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마태복음 26:36-46 아버지의 뜻대로 2011. 4. 27

 

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3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44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기도란 자기부인(自己否認)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평소에 알고 행하고 있는 기도는 자기부인이 아니라 자기긍정입니다. 내가 원하는 소원이 이러하니 이런 소원을 이루어달라고 자기보다 능력이 있다고 여기는 신이나 피조물들에게 비는 것을 기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성경에서 기도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만 인간의 자기소원을 위한 내용이 성경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성경의 계시 자체가 사람의 소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소원으로 만들어진 성경이 아니기에 사람의 소원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천지창조도 하나님의 자기 영광, 즉 아들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골로새서 1:15-17절입니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이런 사실을 누구만 알겠습니까? 교회만 압니다. 그래서 18절을 봅시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기도를 많이 하지만 과연 자기를 부인하기 위한 기도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말로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 속에 과연 자기의 사욕이 들어있지 않는가 하는 말입니다. 역대상 28:9절입니다.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의도를 아시나니 네가 만일 그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만일 네가 그를 버리면 그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의도를 아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우리가 아무리 기도를 하고 무슨 일을 하여도 그것이 자기 부인인지 자기 긍정인지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그러므로 그동안 구약에서 오늘 까지 살펴본 기도의 내용 중에 오늘 말씀이 정점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과연 기도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잘 알고 있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기도의 말미에 그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이러게 붙이면 다 되는 줄 압니다. 그러나 그나마 이렇게 마무리한다면 그것은 양호합니다. 오히려 이런 기도를 하는 것 자체가 불신앙이라고 윽박지르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믿음운동을 하는 사람들인데 그런 불신앙의 이야기 하지 말고 자신의 기도대로 자신이 믿고 말한 대로 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전혀 자기부인이 없는 모습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많은 사람들이 반발을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마음의 소원을 두고 일하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소원을 두고 일하신다는 내용이 무엇인지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자기 안에 일어나는 욕망을 마치 하나님의 뜻 인양 포장합니다. 그러면서 거룩한 야망이라고 합니다. 과연 그러합니까? 빌립보서 2:13절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새 번역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염원하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이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소원을 주시고 그 소원을 이루게 하시는 힘도 주십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봅시다.

 

오늘 말씀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갯세마네라 하는 곳에 제자들과 함께 가십니다. 갯세마네란 ‘기름통’이란 뜻입니다. 그러니 감람산의 갯세마네란 올리브 산의 기름통이 있는 곳이기에  올리브기름을 짜는 틀이 있는 곳으로 보입니다. 이런 곳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땀과 피를 쏟으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 중에 그냥 앉아있으라고 한 제자들이 있는가 하면 함께 가서 기도하게 한 제자들이 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시면서 고민하고 슬퍼하심을 말씀하십니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기도하라고 하시고 조금 더 나아가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합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고 제자들에게 와보니 제자들은 자고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달리 이 세 명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에도 올라간 제자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는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잠들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하시면서 다시 기도하러 가십니다.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하시고서 다시 제자들에게 와 보니 역시 자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깨우지도 않고 그대로 두시고 세 번째 같은 말로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이제는 확정을 얻었습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오셔서 이제는 자고 쉬라고 합니다.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린다고 하시면서 일어나라 함께 가자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다고 하십니다. 세 번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확정을 하시고서는 자기를 파는 자에게로 가까이 나아가십니다. 이 길만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길이기에 잡히시고 고난 받으시고 죽으시는 길로 가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이 일을 위하여 오셨는데 왜 십자가 앞에서 이렇게 죽도록 고민하며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이 넘어가기를 원한 것입니까? 먼저 예수님께서 자신이 가야하실 길을 아셨다는 것부터 먼저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6:21절입니다. “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의 신앙고백 후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고난 받으시고 죽임 당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0:22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 예수님께서 잔에 대하여 말씀하신 내용이 이미 십자가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고진감래(苦盡甘來)정도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잔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말씀하셨습니다. 20:28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처럼 예수님께서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뜻을 분명히 아시면서도 왜 십자가 앞에서 이렇게 죽도록 고민하며 기도하셨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도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가지고 계심으로 봅니다. 빌립보서 2:7절입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히브리서 4:15절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지셨기에 시험과 고통과 연약함을 다 아십니다. 그러므로 이런 연약한 몸으로 인하여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를 아셨기에 다른 길이 있으면 그 길을 허락하시면 좋겠다는 기도를 세 번이나 하셨습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기도하셨습니다.

 

육신의 연약함으로 수치와 고통의 십자가형을 앞에 두고 기도하셨다고 볼 수 있지만 그러나 예수님만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끊어짐의 고통을 아시는 분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이미 인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기에 하나님아버지와 단절된다는 고통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의 몸에서 발뒤꿈치의 굳은살은 칼로 베어내어도 아프지 않습니다. 그런데 입술의 아주 얇은 각질을 떼다가 피가 나고 눈물이 날 만큼 아픈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살아있는 관계가 단절되는 아픔은 살아있는 자만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과 하나님 아버지가 하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인 관계가 단절이 된다는 것은 이미 단절되어 있는 자들은 아무도 모르는 고통입니다. 예수님 혼자만 아는 고통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받던 제자들도 스승의 고통을 모릅니다. 만약 제자들 자신의 가족이 죽음의 위기에 놓였다면 철야라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고통,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아야 한다는 이 고통에 대하여서는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지만 잠에 빠질 수밖에 없는 육체의 연약함을 보입니다.

 

그러므로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때로는 인간들끼리 살신성인의 모습도 나오지만 그런 것은 사람의 뜻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기도는 이미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 들어있는 내용입니다. 주기도문 전체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 뜻을 지금 예수님께서 이루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십니다. 이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예수님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앞에서 죽도록 고민하며 기도하신 이유가 단지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스러운 것 보다 더한 고통이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 됨의 관계가 단절되는 그 고통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그 부르짖음은 이미 십자가의 고통을 당할 만큼 당하시고 부르짖는 외침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아야하느냐는 그 부르짖음조차 하나님 아버지는 외면하셔야 합니다.

 

이를 통하여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지난주일 오후 시편 101편1절에 나오는 주의 인자와 정의의 실현입니다. 인자와 공의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자리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 일을 이루어내신 예수님의 이름이 가장 높임을 받고 그 이름 앞에 모든 자가 무릎을 꿇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기도는 예수님께서 다 이루어내십니다. 그 사랑받던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대신 기도하시지 않으시면 다들 배신하여 돌아설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결과로 주의 영이 임한 성도라면 자기의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할 것입니다. 이런 기도에 대하여 스데반과 바울의 모습을 봅니다. 사도행전 7:59-60절입니다.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돌에 맞자 죽으면서 원수 갚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기도합니다. 이런 기도가 자기부인의 기도입니다.

 

로마서 9:1-3절입니다. “1-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이것은 단지 바울의 민족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실함에 대한 간구입니다. 언약을 어긴 저주를 자신이 받아 끊어지더라도 원하는 바라고 하는 것이 자기부인의 기도입니다. 이런 마음이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소원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에게도 임하도록 기도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