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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30:18~33 입을 막으라 2018. 9. 26

 

18 내가 심히 기이히 여기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19 곧 공중에 날아다니는 독수리의 자취와 반석 위로 기어 다니는 뱀의 자취와 바다로 지나다니는 배의 자취와 남자가 여자와 함께 한 자취며 20 음녀의 자취도 그러하니라 그가 먹고 그의 입을 씻음 같이 말하기를 내가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21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이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22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음식으로 배부른 것과 23 미움 받는 여자가 시집 간 것과 여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24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나니 25 곧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준비하는 개미와 26 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 사반과 27 임금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와 28 손에 잡힐 만하여도 왕궁에 있는 도마뱀이니라 29 잘 걸으며 위풍 있게 다니는 것 서넛이 있나니 30 곧 짐승 중에 가장 강하여 아무 짐승 앞에서도 물러가지 아니하는 사자와 31 사냥개와 숫염소와 및 당할 수 없는 왕이니라 32 만일 네가 미련하여 스스로 높은 체하였거나 혹 악한 일을 도모하였거든 네 손으로 입을 막으라 33 대저 젖을 저으면 엉긴 젖이 되고 코를 비틀면 피가 나는 것 같이 노를 격동하면 다툼이 남이니라

 

오늘 본문은 숫자 잠언이라고 이름 붙일 정도로 숫자로 잠언을 말합니다. 서넛으로 표현되는데 지난주에 본 15~16절을 다시 봅니다. 거머리에게 두 딸이 있는데 다오 다오 한다는 것입니다. 거머리로 족함을 모르는 네 가지로 보충설명을 합니다. 스올과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몰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지 하지 않는 불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지난주에 보았는데 추석명절을 지내면서 족함을 누렸습니까? 아니면 거머리 새끼처럼 달라고만 하였습니까? 사람마다 원하는 것이 다르기에 나의 만족이 상대의 불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족이 어디에 있습니까?

 

고린도후서 3:5~6절입니다. “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6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바울사도가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할 정도였던 사람입니다. 그럴 때에는 하나님을 위한다는 열정으로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만족을 말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족을 배운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며 영은 살리는 것입니다. 영이란 이어지는 말씀에서 새 언약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 이루신 새 언약을 그의 영으로 부어주시면 자족하게 됩니다.

 

본문 18~19절입니다. 지혜 자가 심히 기이히 여기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 서넛이 있다고 합니다. 계속하여 서넛이라고 나오기에 숫자 잠언이라고도 합니다. 기이히 여기며 깨닫지 못한 것은 독수리의 자취와 반석으로 기어 다니는 뱀의 자취와 바다로 지나다니는 배의 자치와 남자와 여자와 함께 한 자취라고 합니다. 여기서 자취란 지나간 흔적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나름대로의 길로 간 것이지만 가고나면 그 길을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남자와 여자와 함께 한 자취라는 것은 20절의 음녀와 연결하지 않으면 남자와 여자가 서로 이끌리는 그 자취를 모른다고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아직도 깨닫지 못한다고 합니다.

 

20절입니다. 서너 가지의 자취를 알 수 없는 것의 결론으로 20절을 보면 음녀의 자취가 그렇다고 보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고 입을 씻으면 무슨 음식을 먹었는지 모르는 것처럼 음녀가 바람을 피우고 나서 시치미를 떼면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DNA 검사를 하면 알 수 있습니다만 이 내용은 이스라엘에 적용을 하면 남편인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숭배하면서도 자신들은 우상숭배를 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거짓말하고 있는 인간의 실상을 보여줍니다.

 

3세기의 교부 히폴리투스의 잠언 단편을 보면 알레고리 한 주석도 많이 있습니다만 그 중에 하나는 이 땅에 교회는 세상의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는 주석은 마음에 와 닿아서 인용합니다. “바다를 항해하는 배가 지나간 흔적을 남기지 않듯이, 바다에서처럼 세상에 있는 교회도 땅의 희망을 남기지 않습니다. 교회는 천국에 생명을 맡겨 두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잠시 동안만 자신의 길을 가기 때문에, 교회가 가는 과정의 흔적을 추적할 수 없습니다.” 이런 교부들의 말대로 했다면 중세의 교회가 거대한 건물을 남기느라고 타락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고, 면죄부를 팔아가면서 남긴 흔적들은 타락한 음녀의 흔적과 다를 바 없습니다.

 

21~22절입니다.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이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종이 임금된 것, 미련한 자가 음식으로 배부른 것, 미움 받는 여자가 시집 간 것, 여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라고 합니다. 종이 임금이 되었다면 반역이 일어난 것이기에 세상을 진동시키는 일입니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가 부자가 된 것은 정직하지 못한 방법으로 살았는데 부자가 된 것이기에 세상을 진동시키며 견딜 수 없게 한 것입니다. 미움을 받는 여자, 다른 번역으로는 꺼림칙한 여자가 시집을 간 것이기에 세상이 견딜 수 없게 하는 일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여종이 주모의 자리를 빼앗아 차지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갈이 임신하자 사라를 무시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말씀을 읽으면 나와 직접적이 연관이 없다고 지나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예수님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나의 왕이시며, 나의 주인이시며, 나의 남편입니다. 그런데 나의 일상의 삶을 돌아보면 예수님이 나의 왕으로, 나의 주인으로, 나의 남편으로 대접을 하셨습니까? 말로는 주여! 주여! 라고 부르고 있지만 늘 내가 주인 되어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에 일어나는 다른 온갖 일들에 분노하면서 정작 자신이 주님을 반역하고 살아가는 것은 모르는 자들이 아닙니까? 우리가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으로 견딜 수 없게 하는 장본인임을 인식하셨다면 소망이 있습니다.

 

24~28절입니다.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다고 합니다.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준비하는 개미와 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 사반과 임금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와 손에 잡힐 만하여도 왕궁에 있는 도마뱀 이라고 합니다. 개미는 잠언 6장에서 게으른 자를 교훈하기 위하여 등장한 곤충입니다. 여름에 준비하는 것을 지혜로 본 것입니다. 사반은 다른 번역에서 오소리로 번역합니다. 바위 틈 사이에 살기에 다른 짐승들이 해할 수가 없습니다. 손에 잡힐 만 하여도 왕궁에 있는 도마뱀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지혜로 본 것입니다.

 

이러한 지혜들을 조금 알레고리하게 풀어보겠습니다. 교부들이 이런 알레 고리한 주석을 많이 하였는데 앞에서 본 대로 교회의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는 표현은 참 좋았다고 봅니다. 개미의 지혜는 미리 준비하는 지혜입니다. 오늘날 성도의 지혜는 세상의 썩어질 것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를 준비하면서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세상의 썩어질 것들은 준비하지 말라고 하여도 열심히 준비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런 삶의 십분의 일, 아니 백분의 일도 영원을 위하여 준비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이것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라는 책망을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메뚜기는 임금도 없는데 질서정연하게 나아갈 길을 압니다. 개미도 두령도 간역자도 없지만 자기의 일들을 잘 알아서 합니다. 이런 것을 생물학자는 자율성이라고 하지만 성령이 임한 자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각자의 은사를 따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을 할 것입니다. 이런 것이 다 지혜인 것입니다. 이렇게 미약한 곤충이나 짐승들의 지혜를 주신 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들은 스스로 하나님인체 착각하면서 살아가기에 이런 지혜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약한 미물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지혜를 배우라고 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6~31절입니다.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소의 입에 망에 대한 이야기를 사역자에 대한 이야기로 말하듯이, 잠언의 약하지만 지혜로운 곤충이나 짐승의 이야기는 성도의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거리끼고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되듯이 이 십자가의 복음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습이 미약한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들 안에 참된 지혜가 있습니다. 그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기에 성도들은 세상이 보기에 미약하나 지혜로운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전부이기에 스스로 강함을 추구할 이유가 없습니다.

 

본문 29~31절입니다. 잘 걸으며 위풍 있게 다니는 것 서넛이 있다고 합니다. 곧 짐승 중에 가장 강하여 아무 짐승 앞에서도 물러가지 아니하는 사자와 사냥개와 숫염소와 및 당할 수 없는 왕이라고 합니다. 바로 앞에서는 약하지만 지혜로운 것 서너 가지를 말했는데 여기는 위풍 있고 당당한 것 서너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자, 사냥개, 숫염소, 당할 수 없는 왕이라고 합니다. 여기의 짐승이나 왕의 특징은 당당하게 물러서지 않는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말씀을 보면서 성도가 비록 이 세상에서 약하고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보여도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당당함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성도가 어떤 자들인지 성경 몇 곳을 보겠습니다.

 

바울사도가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하자 가이사 황제에게 상소를 함으로 죄인이 아닌데도 죄인의 모습으로 사슬에 묶여 아그립바 왕과 베드도 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을 때에 나의 이 묶인 것 외에 당신들이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26:29).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고 풀의 꽃과 같은 짐승의 나라의 왕과 총독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나라의 왕 같은 제사장이 된 것입니다(벧전2:9).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온갖 고난을 당하지만 그러나 이러한 자들을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자들이라고 합니다(11:38). 성도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 앞에서도 비굴하지 않고 당당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본문 32절입니다. 미련하여 스스로 높은 체하였거나 악한 일을 도모하였다면 네 손으로 입을 막고 잘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그런데 스스로 높은 체하면서 사는 것이 타락한 인생의 본성입니다. 누가 스스로 높은 체 하면서 살지 않는 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아담의 타락 이후로 모든 인간들이 다 스스로 높은체하면서 사는 정도가 아니라 스스로 높은 자로 착각하면서 살아갑니다. 이러한 가장 분명한 증세가 어떻게 나옵니까? 세상만사가 내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는 길에는 추석명절이라도 길이 잘 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족이 다 모여도 내가 가장 인정받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알아주지 않으면 화가 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자신인줄 아는 사람이라면 입을 막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입을 막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33절을 공동번역으로 봅니다. 양의 젖통을 누르면 젖이 나오고 코를 치면 피가 나오듯 화를 돋우면 싸움이 터진다.” 입을 막지 않고 말하게 되면 결국 화를 돋우게 되는 것이며 그러면 싸움이 터지는 것입니다. 양의 젖통을 누르면 젖이 나오고, 코를 치면 코피가 나오듯이, 화를 돋우면 싸움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입을 닫는 것이 이럴 때에 지혜가 됩니다만 그러나 속에서 나오는 분노를 억누를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입을 닫지 않고 말하면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제목이 입을 막으라고 하였습니다만 우리가 어떻게 입을 닫을 수가 있겠습니까? 내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다고 속에 있는 것이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눌러두면 나중에 더 강한 폭발력으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할 말이 없을 때가 인생 살다가 가끔씩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자신이 정말로 옳다고 여긴 것이 너무나 분명하게 틀렸을 때에 할 말이 없게 됩니다. 때로는 장엄한 풍경 앞에서 할 말이 없어서 감탄사만 나올 때도 있습니다. 너무 엄청난 내용들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잠잠할 뿐입니다.

 

잠언 30:2~4절을 봅니다. “2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3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 4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이미 앞에서 너는 아느냐는 제목으로 이 말씀을 보았습니다만 이 질문의 결론이 본문 32절로 봅니다. 그러므로 너는 아느냐고 물으면서 여러 가지 지혜를 말한 후에 입을 막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입을 막을 때가 언제입니까?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욥이 까닭모를 고난을 당합니다. 친구들의 인과율적인 공격 앞에서 끝까지 그런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질문 앞에서 욥은 자기의 입을 가릴 뿐이라고 합니다(40:4). 이사야 6장을 보면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서 주의 영광을 뵈었기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기의 입술이 부정한 자임을 압니다. 이때 제단 숯불에 그 입술이 지져짐으로 깨끗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이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3:19).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을 육체가 없기에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로움이나 선행이나 공로를 가지고 자랑할 자는 한명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그 지혜를 찬양합니다.

 

로마서 11:33~36절입니다.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우리를 자랑하는 입이 닫히고 하나님이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인 십자가를 자랑하는 자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