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설교 다운로드=>마우스우측클릭후 다른이름으로 저장하세요

여호수아 7:5-13 여호와여 어찌하여 2010. 1. 20

 

5 아이 사람이 그들을 삼십육 명쯤 쳐 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가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된지라 6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7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8 주여 이스라엘이 그의 원수들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9 가나안 사람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10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11 이스라엘이 범죄 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 12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원수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그들도 온전히 바친 것이 됨이라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3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거룩하게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일을 위하여 스스로 거룩하게 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아 너희 가운데에 온전히 바친 물건이 있나니 너희가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가운데에서 제하기까지는 네 원수들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리라

 

지난주에 여호와께 부르짖는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부르짖는 것이 기도의 형태이든 원망의 형태이든 간에 여호와 하나님께 호소하는 내용인데 대부분의 부르짖음이란 원망과 불순종의 부르짖음임을 보았습니다. 10가지의 재앙을 보고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모세를 원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거쳐 약속의 땅을 바로 눈앞에 두고서 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민수기 14:1-5절을 봅니다. “봉독” 1절에서 온 회중이 밤새도록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통곡한 것이 기도입니까? 원망입니까? 2절에 보시면 원망입니다. 출애굽 자체를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대로 이루어 가시는 것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수많은 기도회가 그것도 철야와 금식 기도회가 하나님께 원망하는 농성데모장과 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상관이 없는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 기도라는 형식으로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립니다. 이들의 기도는 백성의 부르짖음과 무엇이 다른 것입니까? 11-12절을 봅니다. “봉독” 여호와께서 이들을 진멸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때 모세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사하여 달라고 합니다. 애굽에서 이곳까지 사하여 주신 것처럼 다시 사하여 달라고 합니다. 홍해를 건너 이곳까지 약 1년이 걸렸는데 그 광야 길에서 계속 거역한 이들을 다시 사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진멸을 하지는 않겠지만 그 언약을 믿지 못한 자들은 광야에서 다 죽게 하시겠다고 하시면서 갈렙 만은 온전히 믿음으로 쫓았기에 가나안에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 밤새 울며 통곡하는 내용이 과연 무엇입니까? 전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에 대한 원망과 불평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을 지나면서 그 불신과 원망의 세대들을 광야에서 다 쓰러지게 하십니다. 그리고 모세마저 광야에서 죽은 후에 여호수아로 하여금 요단강을 건너게 하십니다. 여리고 성 앞에서 할례를 행하고 여리고 성을 정복합니다.

 

여리고 성의 정복에서 기생 라합의 모습을 히브리서에서 믿음의 내용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기생 라합이 하나님께 직접 기도한 내용은 아니지만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숨겨주면서 청하는 내용이 간접적인 기도의 내용으로 볼 수가 있어서 이것도 한번 보겠습니다. 여호수아 2:8-14절입니다. “봉독” 라합의 이런 청하는 내용은 여호와 하나님의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국을 배신하는 행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청원과 행위란 여리고 성이 진멸 당한다는 사실을 믿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기생 라합과 같은 청함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믿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영광스럽게 살아남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든지 진멸당한 여리고 성과 같은 이 세상에서 구원하여 달라고 간구할 것입니다. 이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을 간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기도란 이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을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에서의 더 나은 삶을 위한 간구입니다. 그러니 믿음의 사람들의 간구와는 전혀 반대의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창세기로부터 여호수아서에 이르기까지 기도하고 부르짖는 내용들을 살펴보면서 이런 것이 사실임을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절대다수가 부르짖는 내용이란 왜 이 세상에서 평안하게 살게 하지 않고 고생시키느냐는 원망과 불평의 부르짖음인 것을 보게 됩니다. 십자가 마을 수련회 강의를 책으로 묶은 ‘욥 안의 그리스도’라는 책의 부제에 ‘왜 하나님은 별것 아닌 인간을 이토록 괴롭히나?’ 하는 글을 제 딸이 차안에서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이라면 그렇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고난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알고 그 고난에 참여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세상에서 고생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에 이른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고난을 통하여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이 진멸당해 마땅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사람입니다. 끝까지 자기 죄를 모르고 자기가 인생 살기에 괴롭다고 세상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자들이 구원에 이르는 자들이 아닌 것입니다. 기생 라합처럼 여리고 성이 진멸 당한다는 사실을 믿어야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러 온 자들을 숨겨주는 것입니다.

 

복음이라는 것도 마찬가지 소식입니다. 복음이란 이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을 당한다는 소식을 먼저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회개를 외치는 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삶의 방식과 그 삶의 목표를 180도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땅에서 죄악 가운데 사는 사람들의 기존의 생각을 고수하는 자들에게는 결코 환영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을 죽이기 위하여 여리고 성의 군인들이 혈안이 되어 찾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여리고성을 완벽하게 정복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말씀대로 침묵으로 성을 돌고 마지막 날에 함성을 지르자 성이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을 공격할 때에 하나님께서 이 성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쳐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여리고 성의 물건을 취하면 그 사람도 바쳐진 것이 되리라고 합니다. 바쳐진 것에 대하여 손을 된다는 것은 그 전쟁에 자기의 공로를 개입시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진멸전쟁입니다. 여호수아 앞에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먼저 앞장서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 성은 다시 재건하지 못하도록 진멸당한 흔적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여리고성에서 승리한 후에 두 번째 공격한 성은 작은 아이성입니다. 정탐하고 온 사람들의 보고에 의하면 백성이 다 올라갈 것도 없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면 되겠다고 하여 삼천 명을 보냈는데 전쟁에서 패배하고 36명이나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왜 이런 패배가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백성들의 마음은 녹아서 물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 크고 견고한 여리고 성을 손도 대지 않고 무너졌는데 아이성의 패배를 받아 들일수가 없는 것입니다.

 

6-9절을 봅니다.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저물도록 있습니다. 극한 슬픔을 표하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자기 죄로 인하여 탄식하는 슬픔이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께서 전쟁에서 지게 하였는가 하는 원망을 슬픔으로 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아뢰기를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여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고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 쪽을 만족하여 여겨 거기 살았다면 좋을 뻔 하였다고 합니다. 여호수아마저 하나님의 언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계속간구하기를 가나안 사람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기서는 그래도 주의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겠느냐고 간구를 합니다. 이때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일어나라고 하시면서 어찌하여 엎드렸냐고 합니다. 여호수아가 기도한다고 엎드렸지만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알려주십니다. 여호수아는 여호와 하나님께 어찌하여 이렇게 하셨느냐고 하고 여호와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어찌하여 엎드렸느냐고 합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오늘 기도회로 모였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뜻을 알기위하여 모인 것입니까? 아니면 내 뜻대로 이루어달라고 모인 것입니까? 아니면 인생이 답답하여 이런 문제가 왜 일어났는지 여호수아처럼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느냐고 항의하는 것입니까?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 있습니다. 그것은 너희 가운데 여호와께 온전히 바쳐진 물건을 취한 자가 있기에 그것을 취한 자는 그도 바쳐진 자가 되었기에 멸하지 아니하면 결코 적들과 맞서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고대 전쟁이란 전쟁에 나가는 사람들이 전쟁에서 승리하면 그 전리품을 챙기는 대가로 전쟁에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리고 성에서는 단 하나도 물건을 챙기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전쟁이 어떤 것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진멸전쟁이며 또한 이 전쟁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록 동원이 되지만 그들의 힘과 지략으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언약 때문에 승리하는 것임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와 맺은 언약은 생명을 건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다음날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여 하나님 앞에 세웁니다. 그리고 제비를 뽑으니 아간이 걸린 것입니다. 아간이 이실직고를 합니다. 노략한 물건이 시날 산의 외 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금덩이 오십 세겔이 탐이 나서 장막 땅속에 감추었다고 합니다. 그 물건들과 아간과 그 가족을 함께 아골 골짜기로 가서 돌로 쳐 죽이고 불사르고 난 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습니다. 그래서 아골 골짜기 즉 괴로움의 골짜기라고 하였습니다.

 

이 아간 때문에 아이성에서 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것을 지적하여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는 일에 자기 공로를 챙기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는 일에 아간과 같은 모습이 없습니까? 아주 작은 일이라도 자기가 한 것이 대하여 반드시 관심을 가지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자기의 피와 땀이 들어간 것에 애착을 가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늘 기도하고 부르짖는 내용은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에게 이런 일을 행하시느냐는 원망의 부르짖음인 것입니다. 이런 부르짖음에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네 속에 아간이 있다고 하실 것입니다. 아간이란 하나님의 언약을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그런 쪽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고 무엇이고 간에 내 욕심을 채워보자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하나님께서 저주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과 그 아들 사이의 언약으로 만들어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적으로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선물이 성령으로 인하여 주어집니다. 이런 선물을 받은 자는 자신이 아간임을 압니다. 그래서 아골 골짜기가 자기의 자리임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자들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골짜기가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호세아 2:14-23절입니다. “봉독”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문으로 삼아 주시겠다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자기 백성 아닌 자로 긍휼을 베풀며 백성을 삼으신다고 합니다. 아골 골짜기의 자리가 우리의 마땅한 자리인데 이 저주를 대신 담당하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우리가 긍휼을 입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골 골짜기도 소망의 문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면 아골 골짜기에서도 범사에 감사의 기도를 드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