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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17:10~19 무엇이 미련함인가? 2017. 11. 1

 

10 한 마디 말로 총명한 자에게 충고하는 것이 매 백 대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히느니라 11 악한 자는 반역만 힘쓰나니 그러므로 그에게 잔인한 사자가 보냄을 받으리라 12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 것이니라

 

잠언서는 지혜를 가장 많이 말합니다. 지혜와 동의어로 사용되는 명철 지식 슬기와 같은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이러한 지혜를 설명하기 위하여 반대어로 사용되는 단어가 미련함과 어리석음과 같은 단어들입니다. 이미 미련함에 대하여서는 잠언 14장에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또 미련함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미련함에 대하여 많이 나옵니다. 한글성경 전체에서 미련이라는 단어가 백번 나옵니다. 세상살이에서도 미련하지 말라는 말들을 무수히 하지만 세상에서 똑똑한 것이 성경에서는 미련하고 어리석음이 된다는 말씀이 오늘 설교의 중심입니다.

 

본문 10절을 봅니다. 한 마디 말로 총명한 자에게 충고하는 것이 매 백 대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힌다고 합니다. 총명한 자인지 미련한 자인지 무엇으로 구별이 됩니까? 한 마디 말로 충고하는데도 그 마음에 박히는 자라면 총명한 자이지만, 매 백대로 때려도 한 마디 말이 그에게 박히지 않는 자가 미련한 자입니다. 이것은 단지 세상의 옳은 교훈 한마디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박히느냐 아니냐의 문제입니다.

 

다윗이 간음하고 살인하고 난 후에 나단선지자가 책망을 합니다. 처음에는 비유로 책망을 하니 자신인줄 알지 못하고 그런 자는 죽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나단 선지자가 바로 당신이라는 책망을 하였을 때에 다윗이 왕이기에 나단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책망으로 자신이 어떤 죄인인지를 비로소 알게 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상한심령임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자의 모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왕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의 책망을 받지 않고 오히려 선지자를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이들이 자신과 나라를 망치는 미련한 자들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나단의 책망을 받아들인 것은 다윗의 자질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도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자는 죽어야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아들인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씀이 직접 나타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언약을 하셨습니다. 다윗의 후손만이 아니라 다윗 자신도 잘못하면 사람 막대기와 인생채찍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셔서라도 하나님의 자기 언약대로 언약의 백성을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다윗이 처음 말하는 때와 같습니다.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다른 자의 눈에 티는 잘 보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이 은혜를 입으면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로 보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새겨집니다(31:33).

 

11절입니다. 악한 자는 반역만 힘쓰나니 그러므로 그에게 잔인한 사자가 보냄을 받으리라고 합니다. 악한 자란 오늘 제목과 연결시키면 미련한 자입니다. 이런 자는 반역만 힘을 씁니다. 이렇게 악하고 미련한 자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며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북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하여 반역하다가 앗수르라는 사자의 보냄을 받아 나라가 망하였습니다. 남 유다는 이런 모습으로 보고서도 계속 반역하였습니다. 결국은 바벨론에 의하여 나라가 망합니다.

 

시편 78:12~17절입니다. “12 옛적에 하나님이 애굽 땅 소안들에서 기이한 일을 그들의 조상들의 목전에서 행하셨으되 13 그가 바다를 갈라 물을 무더기 같이 서게 하시고 그들을 지나가게 하셨으며 14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빛으로 인도하셨으며 15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매우 깊은 곳에서 나오는 물처럼 흡족하게 마시게 하셨으며 16 또 바위에서 시내를 내사 물이 강 같이 흐르게 하셨으나 17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범죄 하여 메마른 땅에서 지존자를 배반하였도다

 

이어지는 37~41절을 봅니다. “37 이는 하나님께 향하는 그들의 마음이 정함이 없으며 그의 언약에 성실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38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39 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 40 그들이 광야에서 그에게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가 41 그들이 돌이켜 하나님을 거듭거듭 시험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노엽게 하였도다

 

출애굽과 광야의 기적 속에서도 계속하여 하나님을 반역한 자들입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반역한 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하나님의 기적을 온 몸으로 체험한 자들이 가장 미련하고 어리석고 배반만 일삼는 목이 곧은 백성입니다. 이들의 마음에는 정함이 없으며 그 언약에 성실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거듭거듭 반역만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분을 다 쏟아내지 아니하심은 그들이 육체이며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의 자기 언약의 신실하심은 그 긍휼이 바탕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박히는 것은 우리의 지혜로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성실하심으로 새 언약의 능력이 나타나야 마음에 박힙니다.

 

12절입니다.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본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완고하고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련한 자들입니다. 새끼를 빼앗긴 암곰의 사나움은 사자나 호랑이도 감당을 못합니다. 그런데 그런 새끼 빼앗긴 암곰보다 미련한 자를 만나는 것이 더 위험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보면서 나는 미련한 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정말로 미련한 사람입니다. 오히려 나는 참으로 미련하다고 하는 사람이 긍휼을 입은 사람입니다. 이런 자들은 주의 말씀이 받아들여지지만 스스로 지혜롭다는 자는 말씀을 배척합니다.

 

13절입니다. 누구든지 악으로 선을 갚으면 악이 그 집을 떠나지 아니합니다. 선을 베푸는 자를 악으로 대항하는 것은 그 선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악이 그 집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잠언의 주제인 지혜를 배척하는 것이 바로 악으로 선을 갚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을 베풀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선인과 악인에게 동일하게 비와 햇볕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배척한 자들이 자기 의로 가득한 자들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자신의 악함이 선인줄 착각한 것입니다.

 

14절입니다. 다투는 시작은 둑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일반적인 삶으로 적용을 해보아도 유익합니다. 우리가 일상적인 삶에서 싸움이 시작 될 때에 큰 일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일들입니다. 사소한 일들로 시작하여 이혼까지 가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그런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치는 것이 지혜입니다. 시비(是非)란 옳음과 그름을 따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치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러나 이미 선악과를 따먹고 난 모든 아담의 후손들은 자신을 중심으로 시비를 가리는 것이 뼈 속까지 깊이 박혀있는 자들입니다. 어느 한 순간인들 나를 중심으로 시비를 가리지 않는 경우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네가 틀렸다고 하는 확정을 받을 때에도 마지못하여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시인할 지라도 마음속으로 동의는 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우리 자신의 속을 보면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다툼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늘 소란합니다.

 

그런데 이런 시비가 복음을 나눈다는 곳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아는 복음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다른 말을 하면 시비를 가리자고 나옵니다. 모두가 성경을 인용하면서 자신이 옳은 진리를 전한다고 합니다. 얼마나 논리적이고 성경적인지 상대방을 꼼짝 못하도록 논증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을 전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도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고 하다가도 어느 날 무엇이 조금 틀어지면 완전히 원수처럼 여기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우리의 시비가 무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4:25~30절입니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 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30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누가복음 416절부터 시작되는 말씀의 결론부분입니다. 누가복음의 이 단락은 예수님께서 자라나신 곳의 회당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날 성경을 읽는 자로 지목이 되었고 회당장이 강대상에 올려놓은 성경은 이사야서입니다. 이사야 61장의 희년에 대한 말씀을 예수님께서 읽으시고 해방과 신원의 말씀 중에 해방의 말씀만 하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너희에게 이루어졌다고 할 때에 사람들이 의아해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엘리야 시대와 엘리사 시대에 이방인 과부와 나병환자가 고침을 받은 이야기를 하시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유대인들의 시각으로는 메시아가 오시면 자기들을 구원하시고 이방인들을 심판해야 하는데 자신이 메시아라고 하면서 이방인들의 구원을 이야기하고 있기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자기중심으로 시비를 가리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옳다는 것으로 인하여 자비를 베푸는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스스로 지혜롭고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시비를 그치는 것이 지혜인데 어떤 자가 시비를 거치겠습니까? 자신이 어떠한 죄인인지 아는 자가 먼저 시비를 그칠 것입니다.

 

15절입니다.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사람은 다 여호와께 미움을 받는 다고 합니다. 이 말씀의 해석은 이사야 5:20~24절입니다. “20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21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22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23 그들은 뇌물로 말미암아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공의를 빼앗는도다 24 이로 말미암아 불꽃이 그루터기를 삼킴 같이, 마른 풀이 불 속에 떨어짐 같이 그들의 뿌리가 썩겠고 꽃이 티끌처럼 날리리니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멸시하였음이라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명백한 해석입니다. 지혜롭고 명철하다는 자들이 이렇게 미련한 짓을 합니다.

 

16절입니다. 미련한 자는 무지하거늘 손에 값을 가지고 지혜를 사려 함은 어찜이냐고 합니다. 새 번역과 공동번역으로 다시 봅니다. “미련한 사람의 손에 돈이 있은들, 배울 마음이 없으니 어찌 지혜를 얻겠느냐?” “미련한 사람은 속이 비었으니 손에 돈이 있은들 어찌 슬기를 사랴.” 미련한 사람은 손에 돈이 있다고 하여도 그 마음속이 비워있기에 배울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련한 자는 자기 속에 있는 돈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자가 미련한 사람입니다. 이런 자들은 지혜를 얻으려고 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썩어질 것들로 인하여 자신이 지혜롭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의 어리석은 부자와 같습니다. 자신의 소유로 만족하면서 내 영혼아 평안히 먹고 즐기자고 할 때에 주님은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면 이것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미련한 자들은 참된 지혜를 어리석은 것으로 보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미련한 사람을 성경에서 찾아보면 나발이 있습니다. 큰 부자라서 양털을 깎을 때에 왕의 잔치처럼 먹고 마시면서 쫓겨 다니는 다윗이 부하들을 보내어 먹을 것을 부탁하자 오히려 조롱하였습니다. 다윗이 나발의 양떼들을 보호하는 울타리가 되어주었음에도 이렇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다윗의 부하들이 다윗에게 보고하자 다윗이 나발을 치기 위하여 올 때에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급하게 음식을 준비하여 다윗을 막습니다. 그 다음날 이 말을 들은 나발이 몸이 굳고 곡 죽게 됩니다. 그 나발의 뜻이 미련한 자입니다. 미련함과 지혜의 차이는 누가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인지를 아는 가에 있습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가 세상의 영광의 모습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초라한 모습으로 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알아봄이 지혜이며 그렇지 못함이 미련함입니다.

 

17절입니다.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다고 합니다. 친구가 사랑한다고 하여도 위기의 상황에 닥치면 피를 나눈 형제가 먼저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돈이 신이 되어 있어서 형제간에도 재산 다툼이 많이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도 문자적으로 보면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혈육의 관계가 아니라 예수님은 누가 내 형제며 내 어미냐고 하시면서 새로운 가족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가족이라면 위급할 때만이 아니라 정말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한 몸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교회란 혈육보다 더한 하나 됨의 모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이런 모습이 없다면 다 그런 거지 하고 넘어갈 것이 아니라 회개하여야 할 일입니다.

 

18절입니다. 지혜 없는 자는 남의 손을 잡고 그의 이웃 앞에서 보증이 된다고 합니다. 앞에서 본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도 신약까지 연결하여 보면 우리는 보증설 자격이 없는 자들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보증이 되시고 그 보증금으로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예수님이 우리의 지혜와 거룩함과 의로움과 구원함이 됨을 믿습니다(고전1:30).

 

19절입니다.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죄과를 좋아하는 자요 자기 문을 높이는 자는 파괴를 구하는 자라고 합니다. 앞에서 시비에 대한 말씀과 연결이 됩니다. 진리를 위한 다툼이라고 하여도 다투다가 보면 진리의 증거보다 자기감정의 싸움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가 진리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신학이든 철학이든 지식으로 문턱을 높입니다. 그러한 자가 자기신학체계를 마치 절대적인 진리인양 여기게 되면 오히려 자기를 파괴하게 됩니다. 예수님보다 자신이 세운 진리체계를 더 믿게 됩니다. 이런 일들이 복음을 말하고 진리를 말한다는 사람들에게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진리에 대한 다툼이 일어날 때에라도 자신의 논증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자신은 빠져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주장과 자신의 자존심을 위하여 예수님의 뜻마저 왜곡시키는 것이 미련한 자의 모습입니다.

 

예레미야 4:22절입니다.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어리석고 지각이 없고 미련한 모습이 어떤 모습입니까?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지만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본문에서 선을 행한다는 것은 주께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께로 돌아가기는커녕 세상의 힘을 빌려서 위기를 극복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이 미련한 모습입니다.

 

누가복음 24:25~27절입니다.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부활의 소식을 듣고서도 실망하여 엠마오 마을로 내려가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더디 믿는 자라고 책망합니다.

 

고린도전서 1:18~24절입니다.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2)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종교적인 의로움의 극치를 보인 유대인들과 지식으로 세상의 최고라는 헬라인들이 십자가를 볼 때에 거리끼고 미련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미련해 보이는 것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세상에서 자랑거리가 있는 자가 아닙니다. 세상의 자랑거리가 있다면 다 무너지게 하셔야 미련한 십자가가 보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세상에 대하여 미련한 자입니다. 세상의 지혜를 하나님은 어리석게 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신 것을 믿지 않는 것이 미련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