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설교 바로듣기]  [음성설교 다운받기]

 

전도서 3:1~8 안을 때와 멀리할 때 2018. 12. 26

 

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지난주에 5절의 앞부분 돌을 던져 버릴 때와 돌을 거둘 때에 대한 내용이 길어지는 바람에 오늘은 그 뒷부분을 보려고 합니다. 오늘 제목은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다는 말씀이 제목인데 줄여서 안을 때와 멀리할 때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도 단순히 보면 사람이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좋아하면 자주 안을 것이고 싫어하면 멀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씀도 예수님 중심으로 봐야 마땅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시면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한 후에 아담의 옆구리를 찢으시고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 여자를 본 아담은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담이 이 말을 할 때에 어떤 자세로 했을 까요? 뻣뻣하게 서서 말했을까요? 달려가서 끌어안으면서 말했을 까요? 제 상상은 후자입니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것은 두 몸이지만 하나라는 거룩한 연합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뱀의 유혹을 받아서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나님께서 금지한 선악과를 먹고 나니 서로 하나가 될 수 없었습니다. 거룩한 연합인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그 관계성이 깨어진 것입니다. 타락 전에는 두 인격이지만 한 인격의 결정에 전적인 동의가 있기에 갈등이나 분열이 없습니다. 그런데 타락의 결과로 일심동체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부부가 일심동체(一心同體)라는 말을 사용은 하지만 얼마나 서로 다른지 결혼한 사람들은 다 경험할 것입니다. 물론 가끔씩은 서로의 취향이나 이해관계가 맞으면 잠시 같은 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면 또 다릅니다. 그러기에 한 몸이라는 부부도, 한 가족도, 한 민족도, 한 인류도 서로 싸웁니다.

 

이런 현실을 알기에 우리의 힘으로 서로 하나가 되자고 합니다. 1988년 대한민국에서 열린 올림픽 주제가가 코리아나의 손에 손잡고입니다.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서로 서로 사랑하는 한 마음 되자고 노래합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을 영원토록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자고 합니다. 그런데 남북도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남 갈등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보수와 진보, 정규직과 비정규직, 빈부의 갈등은 계속됩니다. 자신이 어디에 속하여 있는지에 따라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어느 의사는 지금까지 강남좌파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부동산 정책으로 강남 우파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서로 사랑한다고 하여도 자기들끼리의 잔치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하나님의 자기 계시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기계시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창조임을 성경이 증거 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 전체가 오실 그리스도를 예언하였으면 신약은 그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다 이루셨다는 것을 증거 합니다. 그러므로 전도서의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다는 이 말씀도 성경에서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신명기 33:26~29절입니다. “26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이가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27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 28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여호와의 영원하신 팔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보겠습니다.

 

이사야 40:1~5절입니다. “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을 위로하라고 합니다. 그 위로는 그들의 죄로 인하여 배나 벌을 받았기에 이제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내용들이 다 메시아가 오실 것을 예언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는 이런 내용들은 세례요한의 일로 신약이 소개하고 있습니다(3:4~6, 1:23). 그러므로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외쳐야 할 말이 있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어지는 6~8절입니다.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풀과 같은 인생과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을 대비합니다. 우리가 풀이며 인간의 영광이라는 것도 풀의 꽃과 같지만 여호와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월요일에 전도사 시절부터 교제하는 집사님 부부가 두 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큰 아들은 29세인데 원자력 쪽의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둘째 아들은 23세인데 대학 일학년 마치고 군입대하여 전역하였습니다. 복학을 기다리면서 경찰공무원 시험을 쳤는데 최종합격하여 내일모레 경찰학교에 입학을 합니다. 그래서 밥 사준다고 왔는데 저는 이 가족과 아이들에게 죽음을 앞둔 사람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지금 죽는다면 무엇이 정말로 중요한지를 성경 찾아 읽게 하고 찬양도 했습니다. 우리 인생이 풀이며 그 영광이 풀의 꽃임을 아는 길은 영원한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9~11절입니다. “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10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11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이사야 40:1~8절에서 인생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라고 합니다. 그 아름다운 소식이란 인생이 풀과 같고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9절에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가 무엇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까? 예루살렘이 두려워하지 말고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셔서 그의 팔로 다스릴 것이라고 합니다. 상급과 보응이 그 앞에 있다고 합니다. 상급은 그의 팔로 자기 백성을 어린 양을 품에 안 듯이 안는 것입니다. 목자가 어린 양을 안으시는 것이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주께서 안는다는 표현도 있지만 여자가 남자를 안는다는 표현도 성경에 있습니다. 여자가 남자를 안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봅니다.

 

예레미야 31:21~22절입니다. “21 처녀 이스라엘아 너의 이정표를 세우며 너의 푯말을 만들고 큰 길 곧 네가 전에 가던 길을 마음에 두라 돌아오라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 22 반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

 

예레미야 시대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시기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남자들이 많이 죽습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신다고 합니다. 그 새 일이 여자가 남자를 둘러싼다고 되어 있습니다. 전에 번역에는 남자를 안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단 교주들은 이런 말씀을 자기에게 적용하기에 스캔들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여자가 남자를 둘러싼다는 것, 전에 번역으로 안는다는 것이 왜 새 일입니까? 반역한 딸, 방종한 딸이라서 심판을 받아 예루살렘이 멸망하지만 그러나 다시 여자가 남자를 안는 다는 것은 신약에서 세리와 죄인과 창기들이 예수님을 믿는 일이 새 일입니다. 율법의 의로 완벽하다는 자들은 예수님을 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의를 끌어안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의 영이 임하여 메시아를 기다린 자들은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주를 찬송합니다.

 

누가복음 2:25~32절입니다.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시므온의 찬송입니다.

 

마가복음 10:13~16절입니다. “13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안았지만 이제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들을 안아주십니다. 주님께서 안아주셔야만 자녀가 되고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라는 새 언약으로 이루어내시는 주님의 일입니다. 108장 찬송가사 3절입니다. ‘주 예수 내 곁에 가까이 계셔 그 한없는 사랑 늘 베푸시고 온 세상 아기들 다 품어 주사 주 품안에 안겨 살게 하소서여기의 아기가 문자적인 아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한 순간도 못살아가는 절대의존적인 자로 보시면 됩니다.

 

누가복음 7:36~39절입니다. “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3)앉으셨을 때에 37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3)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동네 사람들이 다 알정도의 죄인이라면 창기라고 봅니다. 은밀한 죄란 사람들이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런 여인이 유대인 남자들의 식사자리에 와서 예수님을 만지고 있으니 바리새인 시몬이 속으로 뭐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예수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눈물로 그 발을 씻기고 그 머리털로 발을 닦는다면 예수님의 발을 끌어안는 형상입니다. 그리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붓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본 시몬은 예수님께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고 입도 맞추지 않았고 감람유도 붓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많이 용서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여인에게 일어나는 일이 새 일입니다. 여자가 남자를 안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31~32절입니다. “31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남편 되신 그리스도와 신부된 교회를 알려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신부된 교회라면 남편 되신 그리스도를 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고 하시는 그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안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성공과 영광을 주는 다른 그리스도를 안으려고 합니다. 때로는 바리새인들처럼 자기 의의 영광을 끌어안고 살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이 신랑을 버리고 바람을 피우는 창녀와 같은 짓입니다.

 

오늘 우리도 똑 같은 자들입니다. 언제 우리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었습니까? 그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역사 속에서 그 십자가의 완성이 우리에게 넘겨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 원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우리를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먼저 안아주셨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우리도 예수님을 품에 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다른 것을 끌어안고 있다면 그리스도를 안는 일을 멀리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먼저 안으셨기에 그 영원하신 사랑이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기에 결국 우리도 그리스도를 안게 됩니다. 이것이 여자가 남자를 안는 새 언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