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45:1~5  너를 위하여 큰일을 찾느냐?   2014. 11. 19

1 유다의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 넷째 해에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예레미야가 불러 주는 대로 이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니라 그 때에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2 바룩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3 네가 일찍이 말하기를 화로다 여호와께서 나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으니 나는 나의 탄식으로 피곤하여 평안을 찾지 못하도다 4 너는 그에게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내가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그리하겠거늘 5 네가 너를 위하여 큰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에 재난을 내리리라 그러나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에게 네 생명을 노략물 주듯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주 전에 ‘길을 묻다’는 제목으로 말씀드린 내용에서 한국의 12월 전쟁설을 이야기 했습니다. 이 말을 사실대로 믿은 사람들 중에 어느 목사와 교인 20여명이 11월 16일 캄보디아로 3~4개월 머물 예정으로 떠났습니다. 오늘 보니 또 50여명이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만약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말에 대하여 이렇게 답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전쟁이 안 일어날 수 있다. 그때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 이단이라고, 거짓 선교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도 괜찮다. 우리의 기도로 전쟁을 막을 수 있다면, 그런 비난은 감수할 수 있다." 저는 12월에 정말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이들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신명기 13:1~3절입니다. “1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2 그가 네게 말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고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 섬기자고 말할지라도 3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자신이 선지자라고 하면서 이적과 기사를 보이고 말한 대로 일어난다고 하여도 믿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 거짓 선지자들이 표적과 기적이 말한 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아닌지 시험해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고 피난한 자들이 살아남아도 그들은 여호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한 자들입니다. 이들이 바로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9~12절입니다. “9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표적과 기적들이 그대로 일어날지라도 그들을 따라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을 따라가는 것은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기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표적과 기적을 따라 가다가 결국 심판을 받게 됩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그 언약의 완성인 십자가는 주의 은혜를 입지 않은 자들에게는 어떤 표적도 기적도 아니기 때문에 계속하여 자기를 위한 큰일을 찾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제목이 본문 5절의 말씀입니다. ‘네가 너를 위하여 큰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고 하십니다. 전에 번역은 ‘네가 너를 위하여 대사를 경영하느냐 그것을 경영하지 말라’로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어떤 위기를 만나면 당연히 그 위기를 해결할 돌파구를 찾기 마련입니다. 개인이든 가정이든 회사든 국가든 교회든 간에 어려움에 처하면 그 어려움들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을 찾습니다. 전쟁의 소문을 들은 자들이 정말로 외국으로 피난 가듯이 이스라엘 백성들도 바룩도 어떤 큰일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룩에게 그런 큰일을 찾아 나서지 말라고 합니다. 이러한 말씀이 주어진 배경을 보겠습니다. 

45:1절입니다. 유다의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 넷째 해라고 합니다. 지난주에 본 44장의 말씀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고 남은 일부 사람들이 여호난의 주도하에 애굽으로 피난 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주어진 것은 상당히 이른 시기에 주어진 것입니다. 여호야김은 애굽에 의하여 왕으로 세워지지만 왕이 된지 11년 만에 바벨론에 사로잡혀 갑니다. 여호야김이 사로잡혀 가고 그 아들 여호야긴이 왕으로 세워집니다. 여호야긴은 몇 달 못 되어 다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고 그의 숙부 시드기야와 왕으로 세워집니다. 시드기야가 11년 동안 왕으로 있다가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호야김 4년이라면 상당히 이른 시간에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바룩에게 전하여진 내용입니다. 

다시 1절을 봅니다. “유다의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 넷째 해에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예레미야가 불러 주는 대로 이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니라 그 때에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바룩은 예레미야의 동역자입니다. 물론 어떤 때는 비서처럼 일하기도 합니다. 예레미야가 잡혀 있으면 바룩이 예레미야의 말을 받아 적어서 백성들에게 읽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가 전한 여호와의 말씀을 바룩이 받아 적고 또 백성들에게 읽어주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전한 말씀이 나라가 망한다는 소식이기에 예레미야에게 우호적인 몇 사람은 바룩에게 예레미야와 함께 피하여 있으라고 합니다(렘36:19). 그러므로 바룩은 예레미야가 받는 고통과 슬픔을 함께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바룩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2~3절입니다. “2 바룩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3 네가 일찍이 말하기를 화로다 여호와께서 나의 고통에 슬픔을 더하셨으니 나는 나의 탄식으로 피곤하여 평안을 찾지 못하도다” 여호와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자들의 고통과 슬픔입니다. 이 백성들이 이렇게 가면 멸망하는 것이 보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말씀을 받아 전하니 그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핍박을 합니다. 선지자들의 말을 욕으로 듣고 심지어 거짓말이라고 하면서 배척합니다. 이런 내용은 우리가 그동안 예레미야서를 통하여 충분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바룩도 고통과 슬픔이 가득합니다. 

4~5절입니다. “4 너는 그에게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내가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그리하겠거늘 5 네가 너를 위하여 큰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에 재난을 내리리라 그러나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에게 네 생명을 노략물 주듯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가 바룩에게 전한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심은 것을 뽑기도 한다고 하십니다. 온 땅에 그리하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예루살렘만이 아니라 온 땅에 여호와의 심판이 임할 것을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예레미야 1:10절입니다.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열방 만국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린 후에 건설하게 심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먼저 예루살렘에 일어납니다. 북 이스라엘은 이미 멸망하였고 남 유다마저 바벨론에 의하여 뽑히고 파괴당하고 파멸당하고 넘어졌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이러한 멸망은 이스라엘의 멸망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멸망임을 앞에서도 보았습니다. 이러한 예루살렘의 멸망의 내용이 예레미야 44장까지 계속됩니다. 그런데 45장을 기준으로 46장 이후부터 온 열방의 심판을 선언합니다. 애굽과 블레셋과 모압과 암몬과 다메섹과 아라비아와 엘람과 마지막으로 바벨론의 멸망까지 말씀합니다. 

이러한 예루살렘과 열방의 심판의 소식을 들은 바룩이 자기를 위하여 큰일을 찾는 것이 당연하듯이 보입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살아남을까 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이러한 바룩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기에 예레미야를 통하여 바룩에게 네가 너를 위하여 큰일을 찾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온 세상에 심판을 받는데 너의 힘으로 어떻게 너를 구하여 낼 수가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4절 끝에 온 땅에 그리하겠다고 하시고 5절에서는 모든 육체에 재난을 내린다고 하십니다. 모든 땅과 모든 육체가 재난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아무리 큰일을 계획하고 찾아도 자신이 자신을 살릴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자기를 위하여 큰일을 찾지 않고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잠잠히 주의 약속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바룩이 가는 모든 곳에서 여호와께서 바룩의 생명을 노략물 주듯 하리라고 하십니다. 노략물은 전쟁터에서 얻은 전리품입니다. 그러므로 바룩이 여호와의 심판에서 살아남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바룩 개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심판 속에서도 이루어내실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46장 이하에서 열국의 심판 속에서도 흑암 속에 한줄기 빛처럼, 혼탁한 우물 안에 바늘구멍 같은 샘물이 나오듯이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46:27~28절입니다. “27 내 종 야곱아 두려워 말라 이스라엘아 놀라지 말라 보라 내가 너를 원방에서 구원하며 네 자손을 포로 된 땅에서 구원하리니 야곱이 돌아와서 평안히, 정온히 거할 것이라 그를 두렵게 할 자 없으리라 2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종 야곱아 내가 너와 함께하나니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흩었던 그 열방은 다 멸할찌라도 너는 아주 멸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너를 공도로 징책할 것이요 결코 무죄한 자로 여기지 아니하리라” 애굽으로 피난간 자들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바벨론과 애굽의 전쟁에서 애굽이 패할 것을 말씀하시는 중에 이런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이루어내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바룩이나 이스라엘의 남은 자나 간에 자기를 위하여 큰일을 찾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지난주에 본 말씀에서 요하난과 그 남은 자들이 예레미야에게 길을 물었습니다. 여호와의 대답이 자기들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 그 말대로 순종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로부터 여호와의 응답을 들었을 때에 자기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것을 거짓말이라고 하면서 자기들이 큰일을 찾아 나선 것이 애굽으로 피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슨 일을 도모하여 이렇게 저렇게 이루어내겠다고 하는 것들이 얼마나 자기를 위한 일이냐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한 것은 결국 다 우상숭배라는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20:1~6절입니다. “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나를 위하여 무엇을 만들고 섬기는 것이 우상숭배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나를 위한 신을 만들어 내라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가 금송아지 숭배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오직 자기를 위한 도모 외에는 생각할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받아 전한 바룩도 자신을 위하여 큰일을 도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큰일을 찾지 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누구를 위하여 삽니까? 나를 위하여 살아가는 것 자체가 우상숭배입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 나를 위한 기독교, 나를 위한 교회가 다 우상이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들이 얼마나 자기를 위한 것들인지 봅니다. 

스가랴 7:1~6절입니다. “1 다리오 왕 제사년 아홉째 달 곧 기슬래월 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2 그 때에 벧엘 사람이 사레셀과 레겜멜렉과 그의 부하들을 보내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고 3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어 이르되 내가 여러 해 동안 행한 대로 오월 중에 울며 근신하리이까 하매 4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5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6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간지 70년 만에 돌아왔습니다. 초라하지만 성전도 재건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오월 중에 금식하며 기도한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으니 그곳에서나마 나라가 망한 것으로 인하여 애통하여 금식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금식마저 누구를 위한 금식이었습니까? 하나님을 위한 금식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인간이 어느 정도로 자기중심 에서 돌아설 수 없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70년간 그렇게 금식을 하다가 이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그런 금식을 해야 하느냐고 벧엘에 사는 사람들이 성전의 제사장들에게 묻기 위하여 온 것입니다. 이때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금식, 애통, 구제, 무슨 짓을 해도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큰 비전을 가지자고 독려하는 자들이 많은데 누구를 위한 것인지 분명해 집니다. 
  
시편 131편입니다. “1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2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3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자의 찬양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온갖 큰일을 다 찾아 나서다가 완전히 다 털리고 나서 두 손 두 발 다 들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는 표현입니다. 이제는 젖 뗀 아이가 어미의 품속에서 참된 안식을 얻듯이 그렇게 영원히 여호와만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어제 새로 등록하신 분이 심방을 요청하여 집사람과 함께 심방을 했습니다. 교인들이 표정이 참 밝다고 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밝겠습니까? 교회가 큰일을 도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무거운 짐을 지지 않아서 표정이 밝은 것이라고 답을 했습니다. 제 대답이 맞습니까? 목사가 열정의 비전 메이커가 되면 여러분이 얼마나 힘이 들지 잘 아실 것입니다. 형편도 안 되는데 믿음으로 하자고 하면서 수십억 수백억의 건물을 짓고, 그렇게 해야만 자신이 복을 받고, 자손이 복을 받고, 하늘에 상급이 많다고 하니 울며 겨자 먹기로 그렇게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 것도 결국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을 듣고 이제 짐이 가벼워지고 자유를 얻었다면 그래서 표정까지 밝은 여러분은 또 어떻게 살아갑니까? 

로마서 14:7~9절입니다.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이제 내가 나를 위하여 사는 것에 대하여 죽은 자들입니다. 또한 자기를 위하여 죽을 수도 없는 자들입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렇게 지금 살아지느냐는 문제입니다. 복음을 듣기 전에 열심히 종교생활 할 때도 나를 위하여 그렇게 하였고 지금 복음을 듣고 자유라고 하지만 여전히 나를 위하여 살지 않습니까? 

제가 만 15년을 시무하면서 공식적으로 저나 저의 가정을 위하여 교회에 무엇을 해 달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속으로는 왜 없었을까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속으로 없었겠습니까? 그러므로 공식적으로 말하거나 안하거나 간에 복음을 위하여 하고 안한 것이 아니라 저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이 사실을 알게 되었느냐면 제가 한번 사임을 하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사임하려고 하니 전세 보증금도 걸 형편이 안 되어 우물쭈물 하다가 그만 시기를 놓치고 그냥 이렇게 눌러 앉아있습니다. 그 사건을 통하여 복음을 위하여 요구를 안 한다는 그 알량한 자존심마저 다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큰일을 찾을 수가 없고 큰일을 도모할 것도 없어서 이렇게 끌려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주인이 아니라 주께서 처분하시는 대로 갈 수 밖에 없는 자들이 바로 주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야고보서 4:13~16절입니다. “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6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는 야고보서의 행함과 믿음이 무엇입니까? 자기 행함이 안개인줄 알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이 있는 믿음이란 자신이 안개임을 알고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 다는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들이며 주께 소유된 백성들입니다. 이 은혜로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