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사정으로 인하여 설교10분후부터 녹음녹화되었습니다 양해바랍니다]

      [음성 설교]

 

마태복음 6:16-18 금식에 대하여 2011. 2. 16

 

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오늘 본문은 금식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냥 금식하는 것이 아니라 금식기도로 보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하시는 말씀을 보면 금식을 하는데 하나님께 무언가 아뢸 것이 있었기에 금식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마지막부분과 연결이 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제일 센 기도가 무엇입니까? 금식기도이지요! 새벽기도, 작정기도, 철야기도, 릴레이기도, 중보기도, 산상기도 등 기도도 많지만 그래도 안 되면 최고로 센 기도를 금식기도라고 합니다.

 

금식기도의 능력이라는 책도 나와 있습니다. 많은 부흥사들이 기도에 대하여 설교하는 것을 들어보았습니다. 자식이 무엇을 요구할 때에 밥을 안 먹고 요구하면 대부분 들어준다고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도 자기 자녀가 밥도 안 먹고 기도하면 그 소원을 들어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금식기도라면 그것이 기도가 아니라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한 데모입니다. 머리에 띠를 두르고 데모하는 사람들처럼 자기들의 요구를 관철할 때 까지 금식한다는 것은 성경적인 금식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금식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보려고 합니다.

 

우선 오늘 본문은 금식을 할 때에 사람 앞에 보이려고 하지 말라고 합니다. 외식하는 자들처럼 슬프게 보이려고 세수도 안하고 머리에 기름도 바르지 않는 모습으로 금식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 것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금식 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은밀할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려고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서 보시고 갚으실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은 이미 자기의 상을 받은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행위를 마태복음 6장에서 세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는 의를 행하는 것과 5절에서 기도하는 것과 16절에서 금식하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의를 행하는 것도 기도하는 것도 금식하는 것도 사람에게 보이고자 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행하는 가장 고차원의 종교적인 행위가 금식입니다. 그런데 이런 금식조차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라면 그 사람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였기에 이미 자기의 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의롭다. 기도하는 사람이다. 금식까지 하는 경건한 사람으로 칭찬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금식에 대하여 성경전체에서 무엇을 말씀하는지 보겠습니다. 최초의 금식에 대한 말씀이 레위기 16:29절입니다. “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칠월 곧 그 달 십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 중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리하라” 7월 10일 대 속죄일에 스스로 괴롭게 하라는 이 말씀이 공동번역에서는 단식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속죄일에 음식을 먹지 않음으로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은 죄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금식은 죄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나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금식으로 가는 것을 봅니다.

 

회개를 위한 금식에 대하여 사무엘 상7:3-6절을 봅니다. “봉독” 여호와께로 돌아가기 위하여 우상을 버리고 금식을 합니다. 풍요와 다산을 주는 신들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가기 위하여 금식을 선포하고 죄를 고백하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금식을 하는 것이 세상의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우상을 원하는 금식이 아닙니까? 바알과 아세라는 가나안의 풍요와 다산을 준다는 우상입니다. 이런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가는 것이 미스바의 금식기도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구국기도회를 하면서 우리가 다른 종교보다 더 나은 힘을 달라고 하는 것은 회개가 아니라 힘이라는 우상을 숭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금식에 대하여 사무엘하 12:15-23절에서 봅니다. “봉독”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게 됩니다. 다윗이 아이를 위하여 금식하고 철야합니다. 신하들이 다윗을 일으키려고 하나 듣지 않고 먹지도 않습니다. 이레 만에 아이가 죽었습니다. 아마 일주일을 금식한 것으로 보입니다. 신하들이 아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살아 있을 때에도 금식을 하였는데 죽었다고 하면 얼마나 더 상심이 될까하고 말을 못하는데 다윗이 눈치를 채고 죽었느냐고 묻습니다.

 

죽었다고 하자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경배하고 음식을 차리게 하고서는 밥을 먹습니다. 아이가 죽었다고 하는데 여호와께 경배하고 음식을 먹으니 신하들이 도무지 다윗 왕의 마음을 알 길이 없습니다. 그때 다윗이 하는 말이 22-23절입니다. “22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23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때로 금식할 수도 있겠지만 다윗의 이런 모습이 믿음의 모습이라고 봅니다.

 

잘못된 금식의 예도 봅니다. 열왕기상 21:8-10절입니다. “봉독”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지만 나봇이 거절합니다. 이에 이세벨이 나봇을 죽이기 위하여 나봇이 사는 성읍에 금식을 선포하게 합니다. 나봇을 모함하여 죽이기 위한 거짓 금식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런 죄악도 짓는 것이 죄인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죄들로 인하여 북은 앗수르에 망하고 남은 바벨론에 망합니다.

 

바벨론에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당한 여러 가지 사건을 기억하면서 금식하다가 70년 만에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금식을 해야 하느냐고 스가랴 선지자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응답이 왔습니다. 스가랴 7:5-6절입니다. “5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6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

 

과연 누구를 위한 금식이냐고 하십니다. 금식을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7절에 보시면 너희가 예루살렘에 평안히 거할 때에 이미 말하였다고 하십니다. 그 말씀에나 순종하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은 8-14절을 보시면 긍휼과 자비를 요구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멸망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주제에 아무리 금식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금식의 절기가 바뀌어 기쁨의 날이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8:14-19절을 봅니다.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에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로 인하여 금식의 날이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날이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날이 언제이며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는 금식이 무엇입니까? 이사야 58:1-9절을 봅니다. “봉독”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알게 하라고 합니다. 그 죄가 무엇인가 하면 날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이 마치 공의를 행하는 나라같이 의로운 판단을 구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런 것이 다 외식이라고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들이 금식을 하고 마음을 괴롭게 하는데 왜 주께서 알아주지 않느냐고 항의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금식을 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고 종들에게는 온갖 일을 시키는 것입니다. 금식하면서 논쟁하고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데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께 상달될 금식이냐고 합니다.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이 어찌 금식이라고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따로 있습니다. 6절에서 7절을 봅니다. “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것이 참된 금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금식한다고 하는 자들이 오히려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고 있기에 이런 금식은 오히려 책망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기도를 할 수가 있습니까? 누가복음 5:27-33절을 봅니다. “봉독” 예수님께서 레위라고 하는 세리가 세관에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니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이 은혜를 입은 레위가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집에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세리와 다른 사람들이 함께 식사를 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합니다. 너희가 어떻게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답하십니다. 건강한 사람에게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쓸데 있다고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다고 합니다.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면 죄인들과 어울리면 안 되고 금식하며 기도해야 한다고 따지는 것입니다. 그 근거를 요한의 제자도 자주 금식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러한데 당신의 제자들을 먹고 마신다고 합니다. 누가복음 7장에 보시면 먹기를 탐하고 술을 즐기는 자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을 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고 있습니다. 압제 당하는 자에게 자유를 주고 있습니다. 그 흉악의 결박과 압제가 무엇입니까? 죄와 사망의 권세에 붙들려 있는 자들에게 구원의 자유를 주고 있습니다. 삭개오를 보십시오! 키가 작아서 놀림을 받고 자랐을 것입니다. 성공하기 위하여 이를 악물고 세리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돈을 많이 모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그 사람에게 흉악의 결박입니다. 이런 세리를 예수님께서 찾아가시니 그가 흉악의 결박에서 풀려나는 것입니다.

 

창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어떻게 창기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가 묶여 있는 흉악의 결박을 스스로 풀어낼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용서로 풀어주십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씻고 발에 향유 옥합을 붓고 입 맞추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흉악의 결박이 풀어진 이 기쁨을 많이 용서 받은 그 기쁨을 사랑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세상의 온갖 얽매인 흉악과 압제의 결박에서 자유를 줍니다. 돈, 명예, 권력, 쾌락, 성공주의에 빠져 자기만 사랑하는 자들을 해방시켜 예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은혜의 자리로 해방시켜 주시는 능력이 참된 금식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참된 금식의 완성은 십자가입니다. 속죄일에 자기를 괴롭게 하는 금식 정도가 아니라 아예 온 몸이 십자가에 달리셔야 하는 그 고난으로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십니다. 죄와 사망에서 의와 생명으로 옮겨주십니다. 이 은혜를 입은 자들은 예수님이 너무나 커 보입니다. 나와 세상이 간곳이 없고 구속한 주님만 보이게 됩니다.

 

누가복음 5:34-35절을 봅니다. “3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35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예수님이 신랑이신데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전쟁에 나가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신혼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기뻐하는 자들도 금식할 때가 오는데 그것은 신랑을 빼앗길 때입니다. 이때가 예수님을 잡아서 십자가로 끌어갈 때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의 금식은 언제 해야 하는 것입니까? 세상이 너무 커보여서 예수님이 작게 보이고 희미하게 보이면 금식할 때입니다. 우리의 고민과 근심과 걱정과 한숨과 탄식은 거의 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잠시 있다가 사라질 눈에 보이는 것들을 주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썩지 않고 쇠하지 않고 낡아지지 아니할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밝게 보이면 현재 돌에 맞아 죽는 한이 있어도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달라고 간구하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루신 금식의 능력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