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32:1~15    기업 무를 권리       2014. 7. 16

6 예레미야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였느니라 이르시기를 7 보라 네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네게 와서 말하기를 너는 아나돗에 있는 내 밭을 사라 이 기업을 무를 권리가 네게 있느니라 하리라 하시더니 8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이 시위대 뜰 안 나에게 와서 이르되 청하노니 너는 베냐민 땅 아나돗에 있는 나의 밭을 사라 기업의 상속권이 네게 있고 무를 권리가 네게 있으니 너를 위하여 사라 하는지라 내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으므로 9 내 숙부의 아들 하나멜의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는데 은 십칠 세겔을 달아 주되 10 증서를 써서 봉인하고 증인을 세우고 은을 저울에 달아 주고 11 법과 규례대로 봉인하고 봉인하지 아니한 매매 증서를 내가 가지고 12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과 매매 증서에 인 친 증인 앞과 시위대 뜰에 앉아 있는 유다 모든 사람 앞에서 그 매매 증서를 마세야의 손자 네리야의 아들 바룩에게 부치며 13 그들의 앞에서 바룩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14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 증서 곧 봉인하고 봉인하지 않은 매매 증서를 가지고 토기에 담아 오랫동안 보존하게 하라 15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 

예레미야 32장은 1~44절까지 전체가 한 단락으로 연결이 됩니다. 그런데 본문이 너무 길어서 두 번에 나누어서 보려고 합니다. 예레미야 32장의 구조를 간단히 살펴보고 본문에 들어가겠습니다. 1~5절을 예레미야 선지자가 여호와의 말씀을 전함으로 인하여 시위대 뜰에 갇혀 있는 상황입니다. 이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예레미야의 사촌 하나멜의 밭을 사라고 하는 내용이 6~15절입니다. 이러한 일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묻는 내용이 16~25절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응답이 26~44절의 내용입니다. 오늘은 16절까지 봅니다. 

예레미야 32:1~2절입니다. “1 유다의 시드기야 왕 열째 해 곧 느부갓네살 열여덟째 해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2 그 때에 바벨론 군대는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의 왕의 궁중에 있는 시위대 뜰에 갇혔으니” 여호와의 말씀이 임한 시기와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갇혔음을 알려줍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임한 시기는 유다의 시드기야 왕 열째 해 곧 느부갓네살 열여덟째 해라고 합니다. 이때는 바벨론 군대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포위되어 있는 기간입니다. 바벨론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포위되어 있는 기간은 해수로 삼년에 걸쳐있지만 달수로는 18개월입니다(렘39:1~2). 바벨론에 의하여 처음 포위된 시기는 시드기야 왕 구년 열 째 달입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포위된 지 2개월은 지난 시기에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갇혔습니다. 예레미야가 감금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5절입니다. “이는 그가 예언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성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차지할 것이며 유다 왕 시드기야는 갈대아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드시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진바 되리니 입이 입을 대하여 말하고 눈이 서로 볼 것이며 그가 시드기야를 바벨론으로 끌어가리니 시드기야는 내가 돌볼 때까지 거기에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갈대아인과 싸울지라도 승리하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더니 유다 왕 시드기야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같이 예언하였느냐 하고 그를 가두었음이었더라”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을 전함으로 감옥에 갇혔다는 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가두어 버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말씀을 결코 갇히지 않습니다. 그러함에도 예레미야를 감옥에 가둔 것은 그 정도로 여호와의 말씀이 싫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하여 포위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그동안 예레미야 선지자는 끊임없이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은 바벨론이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성전이 있고 제사장이 있고 제사를 드리고 있기에 예루살렘은 여호와께서 돌보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의 말대로 바벨론이 쳐들어와서 포위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예레미야의 말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방금 읽은 3~5절의 말씀 때문입니다. 바벨론이 포위하고 있는데 항복하지 않고 싸우자고 하는 자들이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겉으로 보면 그들이 애국자이고 예레미야는 매국노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이 성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신다고 전합니다. 유대 왕 시드기야는 갈대아인의 손을 벗어나지 못하고 반드시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진바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입과 입을 대하고 눈과 눈을 대하리라는 것은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 왕과 대면하게 될 것을 말하며 동시에 바벨론에 끌려 갈 것을 여호와의 말씀으로 전합니다. 그러므로 시드기야가 네가 어찌하여 이같이 예언하였느냐고 하면서 그를 가두어 버렸습니다. 

한국에 불교가 들어오면 호국불교가 됩니다. 불교는 세상의 모든 인연을 끊어버리는 것이 해탈이라고 하는데 오히려 큰 인연인 국가를 끊어내지 못합니다.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오면 역시 호국기독교가 됩니다.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땅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교와 기독교가 누가 더 국가에 충성하는지 마치 경쟁하듯이 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그런 주장을 펼칠 때에 호응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나 지금의 한국교회 교인들이나 간에 예레미야와 같이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면 당연히 싫어하고 감옥에 가두어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종교를 가진다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신에게 정성을 바침으로 신으로부터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여 있는데 나라가 망하여야 한다고 하면 누가 이런 선지자의 말을 듣겠습니까? 그러므로 예레미야가 갇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사람들의 뜻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끌려가는 길이 망하는 길이 아니라 그 길이 바로 살길인데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하여 남은 자가 돌아와야 하는데 심판 없는 구원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종교적인 욕망입니다. 이러한 욕망을 고발하면 배척을 당합니다. 

예레미야 38장에 보면 예레미야의 말을 듣고 구덩이에 던져 넣어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나중에 에벳멜렉이 구하여 냅니다만 여호와의 말씀을 전한 예레미야 선지자를 이렇게 죽이려고 하는 것은 여호와의 말씀이 얼마나 싫으면 이렇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핍박합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복음 전하는 자를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복음을 전할 때에 바울을 죽이려는 자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죽이려 하고 이방인들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바울을 감옥에 가두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메이지 않습니다. 

디모데후서 2:8~13절입니다. “8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9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10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구약이나 신약이나 여호와의 말씀이 전하여지는 환경은 같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싫어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배척하고 감금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기에 땅 끝까지 지금도 증거 되고 있습니다.  

본문 6~15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합니다. 네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네게 와서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라고 하면서 기업 무를 권리가 네게 있다고 할 것이라는 말씀을 받았는데 그 말씀대로 사촌이 와서 베냐민 땅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말씀인줄 알고 순종합니다. 율법대로 은을 달아주고 증인을 세우고 시위대 뜰에서 모든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밭을 사서 문서를 봉인합니다. 두루마리 형태의 문서에 밭을 산 내용을 기록하여 봉인하고 한 쪽은 그 내용을 볼 수 있도록 열어둡니다. 그 증서를 바룩에게 시켜서 토기에 담아 오랫동안 보존하게 합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될 것이라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밭을 사라는 것은 기업을 무른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무엇인지 먼저 보아야 합니다. 단지 망하는 나라의 밭을 사라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가 망하는데 밭을 사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이럴 때는 오히려 밭을 팔아서 귀금속을 마련하여야 피난을 가더라도 그것이 자신을 살리는 길입니다. 2차 대전 때에 독일인들이 유대인들을 학살할 때에 유대인들 중에 살아남은 자들은 그들의 재산을 귀금속으로 바꾸어 적재적소에 사용하여 살아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라가 망하는 지경이 밭을 사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집과 밭과 포도원을 산다는 것은 우리처럼 부동산 거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밭을 사라는 것을 기업 무를 권리를 행사하라고 합니다. 기업 무를 자의 권리를 이행하라는 말씀이 무엇인지 먼저 보아야 이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레위기 25:23~28절입니다. “23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24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25 만일 네 형제가 가난하여 그의 기업 중에서 얼마를 팔았으면 그에게 가까운 기업 무를 자가 와서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무를 것이요 26 만일 그것을 무를 사람이 없고 자기가 부유하게 되어 무를 힘이 있으면 27 그 판 해를 계수하여 그 남은 값을 산 자에게 주고 자기의 소유지로 돌릴 것이니라 28 그러나 자기가 무를 힘이 없으면 그 판 것이 희년에 이르기까지 산 자의 손에 있다가 희년에 이르러 돌아올지니 그것이 곧 그의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이어지는 말씀에서 가옥의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오늘은 토지에 관한 내용만 보겠습니다. 23절에서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토지는 여호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전쟁으로 정복한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상으로 수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은 여호와의 것이기에 사사로이 남에게 팔아넘길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땅에서 거류민으로 즉 소작인으로 여호와의 땅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을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무상으로 수여받았습니다. 이것은 많이 노력하여 많이 받는 것이 아니라 지파와 가족의 수대로 공평하게 나누어 받았습니다. 이것을 여호와의 기업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고 팔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24절에서는 기업 무르기를 허락하라고 합니다. 이 말은 토지 자체를 사고파는 것이 아니라 그 경작권만 팔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면 경작권만 팔수가 있는데 이 경작권도 아무에게 파는 것이 아니라 기업 무를 권리가 있는 자들에게 팔아야 합니다. 그렇게 기업의 경작권을 판다는 것은 그 사람의 어려움을 들어주는 행위가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이 종으로 팔려가는 경우도 있기에 경작권의 매매는 친척을 통하여 이루게 함으로 그 기업을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보존하여 주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경작권을 판 사람이 형편이 허락이 되면 언제든지 무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능력이 안 되면 친척이 물려줄 수가 있습니다. 그도 안 된다면 희년에 자동으로 본인에게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희년을 기준으로 경작권의 가치를 계산하여 기업을 무르게 합니다. 

이러한 제도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이러한 제도만 제대로 유지가 된다면 이스라엘 중에서 절대적 빈곤층이 생기지를 않습니다. 대한민국의 사회 불균형의 가장 큰 문제는 부동산문제입니다. 토지나 주택이 공공재 개념이 아니라 천박한 자본주의 원리를 따라 투기의 대상이 되어 버렸기에 가난한 자는 평생 땅 한편 마련하지 못하고 죽습니다. 그런 자들은 가난의 대물림이 계속됩니다. 이러한 악을 원천 차단하는 법이 성경의 토지법입니다. 그런데 이 법을 받은 유대인들조차 이 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라가 망하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21장에서 아합 왕은 자기 왕궁 근처에 있는 나봇의 포도원이 탐이 나서 자기 소유로 사려고 하였습니다. 나봇은 조상으로 받은 유업을 사고파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신다는 말을 왕에게 합니다. 이로 인하여 아합 왕이 고민하고 있을 때에 왕의 아내 이세벨이 나봇을 모함하여 돌로 쳐 죽이고 그 포도원을 아합 왕에게 돌립니다. 포도원을 보려고 가는 아합에게 선지자 엘리야가 여호와의 말씀을 전합니다. 아합과 이세벨이 그 나봇의 포도원에서 죽을 것이며 개들이 그 피를 핥고 개들이 이세벨을 먹으리라고 한 대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기업을 악한 방법으로 차지한 자의 결말이 어떠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기업 무를 자가 권리를 제대로 이행한 보아스의 이야기가 룻기에서 나옵니다. 나오미의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땅을 물러줄 수 있지만 룻과 결혼하여 그 기업을 이어주지는 못하겠다고 하여 신 벗겨진 집이 됩니다. 이것은 모독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룻을 아내로 맞이하여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그 기업을 물러주는 자가 됩니다. 이렇게 기업 무를 자가 되는 사람을 ‘고엘’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기업을 무를 자는 땅만이 아니라 빚에서 해방시키며 씨가 없는 기업에 씨를 이어주는 자가 됩니다. 피의 복수를 대신 해 주는 자 이기도 합니다. 기업 무를 자만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 남을 수 있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이 역할을 나라가 완전히 망하는 지경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기업 무를 자의 역할을 하라고 합니다. 자신은 나라가 망한다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함으로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기업 무를 자의 권리를 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장차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기업을 무를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비록 지금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잡혀갈 지라도 기업 무를 자만 있다면 유다 백성들을 돌아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망하는 나라에서 기업 무를 자의 의무를 행하고 그것을 인봉하여 항아리에 담아 오래 보존하게 하시는 것은 여호와께서 기업 무를 자가 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본문15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이루어 내신다는 자기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록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지라도 기업 무를 자가 여호와 자신이 되셔서 그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대로 70년 만에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이스라엘 전체의 땅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부분적으로 받고 성전이 재건되었습니다. 그러면 언제 기업 무를 자의 역할을 온전히 행하시는 것입니까? 

여기서 문자적으로 볼 것인지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으로 볼 것인지로 인하여 육적 이스라엘과 영적인 이스라엘로 나누어집니다. 문자대로 보면 아직 이스라엘이라는 지리적인 땅이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대주의적인 해석을 하는 자들도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기에 제 3성전에 열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업 무를 자가 되셔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으로 이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차별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기업을 받은 자들이 되었습니다. 

하늘의 기업이란 부동산의 개념이 아닙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다가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어린 양의 피로 출애굽 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기업을 받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업을 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광야 40년간 반역한 자들입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한 짓이라고는 여호와의 언약을 반역한 일 뿐입니다. 이 내용은 다음 주에 상세하게 나옵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언약은 신실하여서 자기 백성들에게 그 기업을 주셨습니다. 그 기업을 영구히 사고팔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단지 경작권만 팔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경작권을 본인이 무를 수 없으면 친척이 기업을 무를 수가 있습니다. 그도 안 되면 희년이 되면 자동적으로 돌아오게 하였지만 이러한 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이 희년을 완성하실 분이 오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이사야 61:1~3절입니다. “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은혜의 해 곧 희년을 선포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누가복음 4:16~21절입니다.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년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셔서 하신 일이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으로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고 그러한 자들은 영원한 기업을 받은 것입니다. 

로마서 8:14~17절입니다.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영원한 상속자의 특징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습니다. 영원한 것을 영원하도록 하기 위하여 영원하지 않는 것들을 흔들어 버리십니다. 이 일을 지금도 기업 무르실 그리스도께서 열심히 일하고 계십니다. 

갈라디아서 4:1~7절입니다. “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기업 무를 자가 무엇을 하셨는지 아주 분명하여 집니다. 

구약에서 기업 무를 자의 모형이 보아스가 예레미야 같은 자들을 통하여 그림자로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기업 무를 자들은 땅의 기업을 물러 주는 모습이지만 이것이 신약에서는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아버지의 나라를 말합니다. 이 나라는 곧 아들의 나라이기에 아들을 믿는 자는 그 기업이 있습니다. 이 기업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기업 무를 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은 자가 성도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나의 영원하신 기업이 자신의 목숨보다 귀함을 알고 사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썩어질 땅의 보이는 것들이 아닌 영원한 기업을 사모하며 삽니다. 

베드로전서 1:1~4절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이러한 기업을 물러 주시기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을 더 깊이 알아 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