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마태복음 15:21-28 가나안 여인의 간구 2011. 4. 13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21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거기서 나가셨다고 합니다. 거기란 바로 앞의 말씀을 보면 유대인의 땅입니다. 유대인의 땅 중에 가장 중심이 예루살렘입니다. 15:1절을 보시면 예루살렘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왔습니다. 율법의 심판자처럼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호시탐탐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서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느냐며 책망합니다. 성경에는 없는 내용이지만 장로들의 유전도 성경의 권위만큼 인정하는 사람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이런 비난에 대하여 예수님은 맞받아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고 합니다. 장로들의 유전보다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것이 훨씬 더 큰 문제입니다. 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였고 또 부모를 비방하면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고 하였는데 누구든지 부모에게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말만 하면 부모에게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식으로 하는 것은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한다고 하시면서 이런 모습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라고 하였습니다. 입술로는 존경하나 마음을 멀다고 한 말씀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한다고 합니다.

 

그러시면서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시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아버지께서 심지 않은 것은 다 뽑힐 것이라고 하십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니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자기들은 깨끗하다고 하는 자들이 오히려 그 속이 더럽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그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라고 하십니다.

 

율법만이 아니라 장로들의 유전까지 지키면서 자신들이 깨끗하다고 여기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속을 아시는 주님께서 그곳을 나가셔서 두로와 시돈지역을 가셨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완전한 이방인의 지역입니다. 그곳에서 한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이 여인을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합니다. 이런 이방인 여인이 예수님께 나와서 소리 질러 이릅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깨끗하다는 유대인들 그 중에서도 깨끗하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보기에 가나안 여인은 너무나 더러운 이방여자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는 말씀입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릅니다. 일반적으로 존경하면 랍비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아주 분명한 메시아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여인이 이런 고백을 하게 된 것은 이 여인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물론 성경본문에 그런 표현은 없지만 지금 자신들이 깨끗하다고 여기는 자들은 예수님을 배척하는데 그들이 더럽다고 여기는 이방여인은 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며 나오는 이런 장치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버림 받음과 이방인의 택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인이 소리를 지르는데 그 내용은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합니다. 자기의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었기에 고쳐달라고 합니다. 여기에 대하여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여자는 계속하여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면서 따라오니 제자들이 견디다 못하여 예수님께 청합니다. 이 여자를 보내소서! 빨리 그 소원을 들어주어서 보내버리는 것이 낫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함인 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방인이기에 더욱 이런 말씀에 민감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마태복음 10:5-6절을 봅니다. “5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6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보내시면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성경에서 구원의 일차적인 대상은 유대인들입니다. 그 언약을 이루어내시기 위한 예수님의 전도모습 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거부하는 것도 또한 예언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일차적으로 유대인에게 복음이 증거 되어야 하며 그들이 배척함으로 이방인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로마서 1:16절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로마서 15:9절입니다. “8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 9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이 증거 되지만 그들이 배척함으로 이방인에게 갑니다. 이를 통하여 무엇을 보여주시는 것입니까? 로마서 11:13-20절입니다. “봉독” 유대인을 버림이 세상의 화목이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이방인의 어떻게 구원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말씀합니다. 그런데 유대인을 받아들이면 그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유대인의 가지 얼마가 꺾였는데 그 사람에 돌 감람나무인 이방인이 그들 중에 접붙임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꺾어진 그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너를 보전한다고 합니다.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꺾였다고 합니다. 믿지 않는다는 말이 무엇인지 오늘 본문에서 나오기에 이 말씀과 함께 연결하여 봅니다. 믿지 않아서 꺾였다는 말은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자기들의 행위를 믿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방인은 아무른 행위도 없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기에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고 합니다. 주의 인자에 머물지 않으면 너도 찍힌바 된다고 합니다. 주의 인자란 언약적인 사랑입니다. 긍휼입니다. 이 긍휼과 자비 안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자기의 마음이 높아져 있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율법적인 행위들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무엇으로 마음이 높아져 있습니까? 복음을 안다는 지식으로 마음이 높아지지 않았습니까? 과연 예수님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가나안 여인의 이 부르짖음이 지금도 나오고 있습니까? 물론 이 여인은 자신의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렸기에 그 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염치불구하고 예수님께 부르짖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부르짖어 그 딸이 병 고침을 받았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향하여 네 믿음이 크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다시 본문 25절을 봅니다. 여자가 와서 예수님께서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 이렇게 간구를 합니다. 방금 예수님께서 분명히 거절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 외에는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거절을 당하고서도 다시 여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자기를 도와달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어려운 부탁이 있어서 아는 사람에게 부탁을 할 때 그 사람이 거절하면 어떻게 합니까? 저의 경우는 거절하는 눈치만 보여도 취소하고 돌아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거절하심을 듣고서도 또 간구합니다.

 

26절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보는 시각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이방의 피가 섞였다고 개 같이 취급하는 유대인들입니다. 그런데 이 가나안 여인은 완전한 이방인입니다. 이 여인을 향하여 예수님은 얼마나 무시를 하십니까? 처음에는 아무리 부르짖어도 대꾸도 하지 않으시다가 겨우 대답하신 말씀이 자신을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왔다고 하십니다. 그래도 부르짖어 구하니 아예 이방인을 개라고 합니다. 우리가 무시를 당할 때 아주 심한 무시를 당하면 개 무시를 당했다고 합니다. 그런 무시를 이 여인이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어떻게 말합니까? 27절입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고백을 하는 이 여인은 자신을 무엇으로 여기고 있습니까? 개로 여깁니다. 이 대답을 들은 예수님께서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네 소원대로 되라고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았다고 합니다. 그 딸이 나은 것보다 더 부각되는 내용이 이 여인의 믿음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으로부터 네 믿음이 크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도대체 이런 믿음이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사람의 논리로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주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교회를 왜 다닙니까? 기도는 왜 합니까? 무시를 당하지 않으려고 다니지는 않습니까? 기도하는 내용들도 세상에서 무시당하는 것이 싫어서 복을 받아서 보란 듯이 살고 싶어서 기도하지는 않습니까? 인터콥 선교회 창원 팀장이 간곡하게 부탁을 해서 도대체 어떤 곳인지 한번 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책을 두 권사서 한권은 다 보았고 한권은 절반정도 보았습니다. 세대주의적인 색채가 있기는 하지만 교회가 도시화 물량화 되는 것을 비판하며 원초적인 선교의 타당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지애 총무라는 사람의 강의도 열 시간 넘게 들어보았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 내용만 전합니다. 자신이 분당에 살 때에 자신의 주변에서 전도하여 여러 사람에게 성경공부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부자로 살았는데 설경구와 송윤아가 바로 앞집에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이 사람들을 모았는데 변호사, 의사, 교수 이런 사람들이 예수 믿는다며 성경공부를 하였는데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더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을 꺾으시고 만나게 한 자들이 환난당한 자, 빚 진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남편이 있는데도 바람을 피우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을 그리스도의 신부로 부르셨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자신이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떡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개와 같은 자임을 인정하십니까? 우리가 가장 무너지지 아니하는 것이 자존심 아닙니까? 우리는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하여 기도해 보기는 하였지만 자신이 개와 같은 자라고 부르짖어 본 적이 있습니까? 처음 예수 믿을 때는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보았기에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심만 바라보았는데 지금은 어느새 바리새인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의를 의지하면서 이방인들을 깔보다가 잘렸는데 이방인이 우리가 그 잘려진 틈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자신의 처지를 모르고 교만해져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자신이 개와 같은 자라고 하면서 예수님께 도움을 구하는 이 여인을 향하여 네 믿음이 크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우리의 의지와 결단으로 대단한 일을 해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이 크다고 한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자 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등장부터 멋있게 등장합니다. 골리앗을 물리치고 단숨에 영웅이 됩니다. 자기를 죽이기 위하여 온 사울을 두 번이나 살려줍니다. 그러나 간음과 살인을 하고 나서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았을 때에 자신이 어떤 자인지 알았습니다. 죄로 잉태되고 죄로 살았음을 고백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가 상한 심령임을 알았습니다. 왕이 되어서 큰 업적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로 인하여 그리스도가 대신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것이 믿음이기에 우리의 기도가 다윗의 이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과 가나안 여인의 이 마음을 달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