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마태복음 12:38-45 표적을 보여주소서! 2011. 4. 6

 

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41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43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44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오늘말씀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표적을 왜 요구하는 것입니까? 그동안 많이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을 증거 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표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내용들을 이루어 내심으로 성경을 응하게 하시는 분으로서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물론 메시아 은닉의 방법도 사용하시고 자신의 표적을 알리지 못하게도 하셨지만 그 동안의 이적과 기적과 표적들로 인하여 충분하게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도 의심이 들었습니다. 요단강에서 예수님을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고 증거 하고서도 자신이 감옥에서 갇혀 있을 때에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에 대하여 의심이 들었습니다. 과연 당신이 메시아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할지를 요한이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서 물어보았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표적을 구한 것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표적을 구하였지만 예수님을 직접 증거 한 세례요한조차 의심이 들었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달리 있었다고 봅니다.

 

이때 예수님의 답변을 봅니다. 마태복음 11:4-5절입니다. “봉독”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 말씀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내용들입니다. 이 말씀들을 성취하시는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임을 증거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으로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사람들마다 왜 실족하느냐 하면 사람들마다 자신들이 원하는 메시아사상을 따로 챙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각자가 처한 삶의 정황에서 요구하는 바들이 다른 것입니다. 배가 고프면 밥을 제일로 원하는 것처럼 각자의 결핍을 가장 많이 느끼는 것의 요구가 있습니다. 이런 결핍들이 생기는 이유는 생명의 근원에서 차단되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들이지만 사람들은 그 근원을 보지 못하고 현상만 치료하면 되는 줄로 여기고 있기에 사람들마다 그 요구들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보고서 사람들은 얼마든지 실족할 만 한 분으로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필요를 채워주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누가복음 12:13-21절을 보시면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부탁을 합니다. 자기의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누어달라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고 하시면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고 합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않다고 하십니다. 유산을 가로챈 형이 잘못 한 것이지 그것을 정당하게 나누어달라고 한 자가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시면서 어리석은 부자의 어리석음을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계속하여 따라 다녔겠습니까?

 

요한복음 6장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서 따라 나선 자들도 예수님의 살과 피에 대한 말씀 앞에서 어렵다고 하면서 다시는 따라 다니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6:66절입니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하나님께서 오게 하여 주시지 않고 인간이 스스로의 선택으로 예수님을 따라 나서려고 하는 최후의 모습입니다. 다시는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합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따라 나섭니까? 예수님께 무슨 부탁이 있어서 나왔습니까? 재산 문제로 나왔습니까? 먹고 배부른 까닭에 왔습니까? 병 고침과 기적을 위하여 나왔습니까? 결국은 자기들의 필요가 채워지지 아니하여도 떠나고 필요가 채워지면 더 이상 따라다닐 필요가 없으니 떠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하십니다. 그때 베드로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멋진 고백을 합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하나는 마귀라고 하십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길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자로 따라다니지만 팔아넘길 자도 있습니다. 그러면 다른 제사들은 나은 점이 있습니까? 영생의 말씀을 보았다고 해서 끝까지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다 도망갑니다. 부인하고 저주하며 맹세하면서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그러함에도 믿음이 떨어지지 아니한 것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따라갈 사람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스스로 예수님을 선택하여 따라 가는 사람들의 속셈이 무엇인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왜 예수님께 표적을 구하는 것입니까? 그것도 아주 겸손하게 구합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도 겉모습입니다. 이미 여러 가지 표적을 보았지만 마태복음 12:24절을 보시면 그 표적을 귀신의 능력으로 행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자들이 다시 예수님께 표적을 구한다는 것은 유대인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마태복음 16:1-4절을 봅니다. “봉독”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합니다. 대단한 표적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천기는 분별하면서 이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가 없느냐고 하시면서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예수님께서 보여주실 표적은 요나의 표적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표적을 구하는 것이 왜 악하고 음란한 세대이며 이들에게 왜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책망하시는 것은 단지 바리새인들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를 향한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1:15-19절을 봅니다. “봉독” 들을 귀가 없다는 책망의 말씀입니다. 금식하는 요한을 보고서는 귀신이 들렸다고 하면서 예수님은 먹고 마시기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자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지혜는 그 자녀들만 인정합니다.

 

이어지는 20-24절을 봅니다. “봉독”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않습니다.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에 예수님께서 권능을 행하셨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멸망한 두로와 시돈과 소돔과 고모라 보다 더 악하다고 하십니다. 그들에게 그런 권능을 행하셨다면 회개하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심판의 때에 두로와 시돈과 소돔과 고모라가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이 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는 책망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실 표적은 요나의 표적뿐이라고 합니다. 요나의 표적이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삼일을 있다가 나온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서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실 표적이라고 합니다. 이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그동안 많이 보여주신 표적은 어떤 것입니까? 요나의 표적을 보여주기 위한 표적일 뿐입니다. 그 어떤 기적과 표적도 십자가와 부활이 아니라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최종적인 표적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와 부활이 그 당시에 무슨 표적이 되는 것입니까? 십자가의 죽음이란 로마를 반역한 자들 중에서 로마시민이 아닌 자들을 처형하는 가장 끔찍하고 고통스럽고 저주스럽고 비참한 처형이 십자가의 처형입니다. 모두가 피하고 싶고 고개를 돌리고 싶은 그런 죽으심이 어떻게 표적과 기적이 되겠습니까? 그리고 부활도 특정 제자들에게만 나타났습니다. 12제자와 오백여명에게만 나타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만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실 표적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과연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내가 지금 절실하게 급한 문제가 있는데 요나의 표적뿐이라고 하는 이 예수님의 말씀 앞에 우리는 무엇이라고 하시겠습니까? 발등에 떨어진 불이 있는데 지금 죽게 되었는데 주여 표적을 보여주십시오! 이렇게 간절히 부르짖는데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표적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십니다. 요나의 표적에 또 하나 중요한 내용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 만에 나와서 삼일 길이나 되는 큰 성읍 니느웨 성에 하루정도 말하기를 이 성이 망한다고 했을 때에 온 성의 백성과 짐승과 임금까지 다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런데 요나보다 크신 이가 여기 계시는데도 그들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이어서 남방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하여 왔는데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는데도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고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려고 하시는 표적인 십자가와 부활의 표적 외에 다른 표적을 구하는 것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십자가와 부활은 사람들이 평소에 원하는 표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한 자들은 부활의 영이 임하였는데도 십자가만 자랑하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부활의 영광은 아직도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며 오직 십자가 안에서만 발견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십자가를 벗어 던지고 부활의 영광으로 나아가자고 하면서 경제의 번영과 교회와 가정의 번성을 부활의 영광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예수님께서 보여주실 표적은 요나의 표적뿐이어야 합니다.

 

노회에서 노회장이 설교하면서 예를 들었습니다. 노회장이 통영에 사는 사람입니다. 통영은 회로 유명한데 손님이 오면 회 맛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가 있기에 원하는 곳으로 인도한다고 합니다. 회 맛을 모르는 사람은 찌개다시가 많이 나오는 집을 좋아하고 회 맛을 아는 사람은 찌개다시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도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다면 찌개다시와 같은 여러 가지 교회 프로그램에 맛을 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런 비본질적인 것에 맛 들이지 말고 본질인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시는 요나의 표적인 십자가의 표적이 아니라 다른 표적을 구하는 것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이며 이들이 바로 귀신 일곱이 들어온 자와 같은 모습입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이방인보다 깨끗하다고 하지만 그러나 예수님이 그 안에 주인이 안 되어 있다면 악한 귀신 일곱이 들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서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로 계시지 않으시면 일곱 귀신 들린 자처럼 됩니다. 십자가의 본질을 놓쳐버리고 계속하여 다른 표적을 구하며 달려가게 됩니다. 마치 마약에 중독이 된 사람들이 갈수록 더 센 것을 구하는 것처럼 더 자극적인 표적을 구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요나의 이 표적이 무엇인지 고린도전서 1:18-24절을 봅니다.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