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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5:10~21 어머니 왜 날 낳으셨나요? 2013. 12. 18


10 내게 재앙이로다 나의 어머니여 어머니께서 나를 온 세계에 다투는 자와 싸우는 자를 만날 자로 낳으셨도다 내가 꾸어 주지도 아니하였고 사람이 내게 꾸이지도 아니하였건마는 다 나를 저주하는도다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를 강하게 할 것이요 너에게 복을 받게 할 것이며 내가 진실로 네 원수로 재앙과 환난의 때에 네게 간구하게 하리라 12 누가 능히 철 곧 북방의 철과 놋을 꺾으리요......... 21 내가 너를 악한 자의 손에서 건지며 무서운 자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맹인 가수 이용복씨가 부른 노래의 제목이 ‘어머니 왜 나를 나셨나요?’입니다. 그 가사의 내용 일부를 옮겨봅니다. ‘바람이 휘몰던 어느 날 밤 그 어느 날 밤 떨어진 꽃잎처럼 나는 태어 났다네 내 눈에 보이던 아름다운 세상 잊을 수가 없어 가엾은 어머니 왜 나를 나셨나요....’ 중도실명자인 이용복씨의 자전적 이야기인데 아름다운 세상도 볼 수가 없고, 친구도 없고, 단 한번 사랑한 여인도 떠나고, 홀로 남아 외롭기에 어머니가 자신을 낳은 것이 한스럽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용복씨만이 아니라 삶의 고통이 가중됨으로 자신이 태어난 것을 한탄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나님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하고 있습니다.


본문 10절을 봅니다. 내게 재앙이로다! 얼마나 엄청난 재앙이면 문장 제일 앞에 나옵니다. 히브리어는 가장 강조하는 말이 문장 제일 앞에 옵니다. 어느 정도의 재앙인지 자기를 낳은 어머니를 향하여 나의 어머니여 어머니께서 나를 온 세계에 다투는 자와 싸우는 자를 만날 자로 낳았다고 항의합니다. 자신이 꾸어주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 꾸지도 않았는데 다 자신을 저주한다고 합니다. 인간관계 속에서 돈을 꾸어주고 돈을 꾸는 것으로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일도 없는데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저주하기에 예레미야 선지자는 한탄을 하면서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느냐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원망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원망입니다.


예레미야 1:4~10절입니다. “봉독”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모태에서 짓기도 전에 성별하여 선지자로 세웠다고 합니다. 예레미야의 출생은 당연히 예레미야의 자신의 뜻이나 어머니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태어나게 하셨고 선지자로 세우셨습니다. 선지자의 사역이란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는 자입니다. 이 소명이 주어지자 예레미야 선지자는 자신이 아이라서 말할 줄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곳으로 가야하고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하신 말씀을 전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예레미야의 입에 두었습니다. 그 사역이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는 일입니다.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이 일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저주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떠하기에 모든 사람들이 다 예레미야를 저주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기존의 모든 것들을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며 넘어뜨리기에 그러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서 귀한 것이라고 여기며 차곡차곡 쌓아온 것들, 그것이 물질이든 명성이든 자신의 의가 되든 간에 자신의 소유라고 여긴 것들을 무너뜨리려고 하면 당연히 저주를 합니다. 모세가 바로 왕에게 여호와의 백성을 내 보라고 하니 여호와가 누구관데 감히 내 재산을 내 놓으라고 하느냐며 거절하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바로 왕과 같은 자들입니다.


반면에 내가 가지고자 하는 것들을 더 많이 더 견고하게 쌓아가게 하는 말들은 당연히 환호하며 좋아하게 됩니다. 어제 저녁 피디수첩에서 서울 순복음교회에 대한 내용이 나왔습니다. 어느 장로가 교인들이 다들 힘들고 어렵게 장사하고 돈을 벌어 헌금을 하였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어렵게 번 돈을 왜 교회에 헌금을 했습니까? 정말 주님을 사랑하여 했습니까? 아니면 세상에서 복을 받는다고 하니 헌금을 했겠습니까? 탐심으로 교회 다닌 것이 우상 숭배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레미야 선지자는 어떻습니까?


예레미야 20:7~10절입니다. “7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8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10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이 두려워함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내 친한 벗도 다 내가 실족하기를 기다리며 그가 혹시 유혹을 받게 되면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우리들이 심고 붙들고 지키고 쌓아가고 싶어 하는 것들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설교를 한 것입니다. 누가 이런 선지자를 좋아하겠습니까? 그래서 종일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 그래서 말씀을 전하지 않으려고 하면 마음이 불붙은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말씀을 선포하면 다시 온갖 조롱과 수치와 모욕을 당하게 됩니다. 이러한 고통에 짓눌린 부르짖음이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 하는 탄식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0:14~18절입니다. “14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15 나의 아버지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당신이 득남하였다 하여 아버지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 16 그 사람은 여호와께서 무너뜨리시고 후회하지 아니하신 성읍 같이 되었더면, 그가 아침에는 부르짖는 소리, 낮에는 떠드는 소리를 듣게 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니 17 이는 그가 나를 태에서 죽이지 아니하셨으며 나의 어머니를 내 무덤이 되지 않게 하셨으며 그의 배가 부른 채로 항상 있지 않게 하신 까닭이로다 18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부끄러움으로 보내는고 하니라”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사는 것이 큰 고통이면 이런 한탄을 쏟아놓을까요? 마치 욥의 탄식과도 같습니다. 욥의 재앙은 욥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욥의 신앙에 대한 자랑에 사탄의 참소로 인하여 일어난 재앙입니다. 욥의 세 친구들이 말하는 논리적인 인과율로 해석이 안 되는 재앙입니다. 그런 재앙 중에 욥도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는 내용이 욥기 3장입니다. 그 중의 일부만 보겠습니다.


욥기 3:1~7절입니다. “1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2 욥이 입을 열어 이르되 3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 4 그 날이 캄캄하였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않으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추지 않았더라면, 5 어둠과 죽음의 그늘이 그 날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였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더라면, 흑암이 그 날을 덮었더라면, 6 그 밤이 캄캄한 어둠에 잡혔더라면, 해의 날 수와 달의 수에 들지 않았더라면, 7 그 밤에 자식을 배지 못하였더라면, 그 밤에 즐거운 소리가 나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탄식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을 봅니다.


본문 11절입니다.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느냐는 탄식에 하나님의 대답은 내가 진실로 너를 강하게 하겠고 복을 받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그 강하게 함과 복을 받는다는 것이 단지 자신의 고통이 없어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레미야의 사역은 지금의 고난당하는 모습으로 계속되어야 하기에 하나님께서 강하게 해주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네 원수들이 재앙과 환난의 때에 네게 간구하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예레미야를 공격하지만 정말 환난의 때에는 예레미야에게 기도를 요청할 것이라고 합니다. 평소에는 예레미야의 말을 듣기 싫어하여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하였지만 정작 위기에 처하면 기도를 요청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위기에 처하여 기도를 요청하여 기도응답을 받아도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응답이 아니기에 여호와의 뜻이 아니라고 하면서 예레미야가 기도하여 받은 응답을 거절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예레미야 42장에 나옵니다. 그들이 원한 내용은 애굽으로 피난 가는 것인데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항복하라고 하자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하면서 애굽으로 피난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틈바구니의 예레미야는 왜 날 낳으셨느냐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르짖음에 예레미야를 강하게 하신다고 하시면서 백성에 대한 심판을 말씀합니다.


본문 12~14절입니다. 북방의 철이란 바벨론을 두고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저주하는 백성들의 죄로 인하여 심판을 하시는데 그들의 모든 재산과 보물이 값없이 탈취를 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그들의 재산과 보물이 안전하게 지켜지고 더 많아질 것을 예언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이러한 것들이 빼앗겨 질 것이라는 예언을 하기에 아무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말씀은 여호와의 맹렬한 불이 이들을 사를 것을 말씀하십니다.


15절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오니 원하건대 주는 나를 기억하시며 돌보시사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하시고 주의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나로 멸망하지 아니하게 하옵시며 주를 위하여 내가 부끄러움 당하는 줄을 아시옵소서” 자신을 기억하고 돌보아 달라고 구하면서 자신을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하시고 자신은 주의 오래 참으심으로 멸망하지 않게 해 달라고 구합니다. 예레미야 자신도 자기의 의로 멸망하지 않는 것이 아니기에 주의 오래 참으심을 구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이렇게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은 주를 위하여 당하는 것임을 알아달라고 합니다. 주를 위하여 바르게 사역을 하는데 왜 이렇게 백성들에게 미움을 받는 것입니까?


16~18절입니다. “16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17 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 18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찌 됨이니이까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선지자가 주의 말씀을 받아먹음으로 그 마음의 기쁨과 즐거움이지만 그의 삶의 현장은 고통과 상처로 가득하다는 말씀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17~18절을 새 번역으로 봅니다. “17 저는, 웃으며 떠들어대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즐거워하지도 않습니다. 주님께서 채우신 분노를 가득 안은 채로, 주님의 손에 붙들려 외롭게 앉아 있습니다. 18 어찌하여 저의 고통은 그치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저의 상처는 낫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흐르다가도 마르고 마르다가도 흐르는 여름철의 시냇물처럼,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분이 되셨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근원적으로 듣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즐거움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괴롭히는 말씀이기에 그런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를 죽여 버리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10:10~11절입니다. "10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11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하나님의 말씀이 입에서는 꿀과 같이 달지만 배에서 쓰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어 그 말씀을 소화하여 백성들에게 전합니다. 그런데 그 말을 백성들이 싫어하기에 선지자와 사도들에게 고통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본문 19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한다면 너는 나의 입이 될 것이라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 백성들이 선지자를 얼마나 핍박을 하는지 이런 고통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자 여호와 하나님께서 헛된 것을 버리고 돌아오면 너는 나의 입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하나님을 떠나고 싶지만 주의 손에 붙잡혀 있기에 떠날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에게로 돌아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의 비위를 맞추어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20~21절입니다. “20 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너를 칠지라도 이기지 못할 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하여 건짐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1 내가 너를 악한 자의 손에서 건지며 무서운 자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백성들이 예레미야 선지자에게로 돌아와야지 예레미야 선지자가 백성에게로 돌아가면 안 된다고 합니다. 대중들의 요구에 호응하지 못하면 어떤 지도자도 물러가게 됩니다. 그래서 정치가들은 늘 입에 발린 말이 백성을 위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면 안 됩니다. 모두 다 떠나가더라도 선지자가 그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도 연약한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로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셔서 그들이 너를 이기지 못하도록 하시며 구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선포하는데 얼마나 핍박이 심한지 자신을 낳은 어머니를 부르며 자신을 왜 낳으셨느냐고 항의를 할 정도로 고통스럽습니다. 선지자가 이 정도로 탄식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그것도 예루살렘의 백성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이 싫었으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스데반 집사의 설교를 듣기 싫어하여 귀를 막고 돌로 쳐 죽여 버렸습니다. 예레미야와 스데반과 같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전한 자들입니다.


베드로전서 1:9~12절입니다.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왜 핍박을 받습니까?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결코 세상이 환영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5:18~20절입니다.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20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세상에 속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세상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세상에 속한 사람입니다. 세상도 이런 자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택함을 입은 자는 세상에서 미움을 받고 박해를 받습니다. 이것이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길이었으며 모든 믿는 자들의 길입니다. 이 길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가셨고 그를 따르는 자들도 이 길로 가야만 합니다. 이 길이 고난의 길이라서 예레미야 같은 탄식이 나올 것입니다. 이러한 탄식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한 것이라면 그 사람은 지금 이미 완성된 그 구원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싫은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살인강도 바라바 보다 더 싫어하였습니다. 빌라도가 유월절 명절에 죄수하나 특별사면 하는 것을 이용하여 예수를 풀어주려고 예수와 살인강도 바라바 사이에 누구를 풀어주기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바라바를 풀어달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의 어머니 어찌하여 나를 낳으셨나이까? 하는 탄식들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이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들이 가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하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들은 이 길로 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주 모여서 서로 격려하며 주님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며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