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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52:17~34 머리를 들어 주었고 2015. 5. 13

 

31 유다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삼십칠 년 곧 바벨론의 에윌므로닥 왕의 즉위 원년 열두째 달 스물다섯째 날 그가 유다의 여호야긴 왕의 머리를 들어 주었고 감옥에서 풀어 주었더라 32 그에게 친절하게 말하고 그의 자리를 그와 함께 바벨론에 있는 왕들의 자리보다 높이고 33 그 죄수의 의복을 갈아 입혔고 그의 평생 동안 항상 왕의 앞에서 먹게 하였으며 34 그가 날마다 쓸 것을 바벨론의 왕에게서 받는 정량이 있었고 죽는 날까지 곧 종신토록 받았더라

 

2013320일에 예레미야를 시작하여 오늘로 만 22개월 동안 설교 했습니다. 오늘이 예레미야서 마지막 설교가 됩니다. 그동안 설교한 내용들이 기억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의 양식이기에 드시고 소화되면 됩니다. 말씀을 줄줄 외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이 우리의 삶에 녹아들어서 그 말씀에 이끌리는 삶이 중요합니다. 말씀이 우리의 살과 피가 되는 것이 새 언약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들에 마음이 흔들리고 요동을 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세전에 택한 자기 백성들은 하나도 놓치지 않으시고 다 찾아내십니다. 그런데 그 찾아내시는 방법이 예레미야 1:10절에서 보신 것처럼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뜨린 후에 건설하며 심는 방식입니다. 예레미야의 사역이 열방을 이렇게 하는 사역이지만 열방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나라도 그렇게 하십니다.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 각자에게도 하나님은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뜨린 후에 건설하며 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생각합니다. 우리 안에서 뽑혀 나가야 할 것들을 심고자 합니다. 심어져야 할 것들을 뽑아내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이 이스라엘이며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언약에 신실하셔서 말씀대로 완전히 무너뜨리신 후에 세워지는 자들이 언약의 백성들입니다.

 

본문 17~23절입니다. “17 갈대아 사람은 또 여호와의 성전의 두 놋 기둥과 받침들과 여호와의 성전의 놋대야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갔고 18 가마들과 부삽들과 부집게들과 주발들과 숟가락들과 섬길 때에 쓰는 모든 놋그릇을 다 가져갔고 19 사령관은 잔들과 화로들과 주발들과 솥들과 촛대들과 숟가락들과 바리들 곧 금으로 만든 물건의 금과 은으로 만든 물건의 은을 가져갔더라 20 솔로몬 왕이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 만든 두 기둥과 한 바다와 그 받침 아래에 있는 열두 놋 소 곧 이 모든 기구의 놋 무게는 헤아릴 수 없었더라 21 그 기둥은 한 기둥의 높이가 십팔 규빗이요 그 둘레는 십이 규빗이며 그 속이 비었고 그 두께는 네 손가락 두께이며 22 기둥 위에 놋 머리가 있어 그 높이가 다섯 규빗이요 머리 사면으로 돌아가며 꾸민 망사와 석류가 다 놋이며 또 다른 기둥에도 이런 모든 것과 석류가 있었더라 23 그 사면에 있는 석류는 아흔여섯 개요 그 기둥에 둘린 그물 위에 있는 석류는 도합이 백 개이었더라

 

다윗이 준비하고 솔로몬이 건축한 여호와의 성전의 중요한 기구들이 다 바벨론에 약탈당합니다. 성전의 두 기둥과 성전의 온갖 기구들을 다 가져갔습니다. 놋으로 된 것만이 아니라 금과 은으로 만든 기구들까지 다 가져갔습니다. 놋으로 만든 기구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놋의 무게를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합니다. 특히 성전 입구의 두 놋 기둥은 아주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성전의 기구들이 약탈을 당한 것은 여호와의 이름이 함께 능욕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성전이 파괴되고 기구들이 약탈되도록 하시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상을 섬기면 그렇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나서 곧 온갖 우상숭배를 하다가 죽는 장면을 지난주일 오후 열왕기상 11장을 통하여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울 자의 규례를 신명기에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마병과 병거를 많이 두지 말고 아내를 많이 두지 말고 은금을 많이 두지 말라고 하셨지만 솔로몬은 정 반대로 나갔습니다. 그런 것은 결코 나라를 강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으로 나라가 강하게 된다는 생각은 이방의 왕이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솔로몬이 그렇게 함으로 솔로몬 사후에 나라가 남북으로 나누어지고 결국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남 유다는 바벨론에 멸망합니다. 성전의 기구들과 왕궁의 보물들도 다 약탈을 당합니다.

 

이사야 39:1~6절입니다. “1 그 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 들었다가 나았다 함을 듣고 히스기야에게 글과 예물을 보낸지라 2 히스기야가 사자들로 말미암아 기뻐하여 그들에게 보물 창고 곧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에 있는 것을 다 보여 주었으니 히스기야가 궁중의 소유와 전 국내의 소유를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는지라 3 이에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에게 나아와 묻되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 왕에게 왔나이까 하니 히스기야가 이르되 그들이 원방 곧 바벨론에서 내게 왔나이다 하니라 4 이사야가 이르되 그들이 왕의 궁전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하니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그들이 내 궁전에 있는 것을 다 보았나이다 내 창고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아니한 보물이 하나도 없나이다 하니라 5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왕은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6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히스기야 왕이 죽을병에 걸렸다가 기도하여 15년 생명연장을 받습니다. 병이 낫고 났을 때에 바벨론의 사절단이 왔습니다. 그러자 히스기야 왕이 왕궁의 모든 보물과 무기고까지 다 보여줍니다. 이것은 자신의 힘을 자랑한 것이 되기도 하지만 바벨론과 동맹을 맺을 만큼 우리도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고방식도 역시 이방인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러한 보물이나 무기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런 것들을 바벨론 사절단에 보임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이 모든 보물이 하나도 남김 없이 다 바벨론에 옮겨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대로 성전의 기구들마저 몽땅 바벨론에 옮겨지게 됩니다. 여호와의 성전이라도 여호와께서 던져 버리신다고 하셨습니다.

 

열왕기상 9:6~9절입니다. “6 만일 너희나 너희의 자손이 아주 돌아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경배하면 7 내가 이스라엘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성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속담거리와 이야기 거리가 될 것이며 8 이 성전이 높을지라도 지나가는 자마다 놀라며 비웃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성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 대답하기를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따라가서 그를 경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여호와의 이 말씀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언약을 배반하고 다른 신을 따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성전마저 파괴당하고 그 기구들이 바벨론에 옮겨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땅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이며 성전인데 오늘날도 성전을 짓는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멋진 성전을 지어 바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나도 잘되고 우리의 후손도 잘되고 나라도 잘된다고 합니다. 성전을 짓는 것만이 아니라 선교나 구제를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하면서 독려를 합니다. 물론 건물도 필요하면 지을 수도 있습니다. 선교나 구제도 할 수 있으면 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일을 하는 조건으로 복을 받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모습이 다른 신을 따르는 것입니다. 다른 신을 따르다가 예루살렘의 성전이 파괴되고 왕궁의 보물들이 다 약탈되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본문 24~27절입니다. “24 사령관이 대제사장 스라야와 부제사장 스바냐와 성전 문지기 세 사람을 사로잡고 25 또 성 안에서 사람을 사로잡았으니 곧 군사를 거느린 지휘관 한 사람과 또 성중에서 만난 왕의 내시 칠 명과 군인을 감독하는 군 지휘관의 서기관 하나와 성 안에서 만난 평민 육십 명이라 26 사령관 느부사라단은 그들을 사로잡아 리블라에 있는 바벨론의 왕에게 나아가매 27 바벨론의 왕이 하맛 땅 리블라에서 다 쳐 죽였더라 이와 같이 유다가 사로잡혀 본국에서 떠났더라종교 지도자와 군대 지휘관과 궁중의 내시까지 사로잡혀 리블라에 있는 바벨론 왕에게까지 갔습니다. 바벨론 왕이 이들을 다 쳐 죽입니다. 물론 모든 포로가 다 죽임 당한 것은 아닙니다. 포로로 잡혀간 자들은 다음에 나옵니다만 이로 인하여 유다가 사로잡혀 본국에서 떠나게 되었습니다.

 

본문 28~30절입니다. “28 느부갓네살이 사로잡아 간 백성은 이러하니라 제 칠년에 유다인이 삼천이십삼 명이요 29 느부갓네살의 열여덟째 해에 예루살렘에서 사로잡아 간 자가 팔백삼십이 명이요 30 느부갓네살의 제 이십삼년에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사로잡아간 유다 사람이 칠백사십오 명이니 그 총수가 사천육백 명이더라

 

1, 2, 3차에 걸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 사천육백명입니다. 느부갓네살 즉위 7년부터 23년까지 약 16년간 3차에 걸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큰 전쟁이 세 번이나 일어나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상황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말씀을 우리가 읽을 때에는 별 느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때 징용에 끌려가거나 정신대에 끌려간 사람들이나 한국전쟁 때에 피난을 해 본 사람들은 생생하게 읽혀질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3차에 걸쳐 포로로 잡혀가게 된 것은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바닥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로 하여금 열방을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며 넘어뜨리라는 말씀은 열방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그 목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열방을 도구로 사용합니다. 열방의 흥망성쇠(興亡盛衰)가 그들 나라의 정책이나 모사들이 좋아서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앗수르가 강하게 되어 북이스라엘을 망하게 하는 것이나 바벨론이 강하게 되어 유다를 망하게 하는 것이 다 여호와의 일하심으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모든 것들이 다 주님의 말씀에 의하여 움직입니다. 말씀을 떠나서 독자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본문 31~34절입니다. “31 유다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삼십칠 년 곧 바벨론의 에윌므로닥 왕의 즉위 원년 열두째 달 스물다섯째 날 그가 유다의 여호야긴 왕의 머리를 들어 주었고 감옥에서 풀어 주었더라 32 그에게 친절하게 말하고 그의 자리를 그와 함께 바벨론에 있는 왕들의 자리보다 높이고 33 그 죄수의 의복을 갈아 입혔고 그의 평생 동안 항상 왕의 앞에서 먹게 하였으며 34 그가 날마다 쓸 것을 바벨론의 왕에게서 받는 정량이 있었고 죽는 날까지 곧 종신토록 받았더라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37년이 되었습니다.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죽고 그 아들 에윌므로닥이 왕이 된 첫해 1225일에 유다의 여호야긴 왕의 머리를 들어 주었습니다. 왕의 머리를 들어주었다는 것은 감옥에서 풀어주고 그의 자리를 그와 함께 바벨론에 있는 왕들의 자리보다 높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죄수의 의복을 갈아 입혔고 일평생 왕의 앞에서 먹게 하였고 죽는 날까지 종신토록 여호야긴이 왕의 호의를 받았습니다. 포로로 잡아온 왕을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에윌므로닥은 이렇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방의 왕도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움직이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야긴은 18세에 왕이 됩니다. 바벨론 왕이 쳐들어와서 포위하였을 때에 여호야긴은 항복합니다. 왕이 된지 3개월 만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37년 동안 감옥에 있었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 다른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서 죽지도 못하고 37년을 감옥에 있었습니다. 이 보다 더 낮아질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왕이 여호야긴을 사로잡아 가면서 시드기야를 왕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다가 자기 눈 앞에서 아들들이 죽임을 당하고 나서 두 눈이 뽑힌 채로 바벨론에 끌려와서 죽습니다. 그런데 여호야긴은 그 머리가 들려집니다. 그 이유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대로 바벨론에 항복한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해 볼 때 한 나라의 왕이 자기 살기 위하여 강대국의 도움을 구하거나 항복이라도 해서 목숨을 연명하는 것이 죽음보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어느 정도로 낮아져야 한 나라의 왕이 다른 나라의 왕에게 항복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여호야긴은 어떻게 되었든지 바벨론 왕에게 항복하고 포로로 잡혀 와서 무려 37년 만에 그 머리가 들려진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어떻게 이루어 내실 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완전히 나라가 망하고 왕이 포로로 잡혀가서 감옥에 가 있어도 하나님은 언약을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여호야긴 왕의 머리가 들린 것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70년의 때가 차면 다시 돌아올 것을 여호야긴의 머리가 들려짐으로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바벨론 왕의 역할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나중에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때에 고레스 왕을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44:28). 이방 나라의 왕을 하나님의 목자로 사용하셔서 자기 언약 백성들을 돌이켜 주십니다.

 

돌이켜 주시기 전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완전히 바닥까지 낮추십니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그 바닥에서 자기보다 더 낮아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을 죄로 삼으시고 죄인들에게서 온갖 수치와 모욕과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분이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인이면서 조금만 억울해도 이웃과 하나님을 원망하기에 바쁩니다. 아직도 마음이 낮추어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더 굴욕적이고 더 참담한 자리에 가야 합니다. 요셉은 죄가 없이 억울하게 감옥에 갔습니다. 여호야긴은 죄로 인하여 포로로 잡혀서 감옥에 갔습니다. 요셉은 죄 없이 고난당하는 그리스도의 표상이라면 여호야긴은 죄로 인하여 고생하는 인생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 다 말씀의 연단입니다.

 

시편 105:16~20절입니다. “16 그가 또 그 땅에 기근이 들게 하사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17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8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19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20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석방함이여 뭇 백성의 통치자가 그를 자유롭게 하였도다요셉의 연단도 여호와의 말씀이 응하기 까지 연단입니다. 하물며 죄인들이야 더욱 연단 받아 마땅합니다. 그 연단을 통하여 고개를 들어주십니다.

 

빌립보서 2:5~11절입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백성은 이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자기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반드시 이 말씀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과정이 우리를 낮추시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낮추어져야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겠습니까? 어느 정도로 낮추어져야 십자가 지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겠습니까?

 

근원적인 죄란 하나님처럼 높아지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낮추십니다. 때로는 37년을 감옥살이 시키실 수 있습니다. 쇠창살의 감옥 만이 아니라 삶의 여러 가지 정황에서 감옥과 같은 세월을 보내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말씀으로 연단시키셔서 마음을 낮추게 하십니다. 그렇게 낮아진 마음 가난한 마음으로 자신과 세상을 다시 보게 됩니다. 그러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자기보다 더 낮은 자리, 그 저주 받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다 이루심이 보이게 됩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통한 구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