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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7:1~4 모든 사람의 끝 2019. 4. 24

 

1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3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지난주에 초상(初喪)을 치렀습니다. 목사는 성도가 중병으로 입원을 하면 심방을 합니다. 그러다가 별세하면 병원으로 가서 장례일정을 의논하고 입관, 조문, 발인, 화장, 하관까지 함께 합니다. 목사가 된 유익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죽음을 가까이 하고 산다는 것이 그 중의 하나입니다. 결혼식 주례는 한번이면 됩니다. 그런데 장례식 주례는 기본적으로 세 번입니다. 결혼식에 다녀오면 그들이 고생할 것이 생각이 나지만, 장례식에 다녀오면 그 고생이 끝이기에 홀가분하게 옵니다.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야만 고생이 끝이며 안식을 누리다가 생명의 부활에 참여합니다.

 

본문 1절입니다.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고 합니다. 잠언이나 전도서를 보면 비교를 통하여 지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다고 하는데 새 번역은 명예가 값비싼 향유보다 더 낫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명예라는 것도 은혜로 산 결과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명예를 바라고 하는 일이라면 이것도 욕망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에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남을 것입니다. 좋은 이미지로 남든지 나쁜 이미지로 남든지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이름이란 전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좋은 이름의 평가는 세상의 가치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평가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고린도후서 2:14~15절입니다. “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5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17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바울사도는 자기들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합니다. 복음이 어떤 사람에게는 사망의 냄새가 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향기가 됩니다. 17절의 새 번역입니다. 우리는, 저 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서 먹고 살아가는 장사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일꾼답게, 진실한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바르게 전하면 사망의 냄새로 맡는 자가 있고, 생명의 향기로 맡는 자가 있습니다. 향기가 분명하지 않으면 섞인 것입니다.

 

본문 1절을 다시 봅니다.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고 합니다. 좋은 이름이 값비싼 향유보다 낫다고 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담의 타락이후에 아담의 혈통은 다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죄인이 죄인을 나은 것이기에 구약의 창세기 5장의 족보는 천년을 가까이 살았지만 죽었더라는 것이 결론입니다. 창세기 6장은 홍수 심판이 일어납니다. 사람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하기에 사람이 태어나고 번성할수록 죄악도 가득 차게 됩니다. 그러므로 한 죄인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하나님을 괴롭게 하고 이웃을 괴롭게 하고 환경도 파괴하다가 죽어갑니다. 그런데 죽으면 더 이상 죄의 결과들이 나오지 않으니 더 나은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본문 2절입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두라고 합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왜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낫습니까?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의 끝이 죽기 때문입니다. 잔치 집에 가면 잠시 동안이라도 모든 사람의 결국인 죽음에 대한 생각보다는 행복한 삶을 꿈꾸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산자라고 생각한다면 죽음을 마음에 두라고 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의 끝인 죽음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기에 자꾸만 미루어두거나 피하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3~4절입니다. “3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슬픔이 웃음보다 나은 이유는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에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지만 어리석은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가 있습니까? 슬픔과 통곡소리가 나는 초상집에 있습니까? 날마다 호화로이 잔치하는 집에 있습니까?

 

10년 전에 부산의 이성희 집사님께 중고등부 수련회 시간에 한 시간 특강을 부탁했습니다. 부산의 특목고 교사이기도 하고 입시 사정관이기도 하기에 아이들의 진로를 이야기해도 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경에서 진로에 대하여 찾아보다가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이라는 말씀을 찾아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특목고 진학을 위하여 많은 학부모들이 온 자리에서 자신의 자녀가 세 명이지만 한 명도 특목고 보내지 않았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막내는 대학가기 싫다고 하니 그렇게 하라고 해서 고삼 때 야자도 하지 않고 바리스타 배웠습니다.

 

열왕기상 2:1~3절입니다. “1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2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3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사람의 진짜 중요한 진로는 모든 사람이 가는 이 길을 알라고 하면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이 유언을 받은 솔로몬은 어떤 길로 갔습니까? 그 마음이 잔칫집에 갔습니까? 초상집에 갔습니까?

 

열왕기상 11:1~3절입니다. “1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2 여호와께서 일찍이 이 여러 백성에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그들과 서로 통혼하지 말며 그들도 너희와 서로 통혼하게 하지 말라 그들이 반드시 너희의 마음을 돌려 그들의 신들을 따르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그들을 사랑하였더라 3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

 

후궁이 칠백이며 첩이 삼백이라고 합니다. 첩은 결혼식을 하지 않아도 후궁으로 맞이하려면 간단하게라도 잔치를 벌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잔치를 얼마나 많이 했겠습니까? 이런 잔치와 그 연애로 인하여 솔로몬의 마음을 여인들이 돌이켜 우상숭배를 한 것입니다. 그 결과 솔로몬 사후에 나라가 남북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런데 이런 솔로몬이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가있는 것이라고 한 것은 경험적인 지혜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가 있습니까?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349407)은 이 본문을 이렇게 설교하였습니다. 춤과 꽹과리, 웃음과 향락, 음식과 술이 넘치는 곳에 가는 것보다 울음과 애도, 신음 소리와 번민, 아주 큰 슬픔이 있는 곳에 가는 것이 낫습니까? ‘, 정말 그렇습니다라고 솔로몬은 대답합니다. 왜 그런지 말씀해 주십시오. 어째 그렇습니까? 앞의 장소에서는 오만이 생겨나지만, 뒤의 장소에서는 절제가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자기보다 더 부유한 사람의 잔칫집에 간 사람은 자신의 집을 더 이상 예전처럼 기쁘게 바라보지 않고, 불만스럽게 자기 아내에게 돌아옵니다. 그는 불만은 안고 식탁에 앉으며 종들과 자식들과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역정을 내며, 다른 사람의 재산과 비교해 자신의 가난을 더욱 절실하게 느낍니다. 나쁜 것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를 잔치에 초대한 이를 잔뜩 시기하기도 하고 결국 아무 이득도 얻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초상집에 대해서는 이런 유의 이야기를 할 것이 없습니다. 거기서는 오히려 많은 영적인 지혜와 절제를 얻게 됩니다. 일단 시신이 모셔진 집으로 들어가 말없이 누워있는 고인을 보고, 또 아내가 몹시 슬퍼하며 얼굴이 상한 채 넋을 잃은 것을 보면, 그는 기분이 가라앉고 슬픈 표정이 됩니다. 함께 앉아 있는 사람들마다 저마다 서로에게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의 악함을 어찌 이루 다 표현할 수 있으라! 우리는 이렇게도 약한 존재인걸!’이라는 말밖에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본성의 무의미함을 알고 우리 자신의 악함을 나무라고 현재의 것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할 때 나오는 이런 말보다 더 지혜로 가득한 말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솔로몬이 느낀 바로 그 감정-참으로 놀랍고 거룩한 지혜로 가득 찬 그 감정-,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라는 감정을 또 다른 말로 나타냅니다. 사실 초상집에 간 사람은 고인이 원수가 되었더라도 고인을 위해 눈물을 흘립니다. 초상집이 잔칫집보다 얼마나 더 좋은지 아시겠습니까? 잔칫집에서는 주인이 친구여도 시기하지만 초상집에서는 고인이 원수였어도 그를 위해 눈물 흘립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600년 전의 설교가 이렇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마음이 있습니까?

 

누가복음 16:19~31절입니다.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오늘 본문의 해석과 같은 말씀입니다. 부자는 날마다 호화로이 잔치하면서 살아갑니다. 나사로는 그 집 앞에서 음식 쓰레기를 먹습니다. 온 몸은 헌데가 나서 개들이 핥습니다. 누가 봐도 부자는 복 받은 사람이고 나사로는 저주 받은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다 가는 그길, 모든 사람의 끝인 죽음은 두 사람 다 동일하게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죽고 나니 완전히 다른 세상입니다. 아직 십자가 전이기에 나사로가 죽어 있는 곳을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하고 부자가 죽어 있는 곳을 음부라고 합니다. 부자는 죽어서도 나사로를 자기 심부름을 시키면 되는 자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인간은 죽어도 회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영원히 용서가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이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보내면 자기 형제들이 이곳에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세상에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그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자가 살아가서 말해도 듣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도 십자가 이전이기에 모세와 선지자로 합니다. 십자가 이후로는 복음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표적이 아니기에 거리끼며 헬라인들에게는 지혜가 아니라 미련하게 보이는 십자가의 복음을 믿지 않으면 죽은 자가 살아와서 말해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수많은 천국과 지옥의 간증들을 하는 것을 보면 부자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복음을 믿지 않으면 그것이 심판이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17:30~31절입니다.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바울사도가 그리스 아테네에서 온갖 우상의 신전들을 보고 난 후에 그들의 종교심으로 인하여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신전도 본 것입니다. 그래서 참 하나님은 사람이 지은 전에 계시지 않으시고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 않고 오히려 만유에 호흡과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고 하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히브리서 9:27~28절입니다. “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세상에도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을 합니다. 옛날 로마에서는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행진을 할 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큰소리로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를 외쳤다고 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너무 우쭐대지 말라.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게 행동하라.' 이런 의미에서 생겨난 풍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죽음을 기억하기 보다는 승리의 축하와 잔치만을 생각하였기에 인류의 역사는 망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죄의 삯이 사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가 없이 죽으시는 유일한 죽음입니다. 이 죽음은 자신의 죄가 아니라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죽음입니다. 그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의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신 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믿는 자는 죄가 용서 되었기에 죄와 상관없이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립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날마다 예수님의 죽으심인 십자가를 생각하고 자랑합니다. 이런 자들이 지혜로운 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