 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더 이상 거절 할 수가 없습니다.

 

8절입니다.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들이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백성들의 지도자들이며 또한 백성들이기도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거역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와 함께 하셔서 너를 구원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데도 온갖 비방과 조롱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면서 죽을 고생을 합니다. 이런 선지자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이런 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선지자들이 미리 고난을 맛보는 것입니다.

 

9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예레미야의 입에 대시면서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다고 합니다. 즉 여호와의 말씀을 주시는 상징행위입니다. 모든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받아서 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받기 전에 반드시 자기부인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사야도 여호와의 영광을 보고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고 하는 자기부인의 고백이 나옵니다. 이때 제단 숯불로 입술이 지져진 후에 여호와의 말씀을 받아서 가는 선지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들은 자기가 원해서 나가는 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심판을 받아 마땅함을 알고 나갑니다.

 

10절입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는 열방을 위한 선지자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위한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만은 독특하게 열방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습니다. 물론 아브라함도 모든 민족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고 하였기에 아브라함의 복이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이방인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게 됩니다. 또 다른 선지자들도 이스라엘의 주변 국가들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예언하지만 예레미야에게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열방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예레미야의 소명이 무엇입니까?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위에 세워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한다고 합니다. 예레미야가 선포해야 할 선지자의 소명이 이것입니다. 이 여러 나라는 주변 나라들만이 아니라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는 가장 중심에는 사실 이스라엘이 들어있습니다. 이러한 단어들은 건축이나 농사를 지을 때에 하는 말들입니다. 건축하기 위하여 기존의 건물들을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뜨리고 새로운 건물을 세워야합니다. 농사도 기존의 잡초나 여러 가지 것들을 뽑아내고서 심어야 합니다. 이 일을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는 그 중심에 하나님의 자기 백성이 있다는 것을 어디서 알 수 있는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감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것이 예루살렘이며 성전입니다. 예루살렘과 성전이 무너져 내리는 이유는 이미 에스겔서에서 자세하게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성전 안에 온갖 우상숭배가 가득하였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림으로 파멸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영광이 다시 새로운 땅과 새로운 성전에 돌아오는 것도 에스겔서에서 보았습니다. 예레미야의 사역도 왜 심판을 받아 무너져야 하는지를 알게 하시면서 남은 자를 돌아오게 하십니다.

 

예레미야 18:7~12절입니다. "봉독” 하나님께서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선지자를 보내시는 이유는 그들이 선지자의 말을 듣고 악에서 돌이키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내리고자 하신 재앙을 돌이키기 위하여 선지자를 보내십니다. 그런데 돌이키지 않았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철저하게 회개하고 주께로 돌이키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역사였습니다. 그러함에도 선지자를 보내시는 것은 선지자가 그 시대에 분명히 증거 하였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한 것입니다(겔2:3~5, 33:33 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에 있었음을 알리라).

 

예레미야 31:27~28절입니다. “27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28 깨어서 그들을 뿌리 뽑으며 무너뜨리며 전복하며 멸망시키며 괴롭게 하던 것과 같이 내가 깨어서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1:10절과 정 반대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바로 새 언약으로 연결이 됩니다. 옛 언약이 아닌 새 언약으로 인하여 자기 백성을 새롭게 하신다는 것이 예레미야 31장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의 백성이란 자신이 심판을 받아 마땅하기에 뽑혀야 하고 파괴당하여야 하고 파멸당하여야 하고 넘어뜨려져야 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이것은 새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우신 언약(눅22:20)이며 이 언약을 받은 자는 성령으로 인하여 되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자는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을 받게 됩니다(요16:8). 이러한 책망을 받는 자들은 자신이 지금까지 이루고자 한 것이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바벨탑들임을 알게 됩니다. 바벨탑의 특징은 여호와의 흩어지라는 명령을 거역하며 자기들이 이름을 높이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 우리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자고 한 그들에게 하나님은 언어를 혼잡하게 하셔서 흩어버리신 것입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바벨탑은 성경의 역사에서도 세상의 역사에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새 언약의 시대인 신약에서도 하나님께서는 흩으시는 일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새 언약의 영이 임한 시대에도 사람들의 본성 안에는 그들의 흩어짐을 면하려고 하는 속성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루어내실 일입니다. 이 말씀을 받았지만 성령이 임하고 나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루살렘을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이방인의 세계에는 사도들도 가기를 꺼려하였습니다.

 

사도행전 8:1~6절입니다. “봉독” 스데반 집사가 순교 당함을 계기로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집니다. 흩어진 그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래서 빌립은 사마리아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 이방인 내시에게도 복음을 전합니다. 주의 말씀대로 순순히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핍박을 받아 흩어짐으로 가게 됩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서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나를 중심으로 번성하며 그것이 고정되어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에게는 그렇게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붙든다면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고 난 후에 건설하며 심게 됩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이 세워져야 합니까?

 

멸망 받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고 구원 얻는 자들에게만 능력이 되는 십자가를 세우십니다. 십자가란 참으로 처절하게 뽑히고 파괴당하고 파멸당하고 넘어뜨려진 자리입니다. 오직 그 자리에서만 건설하며 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그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뽑히고 파괴당하고 파멸당하여 넘어뜨려져도 그 밑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위에 세워지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히브리서 12:25~29절을 봅니다. “봉독” 땅이 흔들린 곳이 시내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늘과 땅이 다 흔들릴 것입니다. 진동하지 아니할 것을 영존하게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을 흔들어버리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영원하지 아니할 것을 붙들고 있다면 오늘도 하나님께서 흔들고 계십니다. 흔들리지 않는 것만 남기시기 위하여 흔들릴 것들을 미리 흔들어 버리십니다. 이 은혜를 받고 사는 자들이 성도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