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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2:1-10 기도에 대한 가르침 2011. 8. 31

 

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3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7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9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10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이 본문에 대한 제목이 ‘기도에 대한 가르침’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단위나 맥락을 따라 이런 소제목을 붙이는 것은 성경을 읽는 독자가 그 단락의 전체를 파악하기 쉽게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제목을 붙임으로 인하여 본문을 그 제목에 맞추어보려고 하는 경우가 나옵니다. 설교도 제목을 붙이는 것은 설교전체의 강조점을 요약하여 보여주려는 의도입니다만 역시 제목이 본문을 제한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우리는 무엇을 보든지 듣든지 자기의 잣대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을 가치관, 선입견, 고정관념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자기 제한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주장들로 요란함과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8절을 보시면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자기의 지식이나 경험이나 어떤 주의를 가지고 주장하게 되면 반드시 다툼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은 자기부인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부인을 금욕적인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가 자기 부인임을 기도에 대한 설교를 통하여 몇 번이나 말씀을 드렸습니다. 기도를 한다는 것은 나의 힘으로 살지 못한다는 고백입니다. 그런 자들이 어떻게 분노와 다툼이 일어나겠느냐는 말입니다. 분노와 다툼이 일어나는 그 속에는 의를 위한 분노가 아니라 자기의 주장이 먹혀들지 아니함에 대한 분노입니다.

 

예수님만이 의로우신 분인데도 자기는 이미 정의의 편에 서 있다고 여기기에 자기를 반대하면 전부 악으로 몰아붙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으신 분이 예수님이신데 이 예수님을 전하면서 또다시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을 전하면 이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도 저주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면 바른 복음이 무엇입니까? 디모데전서 1:1-11절을 보시면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못하게 합니다. 이들은 율법주의를 대표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문자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영지주의 영향의 가르침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전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른 교훈, 즉 영광의 복음을 전한 결과는 어떠합니까?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바른 교훈의 결과는 이러하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른 교훈에서 벗어나면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바른 교훈은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입니다. 그리고 이런 복음을 전한 자의 모습은 이어지는 12-20절의 말씀을 보면 자신은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합니다. 이런 자를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절 오래 참으심으로 나 같은 죄인도 용서 받았다고 증거 합니다.

 

1장에서 인사와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 것과 복음을 전하는 자가 무엇을 받고 전하는지를 말한 후에 첫째로 권하는 내용이 2:1절에서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도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와 간구와 도고를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들으면 기도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기도할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기도가 무엇인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알지 못하고 잘못구하여 왔기에 기도할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한 사도의 편지는 첫째로 기도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기도와 간구와 도고에 대하여 뚜렷하게 구별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우리가 무엇을 강조하기 위하여 같은 내용의 다른 말들을 반복하는 것으로 보면 됩니다. 그런데 잘 사용하지 않는 도고는 무엇인지 보겠습니다. 기도(祈禱)의 한문이 ‘빌 기’자에 ‘빌 도’자입니다. 도고(禱告)는 ‘빌 도’자에 ‘아뢸 고’자입니다. 그러니 빌고 아뢴다는 뜻이니 기도나 간구나 도고가 다 같은 뜻입니다. 간구(懇求)도 말해야지요! 간구는 정성을 다하여 구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기도에 무엇이 담겨야 합니까? 그것은 감사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의무나 의식이 아니라 감사라는 말입니다. 기도할 수 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큰 감사입니까? 우리가 아담의 범죄로 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단절이 되었는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도 예수님만이 아빠 아버지라 부르시는 그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이 바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않고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영을 받았기에 부르게 됩니다(롬8:15). 기도와 간구와 도고가 다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게 되는 같은 말입니다. 이렇게 아빠 아버지를 부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자는 아버지의 뜻을 알고 아버지의 뜻을 구하게 됩니다. 그 아버지의 뜻이란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천지를 창조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로 통일 되도록 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알았다면 이제 나의 중심이나 나의 영광인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과 그 영광을 위하여 구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기도와 간구와 도고라는 말입니다. 나의 영광을 위하는 기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구하는 기도인데도 정말 감사가 나오는 것이 바른 기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평소에도 나의 영광을 구하고 기도해도 나의 영광을 구하고 있으니 기도에 감사가 없습니다.

 

더구나 자기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는 것이 첫째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의 범위에 대하여서는 2절에서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 욕하기에 바쁘지 않습니까? 저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만 이 말씀을 보면서 욕하기보다 기도하여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바울사도가 로마서에서도 이런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합니다. 공공의 질서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라고 합니다. 물론 이런 권위는 정당한 권위여야 합니다. 독재나 쿠데타 세력 앞에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아부하는 설교는 복음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이런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2절에서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어려움 없이 평안하게 사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당시에는 로마가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고 있었던 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생활이 방해받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합니다. 오늘날도 정치 사회 경제문제로 세상은 연일 시끄럽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맡은 공익의 질서를 위하여 살도록 기도하는 것은 이런 영역도 다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합니다.

 

3절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서도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는 것은 결국 땅의 모든 질서도 다 하나님께 굴복하여야 하는 것이며 그 굴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꿇지 않아도 최후의 심판 때에 모든 사람이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되어 있습니다(빌2:11).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4절에서 그들도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씀을 가지고 보편구원설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새 언약 시대에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차별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11:32절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여기서 모든 사람이라고 하시는 것은 만민구원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오직 긍휼에 의한 구원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33절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도 모두 긍휼의 대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모두에게 의무적으로 긍휼을 베풀어 구원하실 의무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긍휼을 입게 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 분이 바로 중보자 이신 그리스도입니다. 오늘날 중보기도가 마치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중보기도라는 말도 식상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시면 중보기도가 오직 한분뿐이라고 말씀합니다. 5절을 봅니다. “하나님은 한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러면 지금까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중보의 기도가 아닙니까? 합동 측 교단에서는 몇 년 전에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고 ‘이웃을 위한 기도’라고 하라면서 총회에서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 이 본문의 말씀 때문인 것으로 봅니다.

 

그러면 왜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고서는 중보가 한분 예수 그리스도 뿐이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중보(中保)란 가운데서 돕는 분, 중재자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유일한 중보의 사역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6절입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 할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모든 사람을 위한 속전이라는 말씀은 7절에 비추어보면 이방인에게도 효력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한 것은 신분이나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민족이나 혈통을 따지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중보자임을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복음이 증거 된 각처에서 이런 논란과 다툼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율법주의가 들어오고 영지주의자가 들어와서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만이 유일한 주와 그리스도시오 중보자이심을 믿는 자들에게 와서는 율법과 신화와 족보와 특별한 영적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자기들만의 구원을 이야기하는 자들에게 바울사도는 모든 사람이라는 말로 그들의 폐쇄적이고 인위적인 울타리를 걷어버리라는 말씀입니다.

 

8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1장에서 2:7절까지의 결론이 ‘그러므로’입니다. 이방인 지역에 복음이 증거 되고 믿는 무리가 생기고 이들에게 율법주의자가 들어오고 영지주의자들이 들어오고 여러 가지 논란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논란과 다툼이 일어나는 곳에는 반드시 분노가 일어납니다. 자기들의 주장이 옳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조용히 기도하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살아서 중보자로 일하고 계심을 믿고 한 걸음 물러서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손을 위로 들고 기도하는데 그 의미를 생각해 보자면 손을 듦이 항복이라고 봅니다. 내가 손으로 이루어내는 일이 아니라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빈손 들고 주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9-10절입니다. ‘이와 같이’ 남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한 것처럼 여자들도 이렇게 기도하라고 합니다. 15절까지 여자들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자들도 분노와 다툼이 일어납니다. 세상의 자랑이나 교회 안에서의 자랑들이 나오면 분노와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으로 단장하지 말고 염치와 정절과 선행으로 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자들에게 마땅하다고 합니다. 남자나 여자나 분노와 다툼이 아니라 주께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까?

 

끝으로 한곳의 말씀만 더 봅니다. 디모데전서 5:5-6절입니다. “5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6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교회 안의 과부에 대한 문제를 말씀하시는 본문입니다만 기도에 관한 내용이 있습니다. 참 과부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니 죽은 자라고 합니다. 우리는 산자 입니까? 죽은 자 입니까?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주야로 항상 기도하는 자가 산자입니다. 그러므로 주께 소망을 두고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는 참 과부의 심정이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