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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21:1~8 마음을 감찰하심 2018. 1. 24

 

1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 2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시느니라 3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4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이 1)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 5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 6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다니는 안개니라 7 악인의 강포는 자기를 소멸하나니 이는 정의를 행하기 싫어함이니라 8 죄를 크게 범한 자의 길은 심히 구부러지고 깨끗한 자의 길은 곧으니라

 

지금 이 나라에는 연일 적폐청산에 대하여 온갖 뉴스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전직 대통령이 감옥에 있는데 전 전직 대통령의 호위무사였던 사람은 이런 일들보다 더한 경천동지할 위법 사항들이 더 있다고 합니다. 지금 언급되는 대통령은 교회의 장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대통령들이 왜 불법에 연루가 되는 것입니까? 대통령이라는 권력이 너무 크기 때문 입니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큰 이익을 챙길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도 그것에 따른 반대급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권력자들과 어떻게든 줄을 대어 이권을 얻고 싶어 하는 자가 많습니다.

 

본문 1절을 봅니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신다고 합니다. 왕의 마음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 대통령의 마음도 누가 움직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움직일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정책들이 나오면 기도하자고 하는 문자가 많이 옵니다. 그런데 그런 기도만이 아니라 요즈음은 청와대에 20만 명 넘게 청원을 하면 의무적으로 답변을 해야 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어떤 정책에 반대의견을 표하라는 문자도 많이 옵니다. 이제는 기도보다 그런 식으로도 압력을 넣습니다.

 

여러분은 이 나라의 대통령이나 국회가 어떤 결정을 하면 좋겠습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교회에 좋은 결정을 원할 것입니다. 절에 다니는 사람들은 절에 좋은 종교정책을 원할 것입니다. 종교가 없는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방금 읽은 말씀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농부가 논에 물을 대기 위하여 봇물을 이리 저리 방향을 바꾸듯이 우리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왕만이 아니라 일반인의 마음도 다 지으셨고 그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시편 33:13~15절을 봅니다. “13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 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14 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 살피시는 도다 15 그는 그들 모두의 마음을 지으시며 그들이 하는 일을 굽어 살피시는 이로다여호와께서 모든 인생을 살피시고 모두의 마음도 지으신 분이십니다. 이런 말씀을 근거로 왕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나를 위한 소원, 또는 교회를 위한 소원을 이루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성경의 수많은 왕들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움직였다는 예를 듭니다.

 

애굽의 바로 왕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의 아내를 손대지 못하게 하십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꿈을 꾸게 하시고 그 해석을 다니엘만이 할 수 있도록 하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교만하여 바벨론을 자신이 만들었다고 하는 순간 짐승처럼 풀을 뜯어먹고 일곱 때를 그렇게 지내게 됨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고레스 왕의 마음을 움직일 뿐만 아니라 여호와께서 자신의 목자로 삼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도 합니다. 아하수에르 왕이 잠이 오지 않아 옛날 궁중일기를 잃게 합니다. 그때 모르드개의 일을 알게 됩니다. 이런 예를 들면서 우리도 기도하면 대통령의 마음도 바꾸어 우리의 소원을 들어줄 것이라고 합니다만 그러나 성경은 사람의 소원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것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루어내시는지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 마음을 움직입니다.

 

시편 33:16~17절을 봅니다. “16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17 구원하는 데에 군마는 헛되며 군대가 많다 하여도 능히 구하지 못하는도다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마음을 지으시고 그 마음을 다 살펴보신다는 말씀을 앞에서 보았습니다. 그런 말씀들을 보면서 우리는 권력자의 마음을 움직여 우리가 힘을 얻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고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군마는 헛되며 군대가 많다 하여도 능히 구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구원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입니까? 우리가 원하는 힘의 방식으로가 아니라 오직 그의 인자(仁慈)입니다.

 

이어지는 18~22절입니다. “18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19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그들이 굶주릴 때에 그들을 살리시는도다 20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21 우리 마음이 그를 즐거워함이여 우리가 그의 성호를 의지하였기 때문이로다 22 여호와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인자하심이란 하나님의 언약을 따른 사랑입니다. 이것이 자기 백성들에게 구원의 근거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인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금 자신이 구하는 이 마음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2절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신다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다 지으셨기에 그 마음을 다 감찰하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께서 자기의 마음을 감찰하심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자기 행위가 옳고 정직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아담의 타락 이후에 항상 악할 뿐임을 이미 창세기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6:5, 8:21). 항상 악하기에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그러면 그렇게 항상 악한 상태가 무엇인가 보니 하나님의 아들들의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 마음에 좋은 대로 결혼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항상 악한 것입니까?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에 모든 인간은 선악을 자기중심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언제나 자신의 행위를 옳다고 여기며 살아갑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이 나라가 남한 사람은 남한이 옳다고 하지만, 북한 사람들은 북한이 옳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한 안에서도 또 갈라집니다. 보수가 옳다고 하고 진보가 옳다고 합니다. 자신이 속한 그 환경을 따라 자기가 옳다고 여기며 살아갑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끼리도 서로 싸웁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백퍼센트는 아니라고 하여도 상대적으로도 자신의 생각과 판단과 행동이 옳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여호와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노출 당하신 적이 있습니까? 구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적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는 여호와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거나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시거나 간에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제대로 마주친 자들의 특징은 자신이 전적으로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티끌과 재 같은 자가 감히 아뢴다고 하였습니다(18:27). 모세는 신발을 벗고 얼굴을 가려야 했습니다(3:5,6). 이사야 선지자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6:5). 신약의 바울이 주님을 만났을 때의 모습이나 사도요한이 밧모 섬에서 주의 영광을 보았을 때에 죽은 자와 같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자기 행위가 정직하다고 여겨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비추어지면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알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사건이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점점 자신이 죄인임을 알아가는 자도 있을 것이고, 바울처럼 급격하게 꼬꾸라지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살피시는 대상이 되는 자라면 어느 누구나 예외 없이 자신이 어떤 죄인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 말씀의 비추임 앞에서 결코 자기의 행위를 정직하다거나 옳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고백하기를 나 행한 것이 다 죄 뿐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로마서 3:9~18절입니다. “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바울이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율법의 의로 흠이 없는 자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자들을 다 잡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고 나니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자신은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결코 자기의 행위를 정직하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은 의인을 구원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다고 하면서 자신은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였습니다(딤전1:15). 이것이 말씀에 비추인 자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마음이 비추어졌습니까?

 

히브리서 4:12~13절입니다.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말씀을 보지 않으면 자신이 늘 옳은 줄로 알고 살아갑니다. 말씀을 보아도 성령께서 우리에게 비추어주지 않으면 말씀의 필요한 문자만 취하여 세상만사를 자신의 가치관과 자신의 선악체계로 판단하는 교만한 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보고 듣는 시간은 우리의 속이 하나님의 눈앞에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는 시간입니다.

 

이어지는 14~16절입니다.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말씀 앞에 벌거벗겨 지는 사람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으로 곧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게 됩니다.

 

본문 3절입니다.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신다고 합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는 구약에서 너무도 많이 나옵니다. 지난 19년 동안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과 12명의 선지자의 글을 상세하게 다 살펴보았습니다. 온갖 절기를 지키며 제물을 바치지만 그들의 일상은 속임과 도둑질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면서 성전에 나와서 이렇게 재물을 바치니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를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이 망한 것입니다.

 

본문 4절입니다.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이 1)형통한 것은 다 죄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자족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하여 그렇습니다. 이러한 죄 역시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고 나서 땅의 티끌이며 피조물인 주제에 감히 선악을 판단하면서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였기에 나오는 모습입니다.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해져 있는 인간들은 악인의 형통을 성공이라고 하고 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악인의 형통이라는 것이 죄인데도 사람들의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해져서 끊임없이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세상의 자랑거리를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통이라는 각주를 보면 등불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악인이 빛으로 보이고 의인이 어두움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십자가는 저주와 어두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부어주시면 세상과 전혀 반대로 볼 수 있습니다.

 

시편 131:1~3절입니다. “1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2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3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선악과 이후의 모든 인간은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합니다. 그래서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고 악인의 형통을 빛으로 봅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에서 구원받은 자들은 마음이 교만하지 않고 눈이 오만하지 않기에 큰일이나 감당하지 못할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기에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을 배부르게 먹고 엄마 품에 있는 아이 같게 하였다고 합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하는 것입니까? 지금부터 영원까지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본문 5~8절입니다. “5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 6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 다니는 안개니라 7 악인의 강포는 자기를 소멸하나니 이는 정의를 행하기 싫어함이니라 8 죄를 크게 범한 자의 길은 심히 구부러지고 깨끗한 자의 길은 곧으니라

 

악인의 형통함을 좋게 보는 것은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자족합니다. 그렇다고 게으르게 산다는 말이 아닙니다.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살아갑니다. 그러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것은 물질만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 사는 것도 마찬 가입니다.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단기속성 코스 같은 것이 없습니다. 평생을 말씀의 인도를 받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급한 자는 물질을 얻고자 하거나 말씀을 얻고자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급하게 얻으려고 하면 오히려 망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불려 다니는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악인의 강포는 결국 자기를 소멸합니다. 악인의 강포가 무엇입니까?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하여져 있으니 그것을 채우기 위하여 강포(强暴)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강포를 검색하여 보면 우악스럽고 사나움. 성서에 따르면, 이때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나옵니다. 창세기 6:13절의 말씀입니다.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세상에 가득하였다고 합니다. 그 포악이 가득한 모습이 자기 좋은 대로 먹고 마시며 사고팔며 시집가며 장가가는 일에 바빠서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이 살아간 것입니다. 이들은 홍수가 나서 세상을 멸하기 까지 깨닫지 못하였기에 그 강포로 가득한 것이 결국 자기를 소멸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악인의 강포라는 것은 뉴스에서 보도되는 흉악한 범죄만이 아니라 자신이 선악의 판단 자가 되어 자기 좋은 대로 살아가는 것이 강포가 가득한 세상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정의를 행하기 싫어하는 자들입니다. 정의로움을 싫어하는 것도 자기중심의 정의로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정의라는 것은 긍휼과 자비입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라는 말씀은 너희가 긍휼을 입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긍휼을 버리고 자기 좋은 대로 살아가기에 이들이 결국은 영원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를 크게 범한 자의 길은 심히 구부러지고 깨끗한 자의 길은 곧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감찰(鑑察)하십니다. 이러한 감찰은 높으신 분이 낮은 자를 잘 살펴봐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찰(監察)은 감사원에서 하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둘 다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기 백성은 전자입니다. 주께서 죄를 살피시면 그 앞에 설 자가 없습니다. 오직 자기 백성을 은혜로 보살펴 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잘 살펴서 우리의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하여지지 않도록 말씀으로 깨우쳐 주시고 환경을 흔들어 주십니다. 높은 데 마음을 두지 않고 낮은데 마음을 두도록 보살펴 주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 옳다고 여겨진다면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하여지는 길이기에 주님은 신실하게 우리의 마음을 낮추어주십니다. 그러할 때에 비로소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주님이 보이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