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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1:1~14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2014. 2. 26


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 너는 이 백성에게 전하라 하셨느니라 9 이 성읍에 사는 자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으려니와 너희를 에워싼 갈대아인에게 나가서 항복하는 자는 살 것이나 그의 목숨은 전리품 같이 되리라 1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얼굴을 이 성읍으로 향함은 복을 내리기 위함이 아니요 화를 내리기 위함이라 이 성읍이 바벨론 왕의 손에 넘김이 될 것이요 그는 그것을 불사르리라


예레미야 선지자의 탄식을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주께서 강하심으로 나를 이기셨기에 나는 종일 수치와 조롱과 모욕을 당한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강하심으로 선지자를 이기셨기에 선지자를 하나님의 사역자로 사용하셨다면 왜 세상에서 조롱과 모욕을 당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선지자로 대다한 능력을 나타내면 선지자도 탄식이 아닌 영광이 될 것이며 그런 선지자를 보내시는 하나님의 능력도 드러날 텐데 왜 조롱과 수치와 모욕을 당하도록 하시는 것입니까?


이사야 55:6~9절입니다. “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들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길이 살길인데 이 길이 마치 죽는 길로 보이기에 선지자들이 조롱과 모욕을 받는 것입니다.


본문 1절을 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합니다. 시드기야 왕이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과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를 예레미야에게 보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20장과 상당한 시간의 간격이 있습니다. 20장에서 예레미야를 때리고 나무 고랑으로 채운 바스훌이라는 사람은 동명이인입니다. 20:1절에서는 임멜의 아들 바스훌 이지만 오늘 본문은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입니다. 제사장 마아세아의 아들 스바냐도 소선지서의 스바냐와 다른 사람입니다. 스바냐는 성전의 감독자가 된 사람입니다(렘29:25,26). 바스훌과 스바냐가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온 것은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기도를 요청하기 위하여 보낸 것입니다.


2절입니다. 다른 선지자들은 바벨론이 쳐들어오지 않는다고 거짓 평화를 남발하였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벨론이 공격하여 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대로 바벨론이 공격하여 왔기에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선지자임이 증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기도요청을 합니다. 예레미야가 여호와께 기도하면 혹시 그의 모든 기적으로 우리를 도와 행하시면 바벨론이 물러 갈 것이라고 하면서 기도를 요청합니다. 평상시에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에 귀도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핍박하다가 위기에 처하니 기도를 요청합니다. 이런 자세를 박윤선 목사의 주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시드기야가 그 불신앙적인 처지에게 이적의 덕을 보려고 한 것은 이적을 모욕(侮辱)하는 행동이다. 이적은 인간의 사욕(私慾)이나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다.” 약 30년 전에 이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욕을 위한 이적의 요구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 더 많아졌기에 더 많은 이적을 공급하겠다는 사이비들이 생긴 것입니다.


시드기야 왕이 이러한 기도를 요청한 것은 이미 히스기야 왕 때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공격하러 왔다가 히스기야 왕과 이사야 선지자의 기도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산헤립의 군대 18만 5천이 하룻밤 사이에 송장이 되어버린 일이 있습니다(왕하19장). 그러므로 시드기야 왕도 이러한 기적을 구한 것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왕은 우상을 척결하였고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였던 왕입니다. 그런데 시드기야의 평가는 열왕기하 24:18절을 보시면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따라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모든 악을 행하는 자가 위기에 직면하자 기도를 요청하는 이런 모습이 미신적인 행위입니다. 이러한 시드기야의 기도요청에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미 임한 여호와의 말씀을 전합니다.


3~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혹시 기적을 베풀어 주시면 적이 물러갈 것을 기대하고 기도요청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응답은 바벨론에 의하여 철저하게 멸망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멸망은 바벨론의 힘과 계획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친히 예루살렘을 대적하여 싸우신다는 말씀입니다. 바벨론을 향하여 성 밖에 설치한 무기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뒤로 돌려버리시고 성안으로 모아들이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강한 손과 팔로 진노와 분노와 대노로 친히 칠 것이라고 하십니다. 얼마나 노하셨는지 노를 삼중으로 말씀합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성안의 짐승까지 칼과 전염병에 죽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칼과 전염병과 기근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손에 넘겨서 칼날로 치게 하시되 측은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며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여기서도 삼중으로 긍휼을 베풀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기도 요청에 대한 답변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은 아닙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말씀합니다.


8~9절입니다. 생명의 길은 이 성읍에서 살아남으려고 하지 말고 바벨론 왕에게 항복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망의 길은 예루살렘성에 남아서 성을 지키려고 하는 자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도대체 어느 것이 사는 길로 보이십니까?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 예루살렘 성이 파괴되지 않도록 보호하시는 것이 사는 길이 아니라 바벨론 왕에게 항복하는 것이 사는 길이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여호와의 이 말씀이 어떻게 들리겠습니까? 사는 길이 아니라 죽는 길로 들린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보호하여 주신다는 기도의 응답이 아니라 나라가 망해야 하고 바벨론에 항복해야 사는 길이라고 합니다.


신명기 30:15~20절입니다. “15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16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17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18 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할 것이니라 19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시내산 언약을 갱신하는 장면이 모압 언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 언약을 반역하고 40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직전에 다시 한 번 모세 언약의 내용을 들려줍니다. 생명과 복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고 그를 의지하라고 합니다. 그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여호와를 배반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을 따르면 망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는 결국 생명의 길로 가지 못하고 지금 우리가 보는 예레미야의 말씀대로 사망의 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어떤 인간도 자기의 행위로는 생명의 길로 갈 수가 없음을 율법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율법의 한계를 드러내면서 새 언약을 예언한 것입니다.


9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이런 표현은 1,4,7,8절에서 연속됩니다. 예루살렘의 심판은 여호와의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얼굴을 향하시는 것은 복을 내림이 아니라고 합니다. 구약 제사장들이 백성을 위한 축복이 여호와께서 그 얼굴을 빛을 비춰 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것은 복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화를 내리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그 얼굴이 진노의 얼굴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읍이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질 것이며 그는 그 성읍을 불사를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이미 언약을 배반하였기 때문입니다.


11~12절입니다. “11 유다 왕의 집에 대한 여호와의 말을 들으라 1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다윗의 집이여 너는 아침마다 정의롭게 판결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자의 손에서 건지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악행 때문에 내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서 사르리니 능히 끌 자가 없으리라” 유다 왕의 집이란 통치자를 말합니다. 유다의 통치자는 이방의 왕처럼 자기 뜻대로 백성을 다스리는 자가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백성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통치자들이 백성들을 억압하고 탈취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분노가 임하는 것이며 이 불을 끌 자가 없다고 하십니다.


13~14절입니다. “1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골짜기와 평원 바위의 주민아 보라 너희가 말하기를 누가 내려와서 우리를 치리요 누가 우리의 거처에 들어오리요 하거니와 나는 네 대적이라 14 내가 너희 행위대로 너희를 벌할 것이요 내가 또 수풀에 불을 놓아 그 모든 주위를 사르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의 심판의 말씀을 듣고서도 누가 내려와서 우리를 치리요 누가 우리의 거처에 들어오겠느냐고 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이미 거짓 선지자들의 말에 세뇌(洗腦)가 되어 예루살렘이 안전하다고 여기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내가 너의 대적이라고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 행위대로 벌하심으로 불을 지르신다고 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분명하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론은 생명의 길로 간 것이 아니라 사망의 길로 간 것입니다. 구약 전체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망의 길로 간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배반하고 온갖 우상숭배로 인하여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한 나라가 북 이스라엘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서도 회개하지 않은 남 유다마저 바벨론에 망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인간이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다면 단 한 사람도 생명을 얻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마태복음 16:21~28절입니다. “21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베드로의 이러한 모습이 바로 구약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인간의 혈과 육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예수님과 함께 무엇을 이루어보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혈과 육에 속한 모습입니다. 다음 주일 낮에 혈과 육에 대한 말씀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만 구약에서 보여주는 최종 모습이 바로 베드로의 모습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하나님 아버지에 의하여 고백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죽으심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해 보려고 한 베드로의 생각이 바로 사탄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는 말씀을 금욕과 극기를 하면서 따라오라는 말씀이 아니라 너희가 하려고 하는 그 혈과 육에 속한 것들이 죽은 것임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가 증거 한 내용입니다.


로마서 3:19~24절입니다.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율법과 선지자들의 증거를 받은 것이 바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난 것입니다. 곧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인데 이것은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로마서 5:17~21절입니다.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신약의 이런 복음이 증거 되는 것은 이미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하여 완벽하게 임상실험이 마쳐진 것입니다.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두고 살기 위하여 생명의 길로 가라고 하였지만 이들은 사망의 길로 갈 수 밖에 없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왕도 제사장도 선지자도 이들을 돌이킬 수가 없었습니다. 더더구나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마저 타락하여 자기의 탐심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들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실상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그리스도를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생명을 얻는 길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을 따라 그리스도의 일하심으로 이루어내신 것이 생명의 길입니다.


로마서 8:1~6절입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우리의 육신이 연약하여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낼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제시하여 놓아도 사망을 피하고 생명을 선택하여 갈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이미 생명나무로 가는 길에서 쫓겨난 아담의 후손들은 생명도 아닌 이미 죽은 자기 목숨을 위하여 평생을 살려고 하고 그 죽은 목숨을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이 영생인줄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의 길로 가라고 해도 자기 생존의 연속성만 생각하지 참으로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백성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으로 보내시고 죄를 정하심으로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르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육신을 따른다는 것은 여전히 자기의 행위를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영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 행위가 왜 생명에 이를 수 없음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합니다. 이러한 자들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에 의하여 해방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