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37:11~38:6   이 사람을 죽이소서!    2014. 9. 17

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이 성이 반드시 바벨론의 왕의 군대의 손에 넘어가리니 그가 차지하리라 하셨다 하는지라 4 이에 그 고관들이 왕께 아뢰되 이 사람이 백성의 평안을 구하지 아니하고 재난을 구하오니 청하건대 이 사람을 죽이소서 그가 이같이 말하여 이 성에 남은 군사의 손과 모든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나이다 5 시드기야 왕이 이르되 보라 그가 너희 손 안에 있느니라 왕은 조금도 너희를 거스를 수 없느니라 하는지라 6 그들이 예레미야를 끌어다가 감옥 뜰에 있는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에 던져 넣을 때에 예레미야를 줄로 달아 내렸는데 그 구덩이에는 물이 없고 진창뿐이므로 예레미야가 진창 속에 빠졌더라 

방금 읽은 4절 말씀을 보시면 고관들이 왕에게 청하여 이 사람을 죽이라고 합니다. 죽이라고 하는 이유는 아주 분명합니다.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 있는 조국을 지키려고 목숨을 걸고 방어하는 사람들을 보고 적에게 항복하라고 합니다. 적에게 항복하면 살고 항복하지 않고 대항하면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을 죽이라고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죽어야 마땅하다고 고발당하는 이 사람이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 예레미야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선지자를 죽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살해하고자 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왜 이렇게 되는지 말씀을 봅니다. 

예레미야 37:11~15절입니다. “11 갈대아인의 군대가 바로의 군대를 두려워하여 예루살렘에서 떠나매 12 예레미야가 베냐민 땅에서 백성 가운데 분깃을 받으려고 예루살렘을 떠나 그리로 가려 하여 13 베냐민 문에 이른즉 하나냐의 손자요 셀레먀의 아들인 이리야라 이름하는 문지기의 우두머리가 선지자 예레미야를 붙잡아 이르되 네가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는도다 14 예레미야가 이르되 거짓이다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지 아니하노라 이리야가 듣지 아니하고 예레미야를 잡아 고관들에게로 끌어가매 15 고관들이 노여워하여 예레미야를 때려서 서기관 요나단의 집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 집을 옥으로 삼았음이더라”

바벨론 군대가 애굽 군대가 유다를 돕기 위하여 온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포위를 풀었습니다. 그러나 지난주에 본 말씀대로 애굽은 자기 땅으로 돌아가고 바벨론은 다시 돌아와서 이 성을 반드시 불사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속여 말하기를 갈대아인이 반드시 우리를 떠나리라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늘 자기에게 좋도록 사건과 상황을 해석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조차 자기를 좋게 하기 위하여 원 뜻을 비틀어서라도 자기에게 좋게 적용합니다. 심지어 원어 사전의 여러 가지 용례가운데 자기가 필요한 것만 당겨 와서 전거(典據)로 삼는 경우가 학자든 목사든 비일비재합니다. 이런 것이 스스로 자기를 속이는 일인데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바벨론의 포위가 잠시 풀린 사이에 예레미야가 베냐민 땅에서 백성 가운데 분깃을 받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떠나 베냐민 문에 이릅니다. 이것은 예레미야 32장에서 왕의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숙부 하나멜의 밭을 사라고 합니다. 나라가 망하는 때에 땅을 사라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보여주는 계시적인 행위가 됩니다. 그러므로 잠시 포위가 풀린 사이에 자기 지파의 땅으로 가려고 베냐민 문에 이르렀는데 그 수문장 이리야가 예레미야를 붙잡았습니다. 그 이유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러 간다고 여긴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계속 항복하라고 하였기에 당연히 그렇게 여깁니다. 예레미야가 아니라고 하여도 이리야가 예레미야를 잡아 고관에게 끌고 갑니다. 그러자 고관들이 예레미야를 때리고 요나단의 집에 가두어버립니다. 요나단의 집은 고관들이 사적인 감옥으로 사용하고 있는 곳으로 보입니다. 

16~21절입니다. “16 예레미야가 뚜껑 씌운 웅덩이에 들어간 지 여러 날 만에 17 시드기야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이끌어내고 왕궁에서 그에게 비밀히 물어 이르되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느냐 예레미야가 대답하되 있나이다 또 이르되 왕이 바벨론의 왕의 손에 넘겨지리이다 18 예레미야가 다시 시드기야 왕에게 이르되 내가 왕에게나 왕의 신하에게나 이 백성에게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 나를 옥에 가두었나이까 19 바벨론의 왕이 와서 왕과 이 땅을 치지 아니하리라고 예언한 왕의 선지자들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20 내 주 왕이여 이제 청하건대 내게 들으시며 나의 탄원을 받으사 나를 서기관 요나단의 집으로 돌려보내지 마옵소서 내가 거기에서 죽을까 두려워하나이다 21 이에 시드기야 왕이 명령하여 예레미야를 감옥 뜰에 두고 떡 만드는 자의 거리에서 매일 떡 한 개씩 그에게 주게 하매 성중에 떡이 떨어질 때까지 이르니라 예레미야가 감옥 뜰에 머무니라”

요나단의 집을 감옥으로 사용하는데 그 곳의 웅덩이에 가두고 뚜껑을 덮어버립니다. 이렇게 갇힌 지 여러 날이 지난 후에 왕이 사람을 보내어 예레미야를 왕궁으로 데리고 와서 여호와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여호와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사는 길이라고 하였지만 그것은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사에게 무엇을 묻기 위하여 올 때에 정말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서 옵니까? 아니면 자기의 뜻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다는 추인을 받기 위하여 옵니까? 거의 후자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지금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에게 온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에 있어서 타협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대답하기를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의 왕의 손에 넘겨질 것을 말합니다. 참으로 답답한 상황입니다. 

이때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시드기야 왕에게 말하기를 내가 왕에게나 왕의 신하에게나 백성에게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 나를 옥에 가두었느냐고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기를 바벨론이 쳐들어 올 것이며 바벨론에 항복하는 길이 사는 길이라고 하였는데 모든 거짓 선지자들은 바벨론이 이 땅을 차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렇게 예언한 왕의 선지자들이 이제 어디에 있느냐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탄원을 받아달라고 합니다. 요나단의 집에 돌려보내면 자신이 죽을까 두렵다고 합니다. 그러자 왕이 감옥 뜰에 있게 합니다. 이곳은 요나단의 집과 같은 사적인 감옥이 아니라 왕권이 미치는 곳이기에 함부로 죽일 수 없는 곳입니다. 

그리고 감옥 뜰에 예레미야를 두고 떡 만드는 자의 거리에서 매일 떡 한 개씩 주도록 합니다. 성중에 떡이 떨어질 때 까지 여기에 갇혀있습니다. 성중에 떡이 떨어진다는 말은 다시 바벨론이 포위하여 양식이 공급되지 못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므로 성중에 떡이 떨어질 때 까지 감옥의 뜰에 갇혀 있지만 요나단의 집에 있는 사설 옥과는 달리 여러 사람들을 접촉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감옥에 갇혀있으면서도 만나는 사람들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 말씀을 들은 백성의 관리들이 어떻게 하는지 봅니다.

38:1~3절입니다. “1 맛단의 아들 스바댜와 바스훌의 아들 그다랴와 셀레먀의 아들 유갈과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이 예레미야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는 말을 들은즉 이르기를 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 성에 머무는 자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으리라 그러나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는 자는 살리니 그는 노략물을 얻음 같이 자기의 목숨을 건지리라 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이 성이 반드시 바벨론의 왕의 군대의 손에 넘어가리니 그가 차지하리라 하셨다 하는지라” 

유다 백성이라면 어느 누구도 예레미야의 이 말에 아멘 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포위하고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 성을 지키며 적을 물리치려고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앞에서 본대로 가옥을 헐고 왕궁을 헐어서라도 적을 막아내어야 할 지경입니다(렘33:4).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적에게 항복하는 길만이 살길이라고 하면서 항복하지 않으면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말을 들은 유다의 고관들이 왕에게 이런 자를 죽이라고 요구합니다. 아마 자기들의 사설 감옥에 있었다면 죽였을지도 모릅니다. 뚜껑 씌운 구덩이에 가두어 두고 굶겨죽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왕이 은밀히 예레미야에게 물어보았을 때 예레미야의 청으로 왕의 뜰에 감금되어 있기에 자기들이 죽이기 위하여 이런 요청을 합니다. 

4~6절입니다. “4 이에 그 고관들이 왕께 아뢰되 이 사람이 백성의 평안을 구하지 아니하고 재난을 구하오니 청하건대 이 사람을 죽이소서 그가 이같이 말하여 이 성에 남은 군사의 손과 모든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나이다 5 시드기야 왕이 이르되 보라 그가 너희 손 안에 있느니라 왕은 조금도 너희를 거스를 수 없느니라 하는지라 6 그들이 예레미야를 끌어다가 감옥 뜰에 있는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에 던져 넣을 때에 예레미야를 줄로 달아내렸는데 그 구덩이에는 물이 없고 진창뿐이므로 예레미야가 진창 속에 빠졌더라”

고관들이 왕에게 요청합니다. 이 사람이 백성들의 평안을 구하지 않고 재난을 구하오니 청컨대 이 사람을 죽이라고 합니다. 예레미야가 백성들의 손에 힘이 다 빠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 요구를 왕이 거절할 수가 없습니다. 왕이란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 하는데 나라를 망하게 하는 예레미야의 편을 들 수가 없습니다. 이 요구를 왕이 거절하면 왕도 배척당할 지경입니다. 그리고 왕권도 아주 약하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들의 뜻대로 하라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맙니다. 그러자 고관들이 감옥 뜰에 있는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에 잡아넣을 때에 줄로 달아 내리는데 그곳은 물이 없고 진창뿐이므로 예레미야가 진창 속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구덩이는 물을 보관하는 웅덩이로 보이는데 물을 다 쓰고 나면 밑에는 진펄만 남아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만은 왕과 신하들과 백성들에 하나도 좋은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적을 물리쳐 주신다고 힘을 내라고 하는 말씀이 아니라 적들에게 항복하는 길만이 사는 길이라고 합니다. 만약에 적을 대항하면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을 것이라는 이 말이 어떻게 거룩하시고 전능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하실 내용이냐는 것이 모든 백성들과 거짓 선지자들의 믿음입니다. 이런 잘못된 믿음으로 인하여 계속하여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를 핍박하고 감옥에 가두고 죽이려고 합니다. 이미 앞에서도 예레미야를 죽여야 한다는 말들은 많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예레미야를 죽이라고 왕에게 요구하자 왕은 허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진창만 있는 우물에 던져 넣어 굶겨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를 이렇게 죽이려고 하였다는 것은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한 것은 하나님을 죽이려고 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반역하였는지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들이 왕과 고관들과 백성들에게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끊임없이 백성들에게 평안을 빌어주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런 자들에게 사람들은 제물을 바치면서 그들의 축복 받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내용들이 이스라엘 전체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이 얼마나 싫어하는지 창세기 19장에서 이 성이 불에 살라질 것이니 이 성을 피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롯의 말을 롯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기다가 그 성과 함께 불에 태워졌습니다. 예레미야 6:10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욕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22:21절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지 아니함이 어려서부터 습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싫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욕으로 듣게 됩니다. 이들은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을 죽이라고 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누가복음 11:47~54절입니다. “47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48 이와 같이 그들은 죽이고 너희는 무덤을 만드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49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 하였느니라 50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51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52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53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묻고 54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더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율법교사가 자기들을 모욕한다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답변하신 말씀입니다.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자기들을 모욕한다고 여겼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선지자들의 무덤을 꾸미면서 자기들이 그 때에 있었다면 선지자를 죽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면서 참된 선지자들의 무덤을 꾸미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선지자들을 죽인 후손이라고 하시면서 아벨의 피로부터 사가랴의 피 까지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 선지자들이 증거 한 예수님을 죽인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역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을 배척하고 죽여 온 역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전하게 하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전서 1:9~12절입니다.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살펴서 증거한 것이 구약입니다. 이 구약에서 그리스도가 고난 받으실 것과 영광을 미리 증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가 전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으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선지자들이 증거 한 그 분이 왔는데 어떻게 합니까? 예레미야를 왕에게 요구하여 죽이라고 한 자들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27:11~18절입니다. “11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1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13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14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15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16 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17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18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시기로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하는 줄 알기에 예수를 놓아주려고 명절에 특별사면을 하는 법을 이용하여 바라바와 예수 누구 중에 놓아주기를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바라바는 살인강도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단 한 번도 악을 행하신 적이 없습니다. 완벽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백성들에게 착한 일만 하셨습니다. 그런데 살인강도 바라바보다 예수가 더 미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죽이고 바라바를 살리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예레미야를 죽이라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입니다. 

마태복음 27:19~26절입니다. “19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20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21 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22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3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4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26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예레미야를 죽이라는 고관들의 요청과 예수님을 죽이라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모습과 그대로 겹쳐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선지자들이 죽임을 당한 것은 결국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을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사도행전 2:33~36절입니다. “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34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35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성령이 임한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내용입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선포 앞에 어찌할꼬! 하면서 회개가 일어나는 자들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사도행전 7:51~53절입니다.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52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스데반 집사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증거 한 내용입니다.  베드로와 같은 설교입니다. 그런데 반응은 마음에 찔려 이를 갈면서 돌을 던져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복음을 들으면 이 둘 중의 한 가지 반응이 나오게 됩니다. 하나는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과 욕으로 여기는 자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잘라서 불에 태운자임을 알게 됩니다. 내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임을 정말로 알게 됩니다. 이러한 자들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하나의 반응은 이러한 복음을 배척합니다. 오늘날은 돌로 던져 죽일 수는 없으니 어떤 식으로 배척하는가 하면 복음의 내용을 지적유희로 삼게 됩니다. 

전에 복음을 듣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자기 취향대로 듣는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말씀 앞에 자신이 어떠한 죄인인지를 알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누가 더 복음을 잘 전하는가 하면서 이리 저리 저울질하면서 비교평가 하는 관중이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굵기와 길이는 의미 없습니다. 그 손가락이 제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키면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십자가로 마음이 가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손가락이 더 멋있느냐고 한다면 우리들에 의하여 오늘도 말씀은 배척을 받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이 사람을 죽이소서!’ 라는 그 무리 속에 우리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소서!’ 라는 그 무리 속에 우리가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 사람을 죽이라는 그 무리 속에 들어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직 어떤 죄인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람의 혈과 육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주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주의 영이 임하시면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알게 됩니다. 이런 자들만이 자신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임을 알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