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동영상 설교] 

사도행전 23:11 위탁된 자의 삶 2011. 6. 29

 

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지난주에 기도는 위탁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그렇게 위탁된 자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를 보려고 합니다. 바울사도가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되어 이방인의 손에 넘겨질 것을 성령이 알려주심에도 그곳으로 갑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의 손에 잡혀 공회에서 재판을 받는 모습입니다. 이곳 까지 오는 중에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만나서 부탁한 내용을 먼저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20:17-38절입니다. “봉독” 바울의 심정과 양떼들을 부탁하는 내용을 보게 됩니다.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서 예루살렘으로 가면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교회를 부탁합니다. 교회란 하나님의 피로 값을 주고 샀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로 값을 주고 산 자기 백성들 즉 성도를 교회라고 합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피를 이야기 하는데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피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곧 하나님의 피라는 말입니다. 이런 피로 값을 주고 산 교회의 감독이란 하나님의 피가 제대로 나타나는지를 감독하여야 합니다.

 

바울이 장로들에게 교회를 부탁하는 것만이 아니라 장로들까지 부탁하고 있는 32절을 봅니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장로들과 교회를 부탁합니다. 주님께 부탁한다고 하지 않고 주님과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 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주님이 말씀으로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기 때문에 주와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한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장로도 위탁합니다.

 

이런 부탁을 하는 바울 자신도 주님께 위탁이 된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9:15-19절입니다. “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주님의 그릇이 사울입니다. 이제부터 사울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루시는 일에 끌려 다녀야 합니다. 자신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가지 못합니다. 자신은 아시아 쪽으로 복음을 전하고 싶은데 성령이 막으셔서 유럽으로 건너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받아야 할 것도 보여주셨습니다. 이런 지시를 받은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은 사울이 눈에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유다식 이름이고 바울은 로마식 이름인데 성령이 충만하여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하기 시작하면서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주로 불립니다.

 

이제부터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명대로만 살게 됩니다. 자기의 삶이라고는 없습니다. 주께 받은 사명을 위하여 목숨도 아깝지 않다고 달려갑니다. 그러면 이런 모습이 바울 사도 자신의 의지입니까? 주님의 은혜입니까? 저희 교회 자유게시판에도 이런 말들이 오고 가는데 바울사도 자신의 고백을 들어봅니다. 고린도전서 15:10 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이런 모습이 주께 맡겨진 자의 모습입니다. 복음을 위한 수고가 자신이 아니요 은혜라고 합니다.

 

이러한 바울의 수고는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하여 고난을 받을 것을 말씀하셨기에 예수님의 이름이 증거 되는 방식은 이런 방식으로 증거 됩니다. 왜 자꾸만 이런 모습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 하여야 하는지 고린도후서 1:8-9절입니다.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붙잡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지푸라기조차 치워버리심으로 사형선고 받은 자처럼 살 소망까지 끊어지게 하십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주님만 의지하게 하려고 하십니다. 우리는 늘 자기를 의지하려고 합니다. 자기의 지식과 자신의 행위와 자신이 받았다는 은혜나 은사나 그 무엇을 고정시켜서 붙들고 싶어 합니다. 이렇게 고정된 것이 우상인데도 자기는 그것을 끝까지 붙들고 있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의 우상들을 무너뜨립니다. 자기 것이라고 하는 것들을 부수어 버립니다. 내가 믿고 의지하는 것들이 무너져야 합니다. 우리의 편견과 아집과 고정관념들로 점철되어 있는 신앙관도 무너져야 합니다. 늘푸른 교회라는 것도 나의 경험이라는 것도 우상이 됩니다. 자신이 주를 위하여 무엇을 한다고 하는 것조차 자기 치장이 됩니다. 바울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 붙들린 자의 삶은 죽도록 고생합니다. 신앙적인 표현으로는 고난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자기를 의지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조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기도를 요청합니다. 고린도후서 1:10-11절입니다.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고 합니다. 큰 사망에서 건지셨다고 하는 곳은 고난 가운데서 건지셨다는 말씀도 되지만 자기를 의지하려는 것에서도 건지십니다. 자꾸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지식과 자신들의 행위를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것을 붙들고 있는 것이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요청하는 것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결국 기도란 하나님의 뜻이 위탁받은 자들에게 이루어짐으로 복음이 증거 되고 그로 하여금 주께 감사합니다. 바울을 주의 소유로 삼으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데 그 사용하시는 방법이 바울의 처지나 형편을 돌보아 주지 않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내가 어려울 때 도움이 되고, 외로울 때에 위로가 되시는 그런 주님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울에게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예루살렘 공의회에 잡혀서 재판을 받고 있는데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찢겨 죽을 지경이라서 천부장이 바울을 영내에 보호합니다. 그날 밤에 주님께서 바울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한다고 하시고서는 어떻게 가서 전해야 할지 그런 방법과 길에 대하여서는 아무른 말씀이 없습니다. 왕의 대사만 되어도 대접을 받으며 가는데 천지의 주인이 되시는 주님의 대사로서 복음 들고 가는데 그 가는 길은 죄수의 모습으로 쇠고랑을 차고 갑니다.

 

예루살렘에서는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자지도 않겠다고 결의한 사람들이 40명이나 됩니다. 이들의 모의를 안 바울의 조카가 천부장에게 말하여 바울이 로마 군대의 보호를 받으며 총독의 관저가 있는 가이사랴로 가게 됩니다. 보병 200명, 창병 200명, 기병 70명이 바울을 호송하여 갑니다. 그곳에서 2년 동안 질질 끄는 재판을 받으며 갇혀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자유가 주어져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재판을 하여도 로마법에 의한 처벌을 할 내용이 없습니다. 그들의 종교에 관한 문제라고 보았지만 민심을 살피는 총독들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감옥에 가두어 두기도 하고 돈을 바라고 가두어 두기도 합니다.

 

결국 가이사에게 상소를 하였기에 로마로 보내는데 바울이 배가 풍랑에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하여도 선주와 선장이 로마의 백부장에게 말하여 배를 타고 갑니다. 가는 중에 풍랑을 만나서 배의 모든 짐을 버리고 조류에 밀려다니는 중에 주님은 바울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27:23-25절입니다. “23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4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죽을 고생 하는데도 그냥 두려워말라고 합니다.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다고 하시면서 바울과 함께 배를 타고 가는 자들을 다 네게 주셨다고 합니다. 선주와 선장과 백부장이 배를 어거하여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성취를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집니다. 배가 파선하기 직전에 군인들은 죄수들이 탈출할 것을 염려하여 죽이려고 하자 백부장이 말립니다. 이것은 바울을 구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도 다 주장하십니다. 만물이 주에게서 왔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는 일들이 이미 성령으로 바울에게 알려주셨고 바울은 로마교회에 기도를 요청하였습니다. 로마서 15:22-32절입니다. “봉독” 바울사도가 로마에 오기 전에 로마서를 통하여 로마를 갈 목적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의 목적이 자기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만이 이루어집니다. 바울은 이방인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연보한 것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갔다가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로마교회의 도움으로 서바나 까지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로마까지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설에 의하면 바울이 서바나, 지금의 스페인까지 갔다는 설도 있고 아시아 동부지역에 갔다는 말도 있고 로마에서 2년간 연금 상태로 있으면서 복음을 전하다가 재판을 받아 순교했다는 것이 교회의 전통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여야 하며 가이사에게 서야 한다는 그 말씀을 이루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교회에 기도요청하기를 이렇게 합니다. 30-33절입니다. “3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31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32 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33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기도는 의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의탁한 곳이 어디입니까? 주와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였습니다. 바울사도 주의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그 결과로 주의 말씀대로만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을 치더라도 주님의 뜻만이 이루어집니다. 바울사도도 자기의 뜻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될 줄로 믿었다고 합니다. 그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32절을 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함께 편히 쉬게 하라고 합니다.

 

이런 기도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권합니다. 사사로운 기도가 아닙니다. 이 기도대로 이루어집니다. 이런 기도의 마음도 주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 결과 이 기도대로 이루어져서 예루살렘에서 사역을 마치고 로마에까지 오는데 그 방법은 로마의 죄수로 끌려가는 모습이지만 이것이 그 당시에 가장 안전하게 가는 방법이었다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풍랑의 위기에서 선주도 선장도 백부장도 바울의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결국 로마에 와서 편히 쉬게 되었습니다. 만 이년동안 연금 상태이지만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는 성경에 없지만 교회의 전통에 의하면 로마의 기독교 박해기간에 순교한 것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편히 안식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주께 위탁받은 자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