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설교 바로듣기]  [음성설교 다운받기]


잠언 21:9~21 무엇을 구하십니까? 2018. 1. 31

 

9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2)움막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 10 악인의 마음은 남의 재앙을 원하나니 그 이웃도 그 앞에서 은혜를 입지 못하느니라 11 거만한 자가 벌을 받으면 어리석은 자도 지혜를 얻겠고 지혜로운 자가 교훈을 받으면 지식이 더하리라 12 3)의로우신 자는 악인의 집을 감찰하시고 악인을 환난에 던지시느니라 13 귀를 막고 가난한 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 14 은밀한 선물은 노를 쉬게 하고 품 안의 뇌물은 맹렬한 분을 그치게 하느니라 15 정의를 행하는 것이 의인에게는 즐거움이요 죄인에게는 패망이니라 16 명철의 길을 떠난 사람은 사망의 회중에 거하리라 17 연락을 좋아하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술과 기름을 좋아하는 자는 부하게 되지 못하느니라 18 악인은 의인의 속전이 되고 사악한 자는 정직한 자의 대신이 되느니라 19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 20 지혜 있는 자의 집에는 귀한 보배와 기름이 있으나 미련한 자는 이것을 다 삼켜 버리느니라 21 공의와 인자를 따라 구하는 자는 생명과 공의와 영광을 얻느니라

 

본문 9절입니다.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사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남자들은 이 말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이와 연관된 구절을 잠언에서 찾아보겠습니다. 19:13절에서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라고 합니다. 남자들은 이럴 때 바가지 긁는다고 합니다. 듣기 싫은 이야기를 계속하기 때문입니다. 21:19절과 25:24절도 오늘 본문과 같습니다. 27:15~16절입니다. “15 다투는 여자는 비 오는 날에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라 16 그를 제어하기가 바람을 제어하는 것 같고 오른손으로 기름을 움키는 것 같으니라

 

이런 내용을 보면 솔로몬이 여러 아내와 살았기에 경험적인가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투는 여인에 대하여 어떻게 슬기롭게 대처하면서 살라는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창세기 3:16절 하 반절입니다.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여기서 하와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을 너를 다스릴 것이라고 합니다. 남편을 원한다는 말을 새 번역에는 남편을 지배하려고 할지라도로 번역합니다. 공동번역은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으로 번역합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이후로 아내는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어 하지만 남편은 그런 아내를 다스리고 손아귀에 진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늘 다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좀 더 확장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내이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남편입니다. 신약으로 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그리스도는 남편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을 구하면서 살아가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따른 삶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 자들입니다 남편이신 하나님께서 생명의 길로 이끄시는데 늘 원망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러나 언약에 신실한 남편이시기에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들여놓으십니다. 오늘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가 남편이신 그리스도를 내 마음대로 주무르려고 철야와 금식까지 하면서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하고 찾는다면 남편이 함께 살고 싶겠습니까?

 

오늘 설교제목이 무엇을 구하십니까?’ 입니다. 사람이 구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속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났다면 구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면 위엣 것을 찾습니다(3:1). 그런데 거듭나지 못하였다면 땅의 것을 찾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 다닌다고 하여도 정말로 그리스도의 신부인지를 말씀을 통하여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어떻게 확인할 수가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외에 더 구할 것이 없습니까? 신부된 교회가 단장하고 준비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로마서 13:11~14절입니다. “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신부된 교회가 구하여야 할 내용입니다.

 

본문 10절입니다. 악인의 마음은 남의 재앙을 원하나니 그 이웃도 그 앞에서 은혜를 입지 못한다고 합니다. 악인의 마음이 원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남의 재앙을 원합니다. 이런 나쁜 사람이 있는가 하겠지만 우리도 우리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 재앙을 당하기를 원한 적이 없습니까? 전에 신천지의 사람과 이야기 하였을 때에 나중에 자신이 높은 자리 곧 144천의 자리에 오를 때에 저를 보자고 하였습니다. 모든 이단들의 특징은 행위주의 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열심에 비례하여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서 그 이웃이 은혜를 입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재앙을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예수님을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은 자기를 향하여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저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하고 행하오니 저들을 사하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 기도를 들은 강도가 주님을 믿고 구원을 받습니다. 십자가 처형을 집행하는 로마의 백부장이 이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스데반 집사도 자기를 향하여 돌을 치는 자들을 향하여 예수님과 같은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은혜를 입은 자의 곁에서는 이런 은혜를 입지만 악인 곁에서는 은혜를 입지 못합니다.

 

본문 11절입니다. 거만한 자가 벌을 받으면 어리석은 자도 지혜를 얻겠고 지혜로운 자가 교훈을 받으면 지식이 더하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거만한 자가 벌을 받아도 그것을 교훈으로 삼지 않습니다. 연일 뉴스에서 온갖 권력자들의 비리가 쏟아지고 있지만 이러한 일을 보면서도 바르게 살려고 하는 자들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만한 자들이 벌을 받을 때 지혜를 얻는 자가 있다면 이런 자가 지혜로운 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가 교훈을 받으면 지식이 더하여지는 것입니다. 성도란 성경을 보거나 세상을 보거나 간에 교훈을 받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1~12절입니다. “1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1)세례를 받고 3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5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6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7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8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9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11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12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이 내용을 본문 11절의 해석으로 봅니다.

 

본문 12절입니다. 의로우신 자는 악인의 집을 감찰하시고 악인을 환난에 던지신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의로우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각주를 보면 의로운 자는 악인의 집을 헤아려서 악인의 망할 것을 안다고 합니다. 둘 다 해석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을 감찰하시고 악인을 환난에 던지실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지혜로운 자가 교훈을 얻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지혜를 받은 자들은 악인의 집을 헤아려서 그 악인의 망할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악인의 결국을 보고 교훈을 삼는 것이 지혜입니다.

 

본문 13절입니다. 귀를 막고 가난한 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가난한 자를 돌보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압제당하고 가난한 상태로 있었습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따른 사랑과 긍휼로 구원하여 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서는 하나님의 긍휼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율법에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잘 돌보라고 하셨습니다.

 

신명기 24:14~15절입니다. “14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은 너희 형제든지 네 땅 성문 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 15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 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 이는 그가 가난하므로 그 품삯을 간절히 바람이라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지 않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임이라가난한 자를 학대하지 말고 잘 돌보라고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이어지는 17~22절을 봅니다. “17 너는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 말며 과부의 옷을 전당 잡지 말라 18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19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20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21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22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긍휼로 구원 받아 나왔기에 너희가 그 긍휼을 잊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본문 14절입니다. 은밀한 선물은 노를 쉬게 하고 품 안의 뇌물은 맹렬한 분을 그치게 한다고 합니다. 마치 뇌물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뇌물을 받지 않으시는 분입니다(10:17).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뇌물을 받지 말라고 하십니다(23:8). 그런데도 이 말씀을 버리고 뇌물을 받음으로 이스라엘이 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언의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에 얼마나 뇌물이 성행하였으면 김영란 법이 통과가 되었겠습니까! 뇌물의 기준을 어떻게 봐야 하겠습니까? 이웃과 정을 나누는 선물의 개념이 아니라 자신의 이득을 위하여 주는 것은 적든 많든 뇌물입니다.

 

15절입니다. 정의를 행하는 것이 의인에게는 즐거움이요 죄인에게는 패망이라고 합니다. 지당(至當)한 말씀입니다. 세상에서도 정의가 실현되면 정의롭게 산 사람에게는 즐거움이지만 정의롭지 못하게 산 죄인에게는 패망입니다. 그러나 세상살이는 불의를 행한 자가 대를 이어 떵떵거리며 살 수 있습니다. 정의롭게 산 자들이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심판대가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그 심판을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지금 현직 여 검사가 오래전에 자신의 상관으로부터 성추행 당하고 인사의 불이익을 받은 것을 폭로함으로 요란합니다. 가해자인 검사가 서울의 온 누리 교회에서 세례를 받으면서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용서 받았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보고 공개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마치 밀양이라는 영화의 내용 같았습니다. 저도 그 간증을 보았는데 자신이 공직에 충실하였는데 억울하게 면직되었다는 것입니다. 검사를 하면서 꽃보직으로 달려간 사람이며, 돈 봉투 사건으로 면직된 것을 억울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화가 나 있는 중에 아내에 의하여 교회를 가고 성경을 배웠는데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속마음을 다 알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면직이 억울하여 행정소송을 해 둔 상태라고 하는데 그 억울함이 교회 나와서 위로를 받아서 눈물이 났는지, 정말로 성령이 임하여 자신이 존재론적인 죄인임을 알고 회개가 일어났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날이 옵니다. 그 날에는 어떠한 변명과 핑계가 통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 입으로 직고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자신이 죄인이기에 어떻게 살아도 죄라고 하면서 자기 욕심을 따라 마음대로 사는 것이 결코 복음이 아닙니다. 나 행한 것이 죄 뿐임을 알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라면 자기부인의 길로 이끌려 가는 것입니다.

 

16절입니다. 명철의 길을 떠난 사람은 사망의 회중에 거하리라고 합니다. 명철의 길이란 여호와를 경외하는 길입니다. 여호와를 경외(敬畏)한다는 말은 공경함과 두려움을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온 천지를 창조하시고 온 세상을 살펴보시고 다스리시는 분이심을 믿고 사는 것이 명철의 길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알고 믿는 것이 명철이 길인데 이 길을 떠나는 자는 죽은 자들과 함께 거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명철은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를 아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신약까지 보면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17:3).

 

17절입니다. 연락(宴樂)을 좋아하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술과 기름을 좋아하는 자는 부하게 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렇게 살아도 권력을 가지고 부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악한 세상입니다. 이런 악한 세상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가진 자들은 자기들끼리 향락을 즐기면서 그것으로 자기들끼리의 경제공동체를 공고히 하고 살아갑니다. 이런 철벽같은 계급에 아무리 애를 써도 들어갈 수 없는 흙 수저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유흥을 위하여 살아가는 자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런 세상에서 구별되어 나왔기에 성도의 즐거움은 먹고 마시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성도의 즐거움, 천국의 즐거움은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14:7).

 

18절입니다. 악인은 의인의 속전이 되고 사악한 자는 정직한 자의 대신이 된다고 합니다. 이사야 43: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실 때에 애굽은 그들을 압제하고 있었습니다. 그 압제하던 나라를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방의 나라, 악한 나라 애굽과 구스와 스바가 속량물이 되는 것입니까?

 

고린도후서 5:21절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을 죄로 삼으신 것은, 죄인인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완벽하게 해결하신 자리가 됩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 죄인이 되셔서 죄인들을 속량하심으로 그 속량을 입은 자들은 하나님의 의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의가 됩니다.

 

19절 말씀은 앞에서 보았기에 20절을 봅니다. 지혜 있는 자의 집에는 귀한 보배와 기름이 있으나 미련한 자는 이것을 다 삼켜 버린다고 합니다. 20절은 17절과 연결하여 봐도 됩니다. 세상에서 향락을 위하여 술과 기름을 즐기는 자는 결국 가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귀한 보배와 기름이 준비하여 둔 것입니다. 이 말씀도 문자대로 보면 개미처럼 근검절약하여 겨울을 잘 준비하라는 말씀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님으로 인하여 세상의 끝을 아는 자들은 섞을 것을 위하여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것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세상의 아들들이 노후를 대비하는 그 지혜가 하나님의 아들들보다 지혜롭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이 무엇을 준비하면서 사는지를 보라는 말씀입니다.

 

21절입니다. 공의와 인자를 따라 구하는 자는 생명과 공의와 영광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불의가 득세합니다. 공의와 인자를 따라 구하며 사는 자들이 오히려 피해를 입습니다. 양심고백을 하거나 내부의 불의를 외부에 고발하는 자는 그 조직 속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공의를 구하고 인자를 따라 구하는 자는 세상에서 핍박을 받습니다. 저는 이런 말씀을 볼 때 마다 5공화국 시절에 정의로운 사회 구현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불법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자들이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한다고 하였습니다. 큰 깡패가 작은 깡패를 잡아넣으면서 자기들은 정의를 행한다고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정말로 공의와 인자를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공의와 인자는 함께 할 수 없는 속성입니다. 죄인을 공의대로 하면 심판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인자는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자비를 베풀려면 공의가 훼손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두 가지의 속성이 하나가 되는 자리가 있습니다. 시편 85:10절입니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었으며인애는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인 헤세드입니다. 본문 21절의 인자도 같은 단어입니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는 자리가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성취도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공의와 인자를 따라 구하여 생명과 공의와 영광을 얻으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홀로 이 생명과 공의와 영광을 얻으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도 이 생명과 공의와 영광을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여러 가지 말씀들을 새로운 법으로 만들어 추구하게 하는 것이라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처럼 법으로 질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성령이 임한 자는 종말을 압니다. 성령을 말세에 부어주신다는 요엘 2장의 예언이 사도행전 2장에서 성취가 됩니다. 성령이 임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종말의 사건으로 보게 됩니다. 이 종말은 세상질서의 종말이면서, 동시에 새 하늘과 새 땅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원리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자들이 됩니다. 이런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과 공의와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