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설교 바로듣기]  [음성설교 다운받기]

 

잠언 14:23~35 죽음에 있는 소망 2017. 8. 16

 

23 모든 수고에는 이익이 있어도 입술의 말은 궁핍을 이룰 뿐이니라 24 지혜로운 자의 재물은 그의 면류관이요 미련한 자의 소유는 다만 미련한 것이니라 25 진실한 증인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여도 거짓말을 뱉는 사람은 속이느니라 26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 2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28 백성이 많은 것은 왕의 영광이요 백성이 적은 것은 주권자의 패망이니라 29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30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 31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 32 악인은 그의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 33 지혜는 명철한 자의 마음에 머물거니와 미련한 자의 속에 있는 것은 나타나느니라 34 공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 35 슬기롭게 행하는 신하는 왕에게 은총을 입고 욕을 끼치는 신하는 그의 진노를 당하느니라

 

조각가나 영화를 찍는 사람들은 잘 잘라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을 합니다. 설교도 어떤 면에서는 그렇다고 봅니다. 필요 없는 것들을 잘 잘라내어야 하는데 갈수록 시간이 길어지는 것은 군더더기가 더 붙는다는 느낌이 들어서 되도록 많이 잘라내려고 합니다. 잠언은 많은 주제가 있어서 간략하게 할 수가 없지만 어떤 구절은 한 말씀만 드리고 넘어가야 하는 구절도 있을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된 말씀은 생략도 하겠습니다. 오늘은 32절의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다는 말씀을 중심으로 보겠습니다.

 

본문 23절입니다. 모든 수고에는 이익이 있어도 입술의 말은 궁핍을 이룰 뿐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세상의 일반적인 교훈으로만 보면 부지런하게 일하여야지 말로만 하고 게으르지 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전체에서 보면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수고를 통하여 이익을 얻는 것이 정당합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아담에게 이마에 땀을 흘려야 살아갈 것이라고 하여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수고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수고가 얼마나 힘이 드는지 창세기 5장에서 라멕이 아들을 낳고서는 노아라고 짓습니다. 우리에게 안위 곧 안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안식을 얻는 것이 물로 심판을 당하는 현장에서 방주를 만들고 그 방주에 타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이 없다면 그것은 말로만 믿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하여도 이 땅에서는 수고로움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편 90편은 우리의 일평생이 하나님의 진노 중에 지나가기에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말로만 믿는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라는 것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가 나오는 것입니다(살전 1:3). 이러한 믿음의 내용이 없이 거저 말로만 하는 것은 믿음의 궁핍함에 이르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5장에서는 젊은 과부가 믿음을 배신하게 되면 게으름을 익혀 집집으로 돌아다니며 게으를 뿐 아니라 쓸데없는 말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에 수고해야 할지 알아야 합니다.

 

24절입니다. 지혜로운 자의 재물은 그의 면류관이요 미련한 자의 소유는 다만 미련한 것이라고 합니다. 지혜로운 자의 재물과 대비되는 단어가 미련한 자의 소유와 대비됩니다만 히브리어는 소유라는 단어가 아니라 그냥 미련한 것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지혜로운 자의 재물은 그 지혜가 그의 면류관이 된다고 보는 것이 다음 구절과 대조되는 표현이 됩니다. 지혜로운 자가 지혜가 그의 면류관이 되듯이 미련한 자는 그의 미련함이 그의 면류관이 되는 것입니다. 잠언의 지혜라는 것은 곧 여호와 경외이며 생명으로 연결이 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지혜자의 면류관은 생명이지만 어리석은 자의 면류관이란 멸망이 됩니다.

 

25절입니다. 진실한 증인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여도 거짓말을 뱉는 사람은 속입니다. 세상에서도 진실한 증인은 사람의 생명을 구합니다. 그런데 거짓 증인은 사람을 속임으로 그 사람을 죽일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참되고 진실한 증인들의 특징은 한 결 같이 고난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속이는 거짓 증인들은 환영을 받고 대접을 받았습니다. 진실한 증인이 고난 가운데 증거 하는 내용이 생명의 증거가 되지만 사람들은 이미 이 세상의 신에 속아 있기에 그 증거를 받는 자가 없습니다. 그 길로 가면 죽을 것 같기에 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만 진실한 증언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자들은 오늘도 거짓으로 속이는 증거에 몰려가게 됩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의 안에 있는 탐심으로 인한 것입니다.

 

26~27절입니다. 두 절이 다 여호와 경외를 말씀합니다. 26절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27절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견고하고 영원한 피난처가 있으며 이들에게는 사망에서 벗어나 생명의 샘에서 살게 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것은 죽고 나서 경험하는 내용이 아니라 바로 이 곳에서 그 생명을 맛보며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미 영원한 피난처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며 생명의 샘을 마시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시편 90:1~2절입니다. “1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여호와께서 거처가 되시는데 그 거처는 이미 창세전에 완성된 영원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님이 우리의 거처가 되시는 자들이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이 창조세계를 만드신 것은 그 영원에 참여시킬 자들을 만들어내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다서 24~25절에서는 이러한 영원한 약속을 능히 이루실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까지 찬송과 영광을 돌린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들에게 주님은 견고한 피난처와 생명의 나무가 되십니다.

 

28절입니다. 백성이 많은 것은 왕의 영광이요 백성이 적은 것은 주권자의 패망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만 보면 오늘날에는 중국과 인도가 영광스러운 나라가 된다는 말로 보입니다. 국민이 세계에서 제일 많은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국과 인도를 누가 영광스러운 나라와 지도자로 보는 자는 그 나라 백성들 외에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중국과 인도가 국경문제로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위기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지 백성의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왕이나 백성의 의로움이 나타나야 합니다.

 

33~35절입니다. 33절에서 지혜는 명철한 자의 마음에 머물거니와 미련한 자의 속에 있는 것은 나타난다고 합니다. 단지 백성만 많은 것이 아니라 지혜와 명철이 마음에 머무는 백성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미련한 것이 가득하면 그런 나라는 영광의 나라가 되지 못합니다. 34절에서 공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라의 백성만 많다고 영광스러운 나라가 아니라 공의로운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35절에서는 슬기롭게 행하는 신하는 왕에게 은총을 입고 욕을 끼치는 신하는 그의 진노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나라는 보이는 힘으로 다스리는 나라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공의의 나라일 뿐 아니라 사랑과 섬김의 나라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연결하여 살펴보면 단지 백성이 많은 것이 지혜롭고 슬기로운 백성이 많은 것이 진짜 왕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볼 때마다 신학교 교수님 한분이 생각이 납니다. 이 분은 성경을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20대부터 하루에 4시간씩 꼭 성경을 정독하였다고 합니다. 성경 어느 구절을 읽으면 몇 장 까지는 다 나오는 분이라서 별명을 뇌리성경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자기 교회 부교역자가 주일학교 운영을 잘해서 학생 수가 많아진 것을 이 말씀으로 인용하여 설교하는 것을 보고 성경을 저렇게 많이 읽어도 복음적일 수는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 제가 담당하는 주일학교 숫자가 적어서 그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교회에서 견학을 오는 교회였습니다. 이런 말씀을 문자대로 적용하여 교인의 수가 많으면 영광인줄 알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인을 많이 모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적은 무리여 두려워말라고 하시며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12:32).

 

29절입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한데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왜 분노합니까? 성경에서 최초로 분노가 일어난 자가 가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아주시고 자신의 제사는 받아 주지 않으니 안색이 변한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가인에게 경고하셨습니다. 죄가 너의 문 앞에 도사리고 있으니 너는 죄를 다스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그 죄를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결국 그 분노는 동생 아벨을 살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조금한 자는 어리석다고 하는 말씀은 가인과 같은 분노가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정당하다고 여기기에 분노하며 이 분노가 의인을 살해하게 됩니다.

 

30절을 봅니다.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한다고 합니다. 평온한 마음이란 노하기를 급히 하는 자와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 된다고 합니다. 평온한 마음이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의 서신들도 인사말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은혜와 평강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자라면 그 마음에도 평강이 있는 것입니다. 그 은혜와 평강이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받은 자는 자신이 어떠한 죄인인지도 알게 됩니다. 나 같은 죄인에게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된 것을 아는 자들이 믿음의 사람들입니다(벧후3:15). 그런데 이런 평강이 없으면 분노가 급하게 하게 되며 시기심도 많이 일어납니다. 그로 인하여 뼈가 썩는다고 합니다.

 

잠언 16:32절을 봅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런 말씀을 알고 있지만 화가 나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바울사도는 에베소서 4:26~2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분을 낼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지만 그 분을 해가 지도록 품고 있으면 마귀에게 틈을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분노를 품고 있다는 말은 자기의 옳음은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기 의로 인한 분노가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죄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분노할 수밖에 없지만 그런 분노가 나왔을 때는 내가 예수님을 살해한 자로 인식이 된다면 분노가 식을 것입니다.

 

31절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라고합니다. 지난주에 본 말씀이라서 그대로 넘어갑니다.

 

32절입니다. 오늘 중심적으로 살펴보려고 하는 말씀입니다. 잠언의 전형적인 악인과 의인의 대비입니다. 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려집니다. 그러나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악인과 의인을 역시 성경의 전체적인 의미에서 살펴봐야 합니다. 성경에서 악인이란 무엇입니까? 예레미야 선지자가 말한 두 가지 악이라는 것이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물을 저축하지 못할 터진 웅덩이라는 판 것이라고 합니다(2:13). 그런데 이런 악인이 세상에서는 잘 먹고 잘 삽니다. 오히려 이런 악인이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형통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악인은 그것 자체가 악이기에 결국 멸망할 것입니다.

 

그러면 의인은 성경에서 어떤 사람입니까?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도 악인들처럼 자신의 웅덩이를 파서 물을 저축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저축한 물을 우리가 마셔서 해갈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제 학생회 수련회를 하면서 부자와 나사로에 대한 말씀을 보았습니다. 학생들에게 성경을 읽게 하고 그 내용과 느낀 점을 말해보라고 하였습니다. 죽으면 더 이상 기회가 없다. 그러므로 살아 있을 때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말들이 나왔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거지로 살았고 온 몸에 헌데를 앓아서 개들이 핥았습니다. 누가 봐도 나사로는 저주 받은 자로 보입니다. 그런데 부자는 이름이 없지만 거지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름이 있다는 말은 주인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름이 있는 나사로의 뜻이 히브리어로는엘르아자르입니다. 헬라어로 표기하니 나사로라고 합니다만 이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도우신다. 또는 하나님이 도우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시는 나사로는 이 세상에서 죽은 자와 진배없는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나은 비참한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부자도 죽고 나사라도 죽었습니다. 죽고 나니 부자는 물이 없는 불구덩이이며 나사로는 생명수가 있는 아브라함 품입니다.

 

오늘 본문 32절을 다시 봅니다. 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려진다고 하는 것은 궁극적인 환난에서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영원한 피난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상에서 삶의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서 성도로 부름을 받은 사람은 죽음의 모습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그 죽음이란 단지 목숨 끊어지는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웅덩이를 파서 살아남고자 한 그런 모습들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에 대하여 무너지는 것만이 아닙니다. 자기의 의를 차곡차곡 쌓아가려고 한 것도 무너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정말 죽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의 모습 안에 참된 소망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1:6~10절입니다. “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1절부터 보면 하나님의 뜻으로 사도 된 이 복음을 전하는데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사형 선고를 받은 자처럼 보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무슨 저주를 받아서 저런 모습일까 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 합니다. 사도들도 틈만 나면 자기를 의지하려고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숨 쉴 틈만 생기면 자기를 의지하려고 합니다. 자기의 세상적인 재산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했다는 자기 행위를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면 이런 것들을 의지하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환난이며 고난입니다. 그래서 살 소망까지 끊어지게 하실 때에 사람들이 보면 우리가 죽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죽음에 넘겨지는 모습이지만 그 안에 소망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1~4절입니다. “1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3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사도들이 전하는 이런 복음은 사람들이 환영을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의 신이 그 복음의 광채를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타난 그 영광의 복음이 유대인의 시각으로 보면 저주 받아 죽었기에 거리끼는 모습입니다. 이방인이 보면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도 저주 받은 자의 모습으로 갑니다. 누가 이들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일 수가 있겠습니까? 이 세상의 신이 이러한 복음을 가리고 있어서 오늘날 말은 복음이라고 하지만 다른 복음이 전하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에게는 바른 복음이 들리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인 것입니다.

 

이어지는 5~7절입니다. “5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태초에 빛을 있으라고 하신 그 창조의 원리대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어둠에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어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비추어지면 내가 죽은 자임을 알게 됩니다.

 

이어지는 7~15절입니다.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13 기록된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15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복음의 광채기 비추어지면 자신이 질그릇임을 알게 됩니다. 이런 질그릇 안에 보배가 담긴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질그릇을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옛 사람이 끊임없이 겉 사람을 포장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안의 보배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보배가 담긴 자들은 예수의 죽음을 짊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자들이 살아있는 자가 됩니다. 그런데 세상의 사람들이 보면 죽은 자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날마다 죽음에 넘겨집니다. 그래서 사도는 날마다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날마다 죽는 모습이지만 그 안에 진짜 소망, 진짜 보배가 담겨진 자들입니다.

 

이어지는 16~18절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오늘 본문 잠언 14:32악인은 그 환난에서 엎드려지나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다는 말씀을 중점적으로 보려고 이렇게 신약까지 연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사실 부분적으로만 본 내용입니다. 십자가의 그 신비와 역설이 사도들을 통하여 어떻게 증거 되는지를 성경은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위하여 열심히 헌신충성봉사를 하면 이 세상에서도 잘 되고 천국에서도 많이 상을 받는 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세상이 볼 때에 참으로 죽는 모습으로 보이지만 그 안에 참된 소망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복음이 증거 되는 모습입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하여 집니다. 그러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우리 안의 속사람이 새로워지는 것을 보지 못하면 겉 사람의 후패와 낡아짐을 한탄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속사람이 있는 사람은 한탄이 아니라 반갑게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보이는 것은 잠깐이며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의 어떠함에 주눅 들지 마시고 우리 안에 있는 그 보배,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믿음의 경주를 하도록 오늘도 주의 성령은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