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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18:1~12 교만과 겸손 2017. 11. 15

 

10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11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라 그가 높은 성벽 같이 여기느니라 12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오늘 제목은 교만과 겸손입니다. 12절에서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며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교만하지 말고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 이유는 교만하면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이고 겸손해야 존귀의 길로 간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최초의 교만이 나오는 자리는 에덴동산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너도 하나님처럼 된다는 사탄의 유혹을 받고 선악과를 보니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이는 것입니다. 이 유혹의 강렬함은 피조물 주제에 감히 창조주의 자리를 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먹은 선악과는 곧 내가 먹은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아담의 허리에 속하여 선악과를 먹었기에 그 선악과를 먹은 속성이 지금도 여지없이 모든 삶의 상황에서 발휘됩니다.

 

본문 1절입니다. 무리에게서 스스로 갈라지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한다고 합니다. 새 번역으로 봅니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욕심만 채우려 하고,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을 적대시한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스스로 갈라지는 것은 자기의 소욕 곧 자기 욕심만 채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 무리가 가족이든, 교회이든, 동창회든 간에 자기 욕심만 채울 수가 없기에 양보도 해야 하고 회칙도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끝까지 자기의 욕심만 주장하면 떨어져나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은 너희가 다 틀렸다고 합니다. 이것이 참 지혜를 배척하는 교만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무리에게 스스로 갈라지지 않는 사람은 모두 다 참 지혜를 가진 사람이며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떨어져 나가진 않았지만 그 무리 속에 있으면서 또 다른 자기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타락한 인간입니다. 떨어져 나간 자를 무리가 비난할 수 있습니다. 그런 비난을 듣기 싫어서 남아있을 수도 있습니다. 남의 눈치를 보면서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어떤 분이 전화가 왔습니다. 교회에서 안수집사로 뽑혔는데 당회에서 감사헌금을 얼마씩 하라는 할당량이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지 않겠다고 하면 안수도 못 받는 것이고 그 무리에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가 답변하기를 교인들이 투표하여 뽑혔는데 봉사하라는 기회로 알고 감사함으로 할 수 있으면 하시고 그렇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습니다. 상담하신 분은 올해가 종교개혁 500년 기념의 해인데 이런 관행이 아예 없어져야한다고 하였습니다. 마치 성직매매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저도 없어져야 마땅하다고 봅니다만 본인이 안수를 받지 않아도 상관이 없고 그렇게 되면 외톨이가 될 것인데 그래도 괜찮다면 헌금도 하지 말고 안수도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족과 친척들이 축하한다고 하는 상황입니다. 이럴 때에 결정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목사 후보생 고시 칠 때 돈을 걷어 고시위원들에게 주자고 할 때에 저는 반대했습니다. 그 반대함으로 목사 후보생이 되지 못한다면 목사 후보생이 안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몇 사람이 자율로 하자고 해서 하고 저는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무리에게서 나누어지는 자가 되는 것이며 그래서 별명이 대쪽이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또 다른 자기 의를 쌓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교만한 모습니다. 그런데 이런 교만이 깨어집니다. 언제 깨어지는가 하면 불의도 대충 넘어가는 나의 모습을 볼 때 깨어집니다. 무리에서 스스로 나누어지거나 머물러 있거나 간에 나는 나를 기쁘게 하는 결정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2절입니다. 미련한 자는 명철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한다고 합니다. 1절과 연결하여 보면 무리에게서 나누어지는 자가 자신의 소욕만 주장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자는 그 무리에게서 떨어져 나오면서 그 무리가 틀렸다고 할 것이지만 그러나 그 무리가 참 지혜가 있다면 그 지혜가 싫어서 자신의 욕심을 따른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를 배척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2절도 다른 사람의 명철을 기뻐하지 않고 자기의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하는 자가 미련한 자가 됩니다. 요즈음 카페가 많아졌습니다. 집에서 모이는 것은 귀찮으니 카페에 모이겠지만 저는 카페가 많아진 것이 각자의 의사를 드러내기를 기뻐하기에 그렇다고 봅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정신입니다. 모든 정당한 권위마저도 악으로 취급받는 시대입니다. 모두가 다 천상천하유아독존입니다. 근대와 현대철학이 다 이런 방향으로 가기에 모두 자기주장만 하면서 그것을 진리라고 주장하니 이것이 바로 교만이며 멸망으로 가는 길입니다.

 

3절입니다. 악한 자가 이를 때에는 멸시도 따라오고 부끄러운 것이 이를 때에는 능욕도 함께 온다고 합니다. 이것은 누가 들어도 당연하다고 여기는 말씀입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악한 자나 나쁜 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서는 사람들마다 다르기에 이런 말씀의 해석도 여러 가지 해석이 됩니다. 모두가 뇌물을 받는 자리에서 한 사람이 뇌물을 받지 않는다면 받지 않는 사람이 그 집단에서 멸시와 능욕이 따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악한 자는 멸시를 받습니다. 이 세상에서 악한 일들을 권력과 재력으로 잠시 덮어둔다고 하여도 결국은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오늘도 이 건물 전체가 크게 흔들렸습니다. 앉아있는 의자와 책상과 책장이 크게 흔들렸습니다. 긴급재난 문자가 지진과 거의 동시에 왔습니다. 경북 포항에서 진도 5.5의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덮어두려고 해도 그 날에 하늘이 사라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다 드러날 것이라고 합니다(벧후3:10). 그러므로 성도는 지금 여기서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의 속이 얼마나 교만한지 얼마나 교묘한지 드러나서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면 그것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4절입니다. 명철한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샘은 솟구쳐 흐르는 내와 같다고 합니다. 깊은 물이나 샘은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물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명철한 사람의 말은 깊은 물과 샘과 같다는 것은 지혜자의 말이 생명을 준다는 말씀입니다. 이미 앞에서도 생명에 대한 내용들은 많이 나왔습니다. 지혜가 생명나무라는 말씀도 보았습니다. 잠언 8장에서는 지혜가 인격이 되어 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참으로 명철하고 지혜로운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깊은 물과 같고 솟구쳐 흐르는 샘과 같습니다.

 

요한복음 7:37~39절입니다.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명절은 초막절입니다. 이때 물을 길어서 붓는 의식을 행한다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합니다. 구약에서 많이 언급되는 생명수가 예수님 자신이며 그가 보내실 성령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지혜를 증거 하는 자라면 이 생명수를 증거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무엇을 다 이루셨는지, 그를 믿는 자에게 무엇이 주어지는지를 증거하고 그 증거를 믿는 사람이라면 세상의 다른 것에 목마르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믿는 자에게서도 생수가 강처럼 흘러나올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5절입니다. 악인을 두둔하는 것과 재판할 때에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것이 선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세상 어느 나라도 다 이러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바른 재판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바른 재판을 하였습니까? 이스라엘도 바른 재판을 하지 않았기에 결국 나라가 망하게 되었습니다.

 

6~7절입니다.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의 입은 매를 자청합니다. 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되고 그의 입술은 그의 영혼의 그물이 됩니다. 그 사람의 말이 그 사람입니다. 말과 사람이 다르면 그것은 사기꾼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말이 그 사람을 나타내기에 미련한 사람의 입술 곧 미련한 자의 말은 다툼을 일으키고 매를 자청하게 됩니다. 미련한 자의 입이 멸망이 되는 것은 그 사람의 말이 그 사람이기에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12:35~37절입니다. “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37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그 사람이 곧 그 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예수님의 어떤 행위나 말씀도 다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고 하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으니 그들의 속에는 악을 가득 쌓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이 그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고 정죄함을 받는다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으면 용서를 받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정죄를 받습니다.

 

본문 8~9절입니다. 남의 말을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간다고 합니다. 자기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패가하는 자의 형제라고 합니다. 남의 말을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의 말이 별식과 같다고 하는데 별식은 색다르고 맛있기에 잘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남의 말을 잘 하는 사람은 자기의 일을 게을리 하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돌아보기에 바쁜 사람은 남의 말을 할 틈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일을 게을리 하는 사람은 패가하는 자의 형제가 된다고 하는 것은 자기를 돌아볼 수 없는 자는 망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눈에 티를 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의 눈의 티를 보려면 얼마나 부지런히 남의 언행심사를 살펴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다른 사람이 어떻고 어떻더라는 말들을 퍼뜨리는데 정작 자기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남을 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길로 자신을 보는 사람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눈길에서 피할 수 없습니다. 하늘 꼭대기에 올라가도, 바다 끝에 갈지라도, 음부에 갈지라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자기 자신을 비추게 되면 남을 볼 틈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보고 회개하기에도 바쁜 사람이기에 남의 말을 할 틈이 없습니다.

 

디모데전서 5:13절입니다. 또 그들은 게으름을 익혀 집집으로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쓸데없는 말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교회에서 구제할 과부의 명단에 올릴 자를 말하면서 젊은 과부는 명단에 올리지 말라고 합니다. 과부에 올릴 자는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야하며 한 남편의 아내였던 자이며 나이가 60세 이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젊은 과부를 명단에 올려 구제를 하게 되면 게으름을 익혀서 집집이 돌아다니며 게으를 뿐 아니라 쓸데없는 말을 하여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집가고 아이를 기름으로 게으름 부리며 한가하게 남의 말 할 틈을 주지 말라고 합니다. 자기를 돌아보지 않기에 남의 말을 하는 것이 어리석교 교만하며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본문 10절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는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견고한 망대이기에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습니다. 이러한 자들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의 무엇을 의지하지 않기에 주의 이름을 의지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을 성경은 의인이라고 합니다. 자기의 행위나 자기의 가진 것으로 견고한 망대로 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직 주의 이름을 자신의 견고한 망대로 삼는 자가 겸손한 사람입니다.

 

11~12절입니다.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라 그가 높은 성벽 같이 여긴다고 합니다. 10절에서 의인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는데 부자는 자신의 재물을 견고한 성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자신의 재물을 견고한 성과 높은 성벽같이 여기는데 이러한 자들이 교만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12절에서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며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라고 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주의 이름을 의지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재물을 의지합니다. 이들은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시편 49:6~13절입니다. “6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7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8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9 그가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인가 10 그러나 그는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어리석고 무지한 자도 함께 망하며 그들의 재물은 남에게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을 보게 되리로다 11 그러나 그들의 속생각에 그들의 집은 영원히 있고 그들의 거처는 대대에 이르리라 하여 그들의 토지를 자기 이름으로 부르도다 12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13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 (셀라)

 

오늘 제목이 교만과 겸손입니다. 무엇이 교만입니까?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자기의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가 교만한 자입니다. 이러한 부유함은 물질만이 아니라 자신의 선행이나 율법을 지킨 의를 가지고 부요함으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으로는 결코 생명을 속할 수가 없습니다. 생명을 속할 수도 없는 생존에 대한 것들을 가지고 거들먹거리는 자들이 교만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사람이란 세상의 재물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주의 이름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주의 이름만이 자신의 견고한 망대이며 영원한 피난처임을 아는 자가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자기 이름으로 땅을 등기해 놓고서 그 집과 땅이 영원할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이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고 합니다. 어리석고 교만한 자들이 가는 모습이 이렇습니다.

 

에베소서 2:11~22절입니다.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교만하고 어리석은 자라서 멸망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의 피로 그 둘을 한 새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라고 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을 무엇이라고 하였을 까요? 고대 근동 학을 전공한 사람의 말을 들어보니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을 돼지라고 하였습니다. 개와 돼지 주제에 서로 자기가 잘났다고 교만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들을 예수님의 피는 한 새 사람을 만들어내십니다. 그리하여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십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 의하면 개처럼 취급받던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개들에게 주인의 아들의 떡을 던짐이 마땅치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주님의 말씀을 옳다고 하면서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떡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하였을 때에 예수님은 이 여자의 믿음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자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간에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사람은 여호와의 이름을 자신의 견고한 망대로 자신의 영원한 피난처로 여깁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셔서 여호와의 일을 다 이루신 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 것은 우리에게로 버리심으로 우리를 자기에게로 모으시는 것이 주의 이름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일입니다. 이 놀라운 사랑을 맛본 자들은 그 사랑을 알기에도 바쁩니다. 이러한 복이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