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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26-30 성령의 탄식   2011. 7. 6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기도라는 주제로 성경을 살펴보고 있는 중에 이제 로마서입니다. 로마서에서 기도와 간구라는 내용들이 어떤 것이 있는지를 보면 오늘 본문 외에 두 곳이 더 나옵니다. 처음은 로마서 1:8-10절입니다. “봉독” 로마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두 가지 기도를 합니다. 첫째는 로마교회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된 것으로 인하여 감사한다고 합니다. 로마교회는 바울이 전도하여 세워진 교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로마교회를 위하여 자기 기도에서 쉬지 않고 말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하나님이 자기의 증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 곳은 지난주에 보았던 로마서 15장에서의 기도내용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오기 전에 기도한 내용들이 그대로 이루어지지만 바울의 기도한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만 이루어지는 것을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한다는 것은 자기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에 몇 번이나 가려고 하였지만 길이 막혔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바울사도가 로마에 언제 어떻게 가야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사도가 기도하는 것은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한다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바울사도가 하나님의 뜻을 다 알았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물론 그가 받은 계시가 불충분하다는 말이 아니라 바울이 바라고 기도한 내용이 다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성령이 충만하였으며 직접 계시를 받은 사도이지만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지를 몰랐다는 말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 복음에 빚진 자로서 어디로 가든지 복음을 전하려고 한 자세는 있었지만 어느 방향으로 가며 어떻게 가는지 다 알지 못하였기에 어떻게 하든지 로마로 가는 길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이나 간절히 구하였는데도 거절당한 기도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2:7-10절입니다.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사탄의 가시가 떠나가기를 세 번이나 간구하였지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였습니다. 약할 그때가 강하다고 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무는 자리는 약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약한 것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제 정신의 사람이 할 수 없는 말입니다. 누가 이런 것을 기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런 고백이 나오는 것은 바울의 실력이 아니라 주의 은혜입니다. 그러면 이런 은혜를 우리가 받고 싶으냐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이런 모습과 반대가 되어야 은혜라고 여깁니다.

 

결국 내가 강하고 싶은 것입니다. 기도를 하든지, 설교를 하든지, 글을 쓰면서 아무리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복음을 이야기 하여도 내가 바보가 되고 수욕을 당하는 것이 싫다는 말입니다. 차례대로 읽어가는 성경의 본문이 잠언인데 이런 말씀이 보였습니다. 잠언 14:10절입니다.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교만에서라고 합니다. 아이들이 한 대 때리면 꼭 자기가 마지막으로 때려야 직성이 풀리기에 서로 끝까지 투탁거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무엇이나 자신이 종결 자가 되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기도에서도 나온다는 말입니다. 누가 더 많이 기도하느냐는 모습으로도 나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약함을 기뻐하는 기도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주여 나로 약하게 하옵소서! 나로 수치를 당하게 하소서! 사탄의 가시를 더하여 주소서! 그렇게 되어 약하여짐으로 오직 주님만 강하게 드러나시면 됩니다. 이런 기도를 할 수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기도하는 내용이 나의 강함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죽을 때 까지 계속될 문제입니다. 아니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고 하는데 왜 그런 모습이 나오느냐고 물으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죽었다는 말은 우리 옛 사람의 의지가 없어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옛 사람의 의지는 우리가 죽을 때 까지 그대로 가지만 우리 안에 계시는 분이 우리보다 강하셔서 우리의 고집을 꺾으시고 주님의 뜻만 이루어내시겠다는 것이 죽었다는 말입니다. 아주 무서운 선생님이 아이들이 마구 떠들고 있는 교실에 들어오시면서 너희들 이제 죽었다고 복창하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아이들을 다 죽이겠다는 말이 아니라 너희가 너희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내가 바로 잡고야 말겠다는 무서운 선생님의 의지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을 때 까지 자기생각만 합니다. 기도를 해도 자신이 편하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이 복음 전하면서 사탄의 가시가 얼마나 괴로웠으면 세 번이나 제거하여 달라고 기도하였지만 오히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도 성도라면, 창세전에 택함을 입은 자에게 그 언약대로 성령이 임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의 고집과 의지를 보면서 탄식을 하십니다. 물론 이것을 아시고 성령이 임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셔서 우리의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책망도 하시지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간구하십니다.

 

18-22절은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즉 썩어짐의 종노릇 하는 것으로 인하여 탄식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이란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탄식합니다. 이런 허무에 굴복하게 된 것은 자기 뜻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다 허무에 굴복하기를 싫어하지만 굴복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렇게 하신 분의 뜻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하나님의 뜻이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목적이 아들의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그 아들을 통하여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기를 지금 피조물들이 탄식하며 기다린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성령이 임하지 않는 자는 알지 못하는 내용입니다.

 

성령이 임한 자만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그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의 날을 소망하며 살게 됩니다. 이런 일들을 누가 압니까? 23절을 봅니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라고 합니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처음 익은 열매입니다. 그 열매를 받은 자만 이 세상의 탄식 소리를 들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도 탄식하면서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의 구속이 있기까지는 계속하여 탄식이 나옵니다. 어떤 탄식일까요? 성령의 탄식소리를 듣는 탄식입니다. 성령의 탄식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몸의 속량을 기다립니까? 우리는 숨 쉴 틈만 있어도 자기 힘으로 사는 줄 압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우리는 이 죽을 몸을 돌보고 치장하는 일에 평생을 보냅니다. 이런 모습을 성령께서 얼마나 탄식하시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5:47-54절입니다. “봉독” 모든 사람이 흙에 속한 형상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도 입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썩을 것과 죽을 것에 모든 마음을 빼앗기고 있으니 성령이 우리 안에서 탄식하며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러함에도 감사할 것은 우리의 기도보다 성령의 기도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의 탄식은 우리 몸의 속량이 이루어지기 까지 계속됩니다.

 

24절입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사람이 눈에 보이는 소망을 목표로 두고 그것을 기도의 제목으로 삼으면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자기 소원성취밖에 되지 않습니다. 25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이지 않는 소망을 위하여 기도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입니다. 도우실 뿐 아니라 참고 기다리게도 하십니다. 왜 그렇게 되는지를 26절에서 말씀합니다.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합니다. 무엇을 빌어야 할지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간구하십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서 나의 옛사람의 욕구 따로 성령의 욕구 따로 입니다. 이것이 곤고하여지는 갈등의 요인이 됩니다. 육신의 소욕은 성령의 소욕을 막고 성령의 소욕은 육신의 소욕을 막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욕구가 더 강하기에 자기 백성에게는 성령의 기도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성도가 이 세상에서 남은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왜 이렇게 하십니까? 27절입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누구 기도를 들어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성령의 기도만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기도가 할 필요 없겠네요? 이렇게 나옵니다. 아닙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셔서 성령의 탄식소리가 들려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나의기도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기도로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산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로마서 8:14-17절을 봅니다. “봉독”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 합니다. 자녀이면 상속자가 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되는데 이런 부분에 대하여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합니다.

 

성령의 기도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데 그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내용이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28-29절입니다. 우리의 기도에서 이런 기도가 나옵니까?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이란 우선 십자가의 고난의 형상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17절에서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한 성령의 탄식기도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고 십자가를 타고 가려고 합니다. 내 몸 편 한대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런 일에 성경말씀을 잘도 이용합니다. 그런 우리이기에 성령의 기도는 이런 우리를 십자가에 함께 못 박게 하십니다. 그래야 함께 영광을 받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사람은 29-30절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도 기도하십니다(34). 성령이 성도 안에서 탄식하며 기도하고 계시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기도하시는 것을 믿고 사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며 기도의 사람입니다. 지금도 기도하고 계시는 성령의 탄식소리를 듣는 것이 기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