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마태복음 9:27-31 불쌍히 여기소서! 2011. 3. 30

 

27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28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29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30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31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

 

마태복음 9장에서 여러 가지 치유의 사건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치유의 사건을 통하여 무엇을 증거 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병이 고침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까? 문자대로 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병이 들면 믿음이 없어서 병이 든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을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병이 든다는 것 자체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바벨탑에 갇힌 복음이라는 책을 보면 미국의 믿음운동 하는 사람들의 계보와 그들의 주장들을 고발하고 있는데 너무나 엉터리 같은 내용을 믿고 있습니다.

 

케네스 헤긴이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으로 치유 받은 모든 사람들은 마귀에게 눌려 있던 자들이었다. ..... 마귀는 모든 질병 뒤에 있다. .... 온갖 질병과 사탄을 분리할 수는 없다.” 케네스 코플랜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온갖 질병과 가난으로 훈련하신다는 종교적 사고로 말미암아, 성령님에 대한 지식 없이 1천 5백년을 내려오게 되었다.” 이런 말들은 마치 우리나라의 뵈레아의 귀신론과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질병과 가난이 사탄으로 인하여 일어났기에 믿음의 사람은 질병과 가난이 떠나야 한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이런 말들에 사람들이 열광하며 모여들고 돈을 보냅니다.

 

그러나 성령이 충만한 바울사도는 어떠하였습니까? 자기에게 있는 육체의 가지를 제거하여 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구하였으나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고린도후서 12:9-10절입니다.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자신이 약할 때 강하다는 것은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주를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봅니다.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를 지릅니다.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았는지 아니면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문을 듣고서 그 소리를 따라가며 고함을 질렀는지 잘 모르지만 보이지 않으니 고함이라도 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병자를 고쳐주신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다윗의 자손이이라고 부르는 것이 놀라운 고백입니다. 예수님을 다윗의 후손이라고 부르는 것은 메시아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도 그냥 집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런데도 이들이 집안까지 나아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고 합니다. 그들이 주여 그러합니다. 다고 대답을 합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면 능히 자신의 눈을 뜨게 하여주실 줄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하시니 그 눈들이 밝아진 것입니다. 여기서 또 많은 사람들이 믿음대로 된다고 하면서 사람의 믿음을 강조합니다. 수많은 치유사역자들이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라고 합니다. 그러면 기적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역하는 사람들 자신들도 다 병들고 늙고 죽어갑니다. 왜 그런 것을 믿음으로 치유하지 못하는지에 대하여 무어라고 답을 할지가 궁금합니다.

 

그러면 이 맹인이 고침을 받는 일을 통하여 무엇을 증거 하고자 하는지 계속하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믿음대로 되라고 하시자 정말 눈이 뜨여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그 다음의 말씀을 봅시다. 엄히 경고합니다.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온 땅에 퍼뜨립니다. 여기서 이들이 부르짖은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호칭과 너희 믿음대로 되라는 말씀과 치유와 왜 그 고침 받은 것을 알리지 못하게 하셨는지를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먼저 왜 고침 받은 것을 알리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입니다. 마태복음 12:9-21절을 봅니다. “봉독”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이 마른 자가 왔습니다. 예수를 고발하려는 자들이 병 고쳐주는 일이 옳으냐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양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지면 끌어내지 않겠느냐고 하시면서 사람이 양보다 귀하니 당연하다고 하시면서 그 손 마른 자를 고쳐주십니다. 이를 인하여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예수를 죽일꼬! 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시자 많은 사람들이 따라왔습니다. 이들이 병을 고침 받으려고 왔습니다. 그들을 고쳐주시고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메시아 은닉이라고 하는데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신 것은 선지자들의 예언의 성취를 보여주시면서 자신이 메시아임을 증거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숨기라고 하시는 것은 사람들이 원하는 메시아-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는-가 아니라 죄와 사망의 문제를 영원히 해결하는 메시아의 일을 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기 까지 조용하게 자신의 일을 이루어 가셔야 합니다.

 

이사야 42:1-9절을 봅니다. “봉독” 하나님의 기뻐하는 종이 이방에 정의를 베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외치지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고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한다고 하시는데 이 말씀을 대부분 자비가 긍휼로 봅니다. 그런데 바로 앞의 말씀이 하나님의 정의를 알리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베푼다는 것은 심판을 말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두어버리면 심판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도 내 버려두면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하시려면 상한 갈대는 잘라내어야 새 갈대가 돋아 날 것이며 꺼져가는 등불은 불을 끄고 심지를 바꾸고 기름을 다시 넣어야 됩니다. 그러면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이 이스라엘이라고 하면 그들을 가만히 두는 것은 심판이라는 말입니다. 언제까지 입니까?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입니다. 그 심판하여 이길 때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승리하기까지입니다. 그 십자가로 인하여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불러내시는 것은 이제 주의 긍휼로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긍휼로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롬11:32).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은 조용하게 일하셔야 합니다. 이사야의 42:7절의 예언대로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나오게 하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시는데 이것이 단지 육체적인 소경을 눈뜨게 하거나 감옥에서 풀려나오게 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은 뜨게 하셨지만 그 당시에 감옥에 갇힌 자를 풀어내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은 무엇을 보게 하시고 어디에서 풀려나와야 하는지 성경 전체를 통하여 보아야 합니다.

 

이사야 61:1-2절입니다. “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이 말씀을 예수님은 자신에게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단지 병의 고침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건져내셔서 의와 생명의 나라로 옮기시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다윗의 자손이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다윗의 자손에 대하여 다음의 성경을 봅니다.

 

마태복음 22:41-46절입니다. “41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43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46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유대인들이 기다린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으로 온다고 알고 있었지만 다윗이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였으니 어떻게 다윗의 후손이 되겠느냐는 예수님의 이 묵시적인 질문 앞에서 시간과 공간에 갇힌 자들이 아무도 대답을 못합니다. 바리새인들이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 정작 나타난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알아보기는커녕 그렇게 주장하는 예수님을 죽여 버렸습니다. 이것이 정말 소경된 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소경이 예수님을 향하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부르짖음은 그들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물론 본문에서 네 믿음대로 된다고 하셨지만 이런 믿음이 눈을 떴다고 하는 정상인들이 갖지 못한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의롭다고 하는 자들에게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경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다윗의 자손이라고 믿게 된 것은 역설입니다. 이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소경을 눈 뜨게 하신 것은 이사야 예언의 성취하면서 여호와의 종이 해야 할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육체적인 질병이나 육체적인 감옥에 갇힌 문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들이 빛을 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9장은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묻습니다. 유대인들은 죄의 결과로 소경이 되었다고 보는데 날 때부터 소경이 되었으니 자신의 죄냐 부모의 죄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질문자의 답변을 시원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황스럽게 답을 하십니다. 그들의 질문과 달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하시면서 그 소경을 침으로 진흙을 이겨 눈에 바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하였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고 보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의 지도자들이 이 사람을 불러서 심문을 합니다. 눈뜬 소경이 그를 선지자라고 말하니 지도자들은 안식일에 이렇게 하였다고 법을 어긴 자이기에 죄인이라고 합니다. 눈뜬 소경이 그들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들으시지 않으시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하자 그를 쫓아 내어버립니다. 쫓겨나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보고 네가 인자를 믿느냐고 합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말씀하시면 믿겠다고 합니다. 예수님 자신이라고 하시자 그가 믿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요한복음 9:39-41절입니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이 말씀 앞에서 저는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가 무엇을 본다고 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소경이 되어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고전10:12). 우리의 신앙의 연륜이 오래되면 오래 될수록 장님이 되기 쉽습니다. 자신이 다 본다고, 다 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경이 된 증거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스스로 의롭다고 여긴 바리새인들에 대한 책망의 말씀이지만 오늘 우리에게도 늘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정말 우리가 간구해야 될 내용이라고 봅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 그 뜻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어떻게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지, 이 세상의 끝은 어떻게 될지를 강아지 두 이레만큼이라도 마음의 눈을 뜨게 하여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