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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4:19-28 기도는 위탁이다. 2011. 6. 22

 

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20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24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25 말씀을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26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 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27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28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어느 집사님이 기도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시면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무엇을 위하여 금식하면서 기도하는지 보면 우리의 기도도 방향이 바꾸어지면서 길어지고 깊어지리라고 봅니다. 물론 특별한 시간을 따로 내어 기도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일상적인 모든 삶에서 주님께 위탁하는 것이 기도라는 말입니다. 23절을 보시면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위탁하는 것이 기도라는 말입니다.

 

위탁(委託)이란 맡기고 부탁한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부탁하는지 26절에 보시면 두 사도가 안디옥에 이르게 됩니다. 이 안디옥은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던 곳입니다. 안디옥에서 최초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림을 받았습니다. 이 교회가 이방인과 유대인이 함께 모인 교회입니다. 이곳에서 두 사도가 이룬 일을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란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고 위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금식하여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한 결과가 어떠합니까?

 

사도행전 13:1-3절을 봅니다. “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이렇게 보내진 것을 4절에서 보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여 복음을 전하려 간 일이 됩니다. 이렇게 은혜의 부탁함을 받아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생각은 모든 일들이 형통하여 복음을 잘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혀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온각 핍박과 고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서 주께서 택하신 자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이 복음을 듣고 믿어 교회가 됩니다. 이런 교회들은 건물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초대교회가 어떠하였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교회 그러면 건물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그런데 바울이 복음을 전하며 교회라고 한 것은 건물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그 당시에 온갖 신전들은 어마어마한 건물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번 바울 사도의 흔적을 보려고 떠난 터키 그리스 로마에 가보니 2천년의 우상 신전들의 유적이 거의 다 무너졌지만 아직도 엄청난 위용으로 버티고 있고 관광 상품화하기 위하여 계속 발굴하고 보수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신전의 대리석 기둥을 네 사람이 둘러서서 잡아야 손이 맞닿을 정도로 큰 대리석 기둥들이 즐비하였습니다. 특히 사도행전 17장에서 그리스 아테네에서 전도하는 내용을 보면 천지를 만든 신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않으시며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 않는다는 그 말씀을 목숨을 걸고 하는 말임을 실감하게 됩니다. 에베소의 아데미 신전 앞에서도 그런 복음을 전하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오늘날 수백억, 수천억을 들여서 예배당을 짓는다고 하면서 성전을 건축한다는 그런 곳에 가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하면 아마 돌들을 던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하러 가는 것이 이미 기존의 모든 신에 대한 질서를 다 뒤집어엎는 말들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곳 마다 이방인의 핍박만이 아니라 유대인의 핍박이 더욱 심하였습니다. 이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심을 유대인도 이방인도 믿지 못할 내용이라는 말입니다.

 

그러한 신화와 신전의 세상에 그 모든 신화와 신전을 허구로 돌려버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성령의 보내심을 따라 전도하려고 나선 전도의 길이 구브로 섬을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전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모습을 잠시 봅니다. 사도행전 13:44-52절입니다. “봉독” 복음을 전하러 가서 제일먼저 유대인의 회당에 가서 전합니다. 구약 성경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 그러자 다음 안식일에도 전하여 달라고 하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유대인들이 바울이 말한 것을 비방합니다.

 

이때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싫어하는 유대인들이 유대인들의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한 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여 그 지역에서 쫒아냅니다. 이때 두 사람이 발의 티끌을 떨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갑니다. 복음을 배척하는 것이 심판입니다. 그런데 핍박을 받아 쫓겨나는데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더라고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수리아 안디옥교회에서 파송을 받을 때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였습니다. 또한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전도하였는데 이런 결과가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는데 그 외의 사람들이 핍박하여 쫒아내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거나 주의 일을 한다고 할 때에 핍박이이 오는 것을 이상하여 여깁니다. 기도를 적게 하여서 그런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부탁함을 받고 위탁하였는데 이런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쫓겨나서 이고니온에 이릅니다. 14:1-7절을 봅니다. “봉독” 여기서도 복음을 전하는데 두 파로 나누어집니다. 많은 자들이 믿었지만 믿지 않는 유대인과 이방인과 관리들이 이들을 돌을 들어 치려고 하자 다시 도망갑니다. 도망 간 곳이 루스드라와 더베 지역입니다. 이런 말씀을 보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위탁함을 받고 나선 길이 이러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려움을 없애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에게 온갖 어려움이 다 닥칩니다. 그러나 복음은 빈틈없이 잘 전하여지고 있습니다.

 

8-18절입니다. “봉독” 루스드에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이 바울의 복음을 듣고 있는데 이 사람을 바울이 주목하여 보니 구원받을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 바울사도가 신유를 행한다고 광고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도 모르는데 성령께서 지금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바울이 일어나라고 하니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온갖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 놀랐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주신이 제우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바나바를 보고 제우스라고 하고 바울이 주로 말을 하니 헤르메스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제우스 신전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을 가지고 와서 살아있는 사람을 신이라고 제사를 지내려고 합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이런 모습을 보면서 자기들의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 큰 소리로 말합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고 한다고 합니다. 지나간 시대에는 그대로 두셨으니 그러나 자기를 증거 하지 아니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비를 주시고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셔서 음식과 기쁨으로 만족을 주셨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17장과 연결하면 이런 일을 버리고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라고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겨우 말렸습니다.

 

이렇게 된 것을 보면 사람들이 굴복을 할까요? 19-28절을 봅니다. “봉독”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쳤다고 합니다. 제자들도 죽은 줄 알고 둘러서 있는데 바울이 일어나서 그 성에 다시 들어갑니다. 돌에 맞았으니 온 몸이 피가 터지고 멍이 들었을 겁니다. 이런 모습이 금식하며 기도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위탁한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은 이런 어려움이 없게 하여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이런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영생 얻기로 작정된 자만 믿게 하시기 위하여 이렇게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의 뜻은 완벽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순교하고 야고보가 순교하고 바울이 이렇게 얻어터지며 복음을 전하는데도 하나님의 뜻은 형통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알고서도 금식하며 기도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방법이 이런 방법 말고 멋있고 우아하고 고상하게 하는 방법은 없습니까? 미안하지만 그런 방법을 없습니다. 십자가로 구원하시는 방법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합니다. 잘못된 번영신학에서는 십자가를 사람들의 구미에 맞게 세련되게 포장하고 변질시킬지 모르지만 성령의 방법은 이런 모습입니다.

 

이런 전도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믿고 싶은 마음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전도하는 자들의 모습이 저런 모양이라면 믿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게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전도를 하려면 예수를 믿는 내가 세상에서 잘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잘 되어야 믿고 싶은 마음들이 있어서 예수님을 많이 믿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가짜 복음이 인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합니다. 철야도 하고 금식도 하면서 기도하는데 세상에서 잘 되는 나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의 은혜에 위탁한 기도를 하고 나선 자들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늘 쫓기고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바나바가 이튿날에는 더베로 가서 복음을 전하여 제자를 삼고 다시 돌에 맞아서 내침을 당한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을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고 합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은 줄 알고 던져지는 이런 자들이 전한 예수님을 믿고 있으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환난을 없애달라는 기도인데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환난을 통과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라면 가장 불쌍한 자들입니다. 주님의 약속한 나라가 영원한데 그 나라에 들어가도록 조치하기 위하여 성도에게는 환난을 주십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우리가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그들이 믿는 주께 위탁합니다. 떠나면서 주님께 맡긴다는 말입니다. 여러 곳을 지나서 이 복음 전하는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안디옥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란 하나님의 은혜에 위탁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맡긴다는 말입니다. 그 위탁으로 인하여 어떤 환난이 오더라도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한 곳의 말씀만 더 보려고 합니다. 사도행전 20:32절입니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바울사도가 환난을 당할 것을 성령을 통하여 압니다. 그러나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에는 자기의 생명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에베소 장로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내용이 주와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란 나의 목적이나 소원을 부탁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은혜의 말씀에 부탁합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시는데 그 말씀이 성도를 능히 든든히 세우십니다. 무너질 것을 무너뜨리고 무너지지 아니할 주님의 은혜만 영원히 남기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