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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 설교] 

예레미야 1:11~19 무엇을 보느냐? 2013. 4. 3

 

11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매 내가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12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라 하시니라 13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끓는 가마를 보나이다 그 윗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졌나이다 하니 14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의 모든 주민들에게 부어지리라 15 내가 북방 왕국들의 모든 족속들을 부를 것인즉 그들이 와서 예루살렘 성문 어귀에 각기 자리를 정하고 그 사방 모든 성벽과 유다 모든 성읍들을 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16 무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들에 절하였은즉 내가 나의 심판을 그들에게 선고하여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징계하리라 17 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령한 바를 다 그들에게 말하라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지 않게 하리라 18 보라 내가 오늘 너를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지도자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 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19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오늘 하루를 살면서도 여러 가지 많은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 많이 본 것 중에 남아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아침에 교회당으로 오면서 아파트 화단에 자그마한 나무에 아주 예쁜 꽃이 핀 것을 보았습니다. 목련은 거의 다 졌고 벚꽃도 지고 있는데 이 꽃은 새롭게 피고 있었습니다. 봉오리가 자그마한데 분홍과 붉은 빛이 함께 어울린 꽃인데 이름은 모르겠습니다. 그 꽃을 보면서 이렇게 예쁜 꽃들이 피어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기 보다는 꽃가루 알레르기로 꽃이 피는 것이 괴롭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어도 늘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11절을 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또 임합니다. 예레미야에게 여호와께서 네가 무엇을 보느냐고 묻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환상을 통하여 예레미야에게 보여주시면서 네가 무엇을 보느냐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환상을 보여주시지 않으시고 예레미야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고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네가 무엇을 보느냐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환상을 보여주신 것으로 봅니다. 그 이유는 예레미야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았다는 대답에 잘 보았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살구나무가지를 보았는데 잘 보았다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살구나무라는 히브리어가 지켜 행한다는 말과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살구나무]는 [샤케드]인데 [지키다]는 [샤카드]입니다. 구약의 히브리어가 처음 기록될 때에는 자음으로만 기록되었습니다. 자음으로만 기록되었다는 것은 읽기위한 글이기 보다는 뜻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모음은 후대의 서기관들이 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구나무]라는 말과 [지키다]는 말의 자음이 꼭 같습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가 살구나무 가지를 본다는 대답에 잘 보았다고 하시면서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신명기 7:6~10절을 봅니다. “봉독”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기뻐하시고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신 것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아서가 아니라고 합니다. 수로 비하면 다른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자체적인 조건으로 택하심을 입은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 택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또 그들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종 되었던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알라고 합니다.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천대 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지만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여호와는 신실하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신실(信實)이란 사람의 말에 열매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신실하시다는 말씀은 자신의 말을 반드시 지켜서 이루어내신다는 것이 바로 살구나무가지를 보여주신 이유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말씀을 지켜 이루어내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천대까지 언약을 이행하시지만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는 즉시 보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만 보면 인과응보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언약을 체결하였기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신의 말씀을 신실하게 지키시기 위하여 일방적으로 인도하여 내시고 이제부터 내 말을 잘 들으면 너희가 만국 가운데 제사장의 나라가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언약의 동의하고 피를 뿌려서 언약을 체결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시내산에서도 반역하였고 광야에서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반역하였기에 지금 여호와께서 이들에게 심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3~15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임합니다. 이번에도 묻습니다. 네가 무엇을 보느냐? 이번에는 끓는 가마를 봅니다. 그리고 그 윗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 환상을 보여주신 것은 바로 앞의 살구나무를 보여주신 것과 연결을 해서 보아야 합니다. 살구나무를 보여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지켜서 행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의 내용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북방으로부터 재앙이 임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의 문장은 가장 강조하는 말이 제일 앞에 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어 어순으로는 북방으로부터 재앙이 온다는 말입니다. 그 재앙이 이 땅의 모든 주민들에게 부어진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북쪽은 앗수르와 바벨론이 있는 곳입니다. 앗수르가 북 이스라엘을 BC722년에 멸망시켰습니다. 그런데 앗수르가 약하여지면서 바벨론이 일어나는 중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하는 것은 장차 북방의 세력인 바벨론에 의하여 남쪽의 유다가 멸망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끓는 가마가 남쪽으로 기울어진 것을 보았다는 것은 북방의 세력인 바벨론이 유다를 공격할 것으로 본 것입니다. 그 북방 왕국의 모든 족속들을 하나님께서 부르십니다. 그들이 와서 예루살렘 성문 어귀에 각기 자리를 정하고 그 사방 모든 성벽과 유다 모든 성읍들을 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왜 북방 세력이 예루살렘을 공격하기 위하여 오는 것입니까?

 

16절입니다.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들에 절하였습니다.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이란 단지 형상물만이 아닙니다. 자기의 마음과 생각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줄 그런 신들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심판을 그들에게 선고하여 그들의 모든 죄악을 징계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예레미야 선지자가 본 것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해석입니다. 살구나무가지를 통하여 하나님은 반드시 자기의 말을 지킨다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북방으로부터 재앙이 임할 것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가지고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여 설교한 자들이 많습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것도 북쪽으로부터 발발되었기에 그렇게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북한의 도발을 그렇게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그렇게 보는 자들이 있습니다. 기도 많이 한다는 사람들이 몇 년 전에도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난다고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예언한 날이 지나자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셨다는 식으로 피하여 갔습니다. 지금도 신사도계열의 사람들은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에서 일어날 일들을 수시로 계시 받았다고 예언을 합니다. 그래서 신사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북한의 도발에 대하여도 그쪽의 사람들은 예언을 할 것입니다. 특히 예레미야의 이 말씀 끓는 가마가 기울어진 것으로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리신 것입니다. 에스겔서 16:44~52절을 봅니다. “봉독” 지금 남 유다에 대한 책망의 말씀입니다. 그 아버지가 아모리 사람이며 그 어미는 헷사람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와 이삭과 야곱의 후손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들이 가나안 사람들의 우상을 섬기고 있기에 그 부모를 가나안 사람이라고 하시면서 세 딸을 이야기하는데 큰 딸은 사마리아며 둘째는 유다며 막내는 소돔을 말합니다. 그런데 소돔과 사마리아는 유다의 절반도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남 유다를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의 적용이 이스라엘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 시대는 어떻게 말씀을 보고 적용을 해야 합니까? 오늘 이 시대는 모든 사건을 다 종말론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이 약 2천 년 전입니다. 그 다 이루심을 통하여 부활승천하시고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성령이 모든 육체에 부어지는 것은 요엘서 2장의 예언대로 종말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이 오순절에 임하였기에 그 성령이 임한 사도들이 증거 한 것은 이 세상 역사의 발전이나 영광을 예언한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으라는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구약을 보는 것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하여 회개가 무엇인지 보는 것입니다.

 

17~18절입니다. 예레미야에서 허리를 동이고 여호와께서 명령한 것을 다 그들에게 말하라고 합니다. 이들에게 말할 것은 북방으로부터 임할 재앙을 말해야 합니다. 여기서 예레미야의 말을 들어야 할 자들은 18절에 나옵니다.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지도자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입니다. 이들은 지금 거짓 선지자들에 의하여 거짓 평안의 말을 듣고 있습니다. 유다는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예루살렘과 그 안의 성전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호하실 것이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선지자는 재앙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두렵고 떨립니다. 그들에게 배척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지 않게 하시겠다고 하시면서 그들 앞에서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 성벽이 되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이 너를 치지만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전해야 할 예레미야는 수많은 고난을 당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여 주신다고 말씀하셨지만 그가 받을 고난을 피하게 하여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셔서 견고한 성읍과 쇠기둥과 놋 성벽이 되게 하셨다는 것은 모든 백성과 왕들과 지도자들과 제사장들이 다 반대하여도 여호와의 말씀인 재앙을 선포하게 하시고 결국 재앙이 일어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 이루시고 성령을 보내심으로 인하여 종말을 예언한 것이 벌써 2천 년 전입니다. 그때로부터 종말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오셔서 죽임을 당한 곳에서 우리가 무슨 발전과 희망과 영광을 보려고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미움 받고 배척받은 것처럼 자기 백성도 미움 받고 배척받는 곳이 이 역사라는 공간입니다(요15:18~20). 그런데 왜 2천 년이나 지났는데 예수님께서 재림하지 않으셨는지 물으신다면 종말이 임하고부터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역사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다 찾아내기까지 임시로 보존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가 되고 자기 백성이 다 찾아지면 눈에 보이는 이 하늘과 땅이 불에 살라지는 것입니다(벧전3장).

 

그러므로 우리가 신약시대에 구약을 보는 것은 구약의 예언들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의 말씀하신 바를 얼마나 신실하게 지켜내셨는지 살구나무 가지를 통하여 자기의 말씀을 지키신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살구나무를 보는데 여호와께서 그 살구나무를 통하여 자신의 말씀을 얼마나 신실하게 지키시는지를 말씀하시면서 북방에서 재앙이 일어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남 유다는 북쪽의 나라인 바벨론에 의하여 BC586년에 멸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다시 남은 자를 돌이키시고 장차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게 하였습니다. 그 메시아가 오셔서 세상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요한복음 4:35~38절입니다. “35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37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38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이미 종말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셨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사도들도 종말론적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한 송이 이름 모를 들꽃이 피었다가 지는 것을 보면서도 종말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벧전1:2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