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마태복음 8;28-34 떠나소서! 2011. 3. 25

 

28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29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30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31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이르되 만일 우리를 쫓아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보내 주소서 하니 32 그들에게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33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34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들마다 수많은 기도를 하는데 기도를 왜 무엇 때문에 합니까? 오늘 본문을 보기 전에 우선 마태복음 8:18-22절을 봅니다. “봉독” 무리가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십니다. 무리가 많이 모인 것은 병고쳐주심을 보고서 몰려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종종 무리들을 피하여 가십니다. 오병이어 기적을 베푸신 이후에도 제자들을 강 건너가게 하시고 혼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십니다. 왜 자꾸만 무리들과 따로 떨어지려고 하십니까?

 

따르고자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따라 나선 것은 병 고침을 받고 먹고 배부르게 되었고 기적을 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다 썩는 양식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고도 자신을 숨기시는 것은 사람들이 오해하여 지상의 왕으로 세우려고 하는 것을 막기 위하심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자신을 알리게 하시는 부분도 간혹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렇게 알리게 하시는데 이는 이방인 지역이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잘못된 메시아사상이 아니라서 그렇게 한 것으로 봅니다.

 

18:19-22절을 보시면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두 사람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서기관인데 예수님을 따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십니다. 너 왜 나를 따라오려고 하느냐는 말씀입니다. 또 다른 제자 중에 한 사람은 아버지를 장사 지내고 따라 오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 두 사람이 따라 나섰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따라 나서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불러서 따라나선 제자들도 자기들의 야망이 다 따로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임금이 되면 높은 자리 차지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스스로 따르고자 나선 자들이 이런 욕망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에게 찬물을 끼얹어 버립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은 따르기는 하겠지만 아버지 장사를 지내고 따르겠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은 아버지의 장사는 종교적인 의무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중요하며 또한 하나님께 상을 얻을 만한 업적이 되는데 이것을 무시하신 것입니다. 심지어 죽은 자를 죽은 자에게 맡기라는 말씀은 살아있다고 하는 자도 다 죽은 자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우리가 오늘날 믿고 따르며 기도한다고 할 때에 과연 무엇을 믿고 따르며 기도하느냐는 질문을 반드시 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저 평생 교회를 들락거려도 자신의 종교성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교회 나와서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하였다고 핑계되겠습니까? 다른 교회도 다 그렇게 하는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면서 다수 속에서 안전을 누리려고 하십니까? 이 시대는 사제의 시대가 아닙니다. 제사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한 자는 다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본문을 봅니다. 거라사 지역에 들어가십니다. 이 지역은 갈릴리 호수 남쪽의 이방인의 지역이라고 합니다. 이곳으로 예수님께서 가시니 무덤에 사는 사람이 달려옵니다. 사람이 집에서 살지 않고 무덤에 산다는 것이 이미 정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하면 귀신이 들린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사나운지 동네에서 추방당한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 사람들을 쇠사슬로 묶어 두었지만 그것을 끊어 버렸기에 아무도 그를 제어할 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돌로 자기의 몸을 치기도 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달려옵니다. 이 만남도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찾아가신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이 오신 일을 보여주시고 또한 이런 예수님에 대한 세상의 사람들의 반응도 보여주십니다.

 

마가복음 5:1-20절을 봅니다. 마태복음보다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귀신들려 무덤에 거하며 소리를 지르는 이 사람이 예수님께 달려와서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습니다. 7절을 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 말은 귀신이 하는 말입니까? 귀신 들린 사람이 하는 말입니까? 말이야 사람이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귀신이 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보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데 귀신들은 알아봅니다. 귀신의 간구는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자기를 괴롭히지 말라고 합니다.

 

귀신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 인하여 멸망당할 신세임을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자기를 괴롭히지 말라고 간구합니다. 자신이 괴롭힘을 당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서 나오게 하는 것도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지만 그보다 더 궁극적인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요한계시록 20:10절입니다.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불과 유황 못에 던져져서 영원히 괴로움을 받을 것이 사탄과 마귀와 귀신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의 운명입니다.

 

마태복음 8:29절입니다.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때가 이르기 전이란 방금 본 계시록 20:10절의 때입니다. 자신들의 영원한 심판인 그 때가 아직 이르기 전인데 벌써 우리를 괴롭히려고 오셨느냐고 귀신이 소리 지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발작을 하는 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그 귀신을 명하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귀신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십니다. 9절을 보시면 귀신이 자기의 이름을 레기온이라고 합니다. 레기온은 로마군대의 단위인데 6천명의 군대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귀신이 그 사람에게 떼로 들어가 있다는 말입니다. 자기 이름을 말한다는 것은 높은 분에게 관등성명을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말기를 간구합니다. 귀신도 예수님께 벌벌 떨면서 간구합니다. 자기들을 영원히 심판할 분이심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제 귀신들이 예수님께 간구하기를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니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갑니다. 돼지들이 거의 이천 마리가 되는 때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몰사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돼지를 치던 자들이 다 보았습니다. 귀신들린 자와 예수님의 대화도 보고 들었기에 이들이 여러 마을에 가서 말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몰려와서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보았습니다. 돼지 이천 마리라면 어마어마한 재산입니다. 유대인들은 돼지를 치지도 않고 먹지도 않으니 이들이 이방인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이 와서는 예수님 앞에 그 귀신 들린 자, 곧 군대 귀신에게 사로잡혔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사람들이 두려워합니다. 이렇게 된 자초지종을 돼지를 치던 사람들이 말을 하자 그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께 간구합니다. 제발 우리 지방에서 떠나 주시기 바랍니다. 왜 떠나달라고 했을까요? 귀신 들린 자를 고친 것을 인정하겠지만 그로 인하여 돼지가 이천 마리 죽어버렸습니다. 이것을 어떤 사람들은 한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데 수억을 써서라도 한 영혼이 구원받는 다면 써야한다며 헌금하라고도 합니다만 그런 사람에게 네가 속한 교회와 선교단체를 포기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하면 예수님 떠나주세요!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귀신의 간구와 이 마을 사람들의 간구가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차이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 마을 사람들도 다 귀신 들었다는 말입니다. 귀신 들린 증거가 예수님을 떠나 달라고 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좋다고 몰려오는 것은 어떤 예수님일까요? 과연 머리 둘 곳도 없는 노숙자 같은 예수님을 따라 나서겠습니까? 예수님이 사람을 살리시니 돼지 이천 마리가 날아가 버리는데 이런 예수님을 환영하시겠습니까? 그러나 나중에 30배 60배 100배를 준다고 하면 그 미련 때문에 떠나지 못하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9:32-34절을 봅니다. “32 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33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34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시니 하나님을 가장 잘 알고 바르게 섬긴다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고 합니다. 그러면 누가 귀신 들린 사람입니까?

 

마태복음 12:22-45절을 봅니다. “봉독” 9장에서는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셨는데 이번에는 더 심한 사람입니다. 귀신이 들려 눈도 멀고 말로 못하는 사람을 데려왔을 때에 예수님께서 고쳐주셨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장애가 있는 사람과 귀신이 들린 사람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었기에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 사람이 고침을 받았을 때에 백성들은 이 사람이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아가 아닌가 하는 말을 하였지만 바리새인들은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분쟁하는 나라나 마을이나 집이 망하는데 사탄이 사탄을 대적하면 망하는 것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며 너희의 자녀들은 어떻게 귀신을 쫓아내느냐고 합니다. 이 당시에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시면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모습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사역을 귀신이 들려서 그렇게 되었다고 보는 그들이 바로 귀신에게 사로잡힌 모습입니다. 이들은 거라사 지역의 사람들보다 더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떠나 달라고 간구하였지만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일을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에 누가 과연 귀신 들린 사람입니까? 거라사의 광인이 귀신들린 사람이 맞습니다. 이 사람에게 귀신이 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이때 이 귀신 들린 사람들을 마을 밖에 쫓아내고 쇠사슬로 묶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서 자기 마을에서 떠나시라고 간구하였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역시 귀신이 들린 사람들입니다. 귀신이 들렸기에 예수님께 떠나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자신들은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방인보다 더한 귀신이 들어온 자들입니다. 이들이 율법으로 청소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일곱 귀신이 들어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귀신 들린 자로 보고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이 세상에서 귀신들린 자들이 누구입니까? 지금 이 땅에 정신병으로 구금되어 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단순히 정신병이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귀신들렸다고 합니다. 약물로도 안 되고 난폭하면 귀신들림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격리된 이런 사람들과 달리 세상에서 활보하고 사는 우리들은 과연 정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윤리 도덕적으로 살고 세상의 문화와 환경에 맞추어 살면 귀신 들린 사람이 아닙니까?

 

미셀 푸꼬의 ‘광기의 역사’라는 책을 보면 시대마다 광인이라고 감금한 역사를 말하는데 이런 현상은 인간의 이성과 권력이 결탁하여 사회 부적응 자들을 감금하였다고 고발합니다. 그러면 이들을 감금한 그들의 정신 상태는 온전합니까? 광인들을 감금시킨 자들이 온전한 정신들입니까? 리비아의 카다피가 광인입니까? 이들을 공격하는 자들은 선입니까? 강대국이라는 이들이 행하는 국제 사회의 횡포는 악이 아닙니까? 귀신이 떼거리로 들었느냐 적은 수가 들었느냐의 차이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 벗어날 수가 없기에 주님께서 강한 자보다 더 강한 자로 오셔서 그 사로잡힌 자들을 그의 십자가로 구원하여 내십니다. 이 예수님을 밀쳐내는 일이 귀신에 사로잡힌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는 끝까지 예수님만 바라보는 것이 기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