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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3:14-21 바울의 기도(2) 2011. 7. 20

 

14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에베소서에서 바울의 두 번째 기도입니다. 먼저 14절의 ‘이러므로’를 보아야 합니다. 바울이 14-21절의 기도를 하는 것은 앞에서 연결되는 ‘이러므로’를 보아야 왜 이런 기도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전체는 에베소 1장1절부터 시작해야 하지만 최소한 3:1-13절까지를 보아야 합니다. 바울사도가 감옥에 갇힌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갇혔습니다. 이방인이 아무른 율법의 행함이 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그 복음으로 인하여 유대인의 미움을 받아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하자 로마의 법에 호소를 하여 감옥에 있는 중에 에베소 교회를 위하여 편지를 보냅니다.

 

이방인에게 이런 복음이 임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경륜입니다. 지난주에도 보았습니다.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입은 자들에게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계시로 알려주셨는데 이것을 3절에서 비밀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문서로 기록이 되었는데 무슨 비밀입니까? 그러나 여전히 비밀입니다. 성령께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나타내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이제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이 비밀이며 또한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능력의 역사 하시는 대로 복음을 전한다고 합니다.

 

9-13절을 봅니다.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인지를 복음을 통하여 드러냅니다. 이 복음을 듣고 믿은 자들이 교회인데 이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십니다. 이것은 하늘의 천사들도 알지 못하였던 내용입니다. 그러니 사탄도 하나님의 비밀한 경륜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알지 못하였기에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자신을 영원히 패배하게 하는 자충수가 되었습니다. 이런 것도 다 영원부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는 사람은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기도합니다. 먼저 누구에게 기도합니까? 14-15절을 보시면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께 기도합니다. 이름을 주셨다는 말은 이름을 주시는 분이 창조주이며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이름을 받는 자는 피조물이며 종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물건을 만들어내면 자기 마음대로 이름을 짓습니다. 또는 애완동물을 사오면 전에 이름을 어떻게 불렀든지 간에 지금 주인이 그 이름을 다르게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의 모든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분에게 기도한다는 것을 모든 것의 창조주요 주인이신 분께 기도합니다.

 

기도의 자세는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무릎을 꿇는 것은 항복이지요! 그러면 우리도 늘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합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몸이 무릎을 꿇더라도 마음이 꿇어지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내촌감상이라는 사람은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이지만 무릎 관절이 좋지 않아서 무릎을 꿇지 않고 기도하였다 합니다. 세상에서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항복을 할 때 무릎을 꿇기에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죽더라도 무릎을 꿇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누구 앞에 무릎을 꿇어야합니까?

 

빌립보서 2:10-11절입니다.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는 불신다도 무릎을 꿇게 됩니다. 그런데 누가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겠습니까? 세상에서 저주 받고 죽었다는 그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기보다는 침을 뱉고 고개를 도리질 하면서 돌아서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못합니다. 성령이 임하여야만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굻게 됩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내용이 무엇일까요? 우리의 발등에 떨어진 불같이 나에게 시급하고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나 에베소 교회에 산적한 문제들이 왜 없었겠습니까? 경제적인 문제로, 질병의 문제로, 가정불화로, 안과 밖의 핍박의 문제들로 인하여 목숨이 경각에 달린 자들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문제는 기도의 내용에 포함하지도 않습니다. 가장 중요하고 급한 내용이 먼저 나오겠지요!

 

그 내용이 16절입니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이것이 계시를 받은 사도 바울의 기도내용입니다. 그 영광의 풍성함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데 그 혜택이 속사람의 강건(强健)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트렌드가 건강입니다. 먹고살만하니 건강을 챙깁니다. 배가 고플 때는 배만 채우면 소원이 없겠다고 하였는데 이제는 얼마나 건강식품이냐를 따집니다. 주일학교 학생들이 간식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을 종종 봅니다. 빵이나 바나나도 버립니다. 먹지 않으려면 받아가지 말라고 해도 받아가서는 맛없다고 버립니다. 이런 세상이니 몸의 건강을 더욱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속사람이 강건하기를 기도합니다. 왜 이런 기도를 합니까? 고린도후서 4:16-18절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속사람이 있는 사람은 이런 성경의 말씀에 아멘이 됩니다. 그런 사람은 속사람의 강건함을 기도합니다. 낡아지고 쇠하여지고 무너져 내릴 장막이 영원하지 않음을 알기에 속사람이 강건하도록 기도합니다.

 

그 다음의 기도는 17절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에베소 1:1절에서 이미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 편지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에베소 교회는 믿음과 성도에 대한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가 마음에 계시도록 기도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계시지 아니하시는 것이 아니라 더욱 풍성하게 주와 그리스도로 계시도록 기도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여전히 내가 주가 되어 있습니다. 사데 교회의 몇 사람처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다니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마음에 주가 되신 것이지요!

 

다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기를 기도합니다. 복음을 처음 듣고 믿었다는 것은 나무가 심겨진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씨가 마음 밭에 뿌려졌습니다. 자란다고 하면 복음을 듣는 사람들은 지레짐작으로 무슨 성화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릴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는 것이 무엇인지 몇 곳의 말씀을 봅니다. 고전 3:7절입니다.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자라는 부분은 하나님께 달렸습니다. 물론 복음의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것도 십자가의 다 이루심의 혜택으로 나오는 것이기에 자기들의 열매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에베소서 4:1-16절입니다. “봉독”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십니다.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기에 그렇습니다. 그러함에도 사람들은 각기 자기주장들이 나오기에 바울사도는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이런 자람도 역시 주님께서 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아 내시고 위로 올라 가셔서 선물을 주십니다. 위로 올라가셔서 선물을 주시는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한 각양 은사를 주십니다. 이렇게 하여 범사에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게 하는데 이 역시 주께서 각 지체들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사랑 안에서 세워집니다.

 

본문 18절입니다.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면 튼튼히 자라게 되는데 그 자람이란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기를 기도 합니다. 우리가 아는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육체적 사랑, 정신적 사랑이라는 말도 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세 종류의 사랑을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에로스, 필레오, 아가페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구분도 별 의미 없습니다. 성경에서도 서로 섞어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해하는 사랑이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지 지식에 넘치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 사랑을 로마서 5:8절에 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의 확증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왜 이것이 사랑의 확증인가 하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어 있을 때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어있었단 자가 무슨 반응을 보일 수가 없습니다. 이런 상태를 하나님의 원수 된 자요,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라고 합니다. 이런 자들을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의 뜻과 계획과 아무른 상관없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영원하신 언약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이며 시간과 공간에 제한을 받는 죄인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사랑을 말하면 사람들이 미쳤다고 합니다. 결코 세상이 받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그를 죽였는데 그는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이것이 단지 죄인들끼리 일어나는 살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살해한 자가 오히려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것도 물론 성령이 임하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 받은 사람은 나는 하나님을 죽였는데 하나님은 사랑하셨다는 것은 그 아들의 공로를 위하여 그렇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나 죽으나 그의 사랑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이 얼마나 엄청난지 19절에서 그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한다고 합니다. 이 사랑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늘을 두루마리로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다는 찬송가 가사가 실감이 납니다. 그런데 막상 저와 여러분에게 종이 한 장씩 나누어 주고 하나님의 사랑을 기록하여 보라고 하면 얼마나 기록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것이 없다는 것은 우리의 사랑은 아직도 나의 지식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 사랑이 어떤지 알기를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랑알기를 기도하라고 끝내 버리면 그 사랑 알기를 기도해야 하는 의무만 남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20-21절이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분이라고 합니다. 바울사도가 기도한 내용들의 만분의 일도 우리는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기도한다고 하여도 우리의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에 머물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 더 넘치게 하늘의 신령한 복을 주시며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폭력적인 남편이 아내를 협박하였습니다. 예수냐? 남편이냐? 너무 무서워서 예수를 포기하였답니다. 여러분이 목사라면 어떻게 답하겠습니까? 어느 목사가 그런 시험을 이겨야 한다고 했답니다. 저는 베드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절대로 부인하지 않겠다고 죽는 자리에도 함께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날 새벽닭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부인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아니한 것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임하고 나서 베드로는 어떠하였습니까? 이방인과 식사하다가 예루살렘에서 유대기독교인들이 내려오자 외식을 합니다. 그러나 버림받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은 우리의 지식에 넘칩니다. 이런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다 이루심의 사랑을 영원히 확증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을 더욱 풍성히 알아감으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