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설교 바로듣기]  [음성설교 다운받기]


 

전도서 1:1~3 모든 것이 헛되도다! 2018. 10. 24

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오늘부터 전도서를 보겠습니다. 전도서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코헬렛이라고 합니다. 1절과 2절의 전도자라는 말이 코헬렛입니다. 이 말은 카할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카할은 모은다는 뜻이며 명사로는 회중을 말합니다.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이는 것을 카할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70인 역에서는 에클레시아스테스로 번역합니다. ‘에클레시아어디에서 부름을 받아 모인 무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신약의 교회와 연결되는 단어로 구약의 카할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전도서라는 말은 그렇게 부름 받은 자들 앞에서 말하는 전도자라는 뜻입니다.

 

본문 1절입니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이라고 합니다. 다윗의 아들은 솔로몬을 말합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일천 마리의 번제를 드립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시자 솔로몬은 자신이 왕이 된 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다윗 언약임을 고백하면서 자신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이 많은 백성을 인도할 지혜를 달라고 합니다. 그 지혜는 듣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솔로몬에게 전무후무한 지혜를 주시고 부와 영광도 주셨습니다(왕상3). 그 결과 잠언 삼천을 말하고 노래 첫 다섯 편이며 혼자서 백과사전을 저작할 정도의 지혜를 가진 자가 되었습니다(왕상4). 이러한 지혜와 영광을 가진 자가 헛되다고 합니다.

 

본문 2~3절입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합니다. 솔로몬의 지혜와 부와 영광과 권력을 가지고 사람이 해 보고 싶은 모든 것을 다 해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모든 것을, 해 아래서 행할 수 있는 모든 즐거움을 다 찾아서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결론은 헛되다는 것입니다. 해 아래 수고하는 모든 것이 헛되고 의미 없는 일들이라고 합니다. 물론 해 아래서 수고하는 것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분복을 누리는 것을 복이라고도 합니다만 그러나 그것도 해 아래 있기에 영원하지 않은 것입니다.

 

솔로몬이 모든 인간 중에 가장 뛰어는 지혜를 받아서 모든 것을 다 누려보고서 헛되다고 하는데도 우리는 그런 헛된 것을 추구하면서 살아갑니다. 어떤 분은 그런 헛된 것이라도 누려보고서 헛되다는 것을 알면 좋겠다고 합니다. 이런 말은 그런 헛된 것을 추구하려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미 헛된 일이라고 한 것을 다시 해 보려는 것은 지혜자의 말을 듣지 않는 어리석은 자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이 헛됨을 추구하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주 말씀을 드립니다만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 인생들이기에 허무한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2:7절에서 하나님께서 처음에 사람을 흙으로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생령이 되었다고 합니다. 생기란 하이네샤마라는 두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살아있는 기운이 아담의 코에 들어오니 생령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의 생령도 하이네페쉬입니다. 그러면 이런 인간이 타락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지면 육신이 됩니다. 육신을 바사르라고 합니다(6:3). 그러므로 네페쉬라는 한 단어로 생물, 목숨, 몸이라고도 하지만 시체도 네페쉬라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욕심과 성욕과 탐욕과 소원도 네페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이 떠난 사람은 갈망하는 인간(네페쉬)으로 살다가 몰락하는 인간(바사르)이 됩니다.

 

이사야 2:22절입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인생을 의지하지 말라고 합니다. 인생은 수에 칠 가치도 없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인생이 아담입니다. 하나님의 숨결이 떠나버린 인생들의 호흡이 그 코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것은 하이’ ‘네샤마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인생의 호흡은 하이가 없는 네샤마입니다. 살아있는 기운이 아니라 이미 죽은 기운이라는 의미이기에 수에 칠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육신의 호흡으로 무엇을 구하는지 봅니다.

 

이사야 55:1~2절입니다. “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참된 생명의 양식은 값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을 줄 수 없는 헛된 양식을 위하여 사람들이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헛된 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실상을 알지 못하기에 사람들은 여전히 헛된 양식을 위하여 평생을 수고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입니다(딤후1:10). 그런데도 생명 없는 썩어질 것들을 평생 구하며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숨결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들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너희 영혼이 살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며 이것이 영원한 언약입니다. 그 영원한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아브라함과 다윗의 언약을 따라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2~3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 이 본문의 말씀은 창세기의 말씀과 이사야서의 말씀을 연결하여 읽어보면 헛되게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헛된 것이지만 헛된 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이 세상의 신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눈과 귀를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고후4:4).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을 듣고 믿는 것은 이 세상의 신을 십자가로 이기신 예수님께서 듣게 해 주셔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살아 있다고 하지만 죽은 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를 다니면서도 생명도 아닌 것과 썩어질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여기고 산다면 아직 죽은 자입니다.

 

시편 2:1~6절입니다. “1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3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4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5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세상이 늘 요란한 것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 상태로 스스로 살아남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상을 하나님은 비웃으시면서 따로 왕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 왕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왕에게 입을 맞추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십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헛된 일에 분요하게 살아갑니다. 이 나라만이 아니라 세상의 여러 나라들의 지도자라는 자들의 요란함이 매일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지만 이 모든 일들이 생명 없는 헛된 일에 분요합니다.

 

시편 39:4~7절입니다. “4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5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6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7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다윗은 자신의 연약함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들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날이 한 뼘 길이 밖에 안 되고 주 앞에서는 없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사람이 든든히 섰다고 할 때도 거저 그림자가 같이 다니며 헛된 일로 소란하지만 그것을 누가 거둘지 모른다고 합니다. 다윗이 왕이 되고 솔로몬이 왕이 되어도 그들의 모습들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허무함을 아는 자들이 지혜자이며 이런 자들은 주께 소망을 둡니다.

 

시편 62:5~8절입니다. “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6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7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8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구원 받은 백성은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그렇지 못한 자는 인생만 의지하게 됩니다.

 

이어지는 9~10절입니다. “9 ,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10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사람 곧 아담이 입김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저울에 달면 입김보다 가볍다고 합니다. 여기의 입김이 오늘 전도서 본문의 헛되다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사람을 저울에 달면 저울에 달 것도 없는 헛것이라는 말입니다. 바벨론 제국의 벨사살 왕도 저울에 달아보니 너무 가벼워서 끝이 난 것입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자신이 헛된 인생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지혜는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도 새 언약을 말하고(31:31) 새 영을 말하고(36:26)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하는 것입니다(65:17). 아담의 타락 이후로 모든 인생들이 허무하게 살다가 허무하게 끝이 나야 하는 인생들입니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채우려고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식으로 살아가다가 결국은 허무하게 몰락해 가는 인생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인생의 허무함을 알게 하시고 이런 자들에게 새로운 생명이 부어져야 함을 성경은 계시합니다.

 

창세기 4:1~2절입니다. “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1)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2)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아담의 타락 이후에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여 가인을 낳습니다. 가인의 이름의 뜻을 여호와께로부터 득남하였다고 해서 가인이라고 짓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인의 후손을 주신다는 약속을 하셨기에 하와는 그 아들로 생각하여 가인이라고 지었습니다. 다시 동침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아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로부터 얻었다고 한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것입니다. 가인은 농사를 짓고 아벨은 양을 치는 자였습니다. 둘 다 자신의 소출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가인의 것은 받지 주지 않고 아벨의 것을 받아 주셨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드렸다고 히브리서는 말씀하지만 이미 타락한 인간의 것을 하나님께서 받아주시지 않으셔도 마땅하십니다. 그런데 받아주신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과 긍휼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이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아벨을 살해합니다.

 

그런데 이 아벨의 이름이 오늘 본문에서 헛되다고 하는 헤벨과 같은 단어입니다. 헤벨이라는 단어와 아벨이라는 단어가 자음과 모음까지 똑 같습니다. 그러므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다는 이 헛되다는 이름을 아벨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받아 주시고 그 피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배척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피를 흘린 사가랴의 피까지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고 하셨습니다(23:35). 가인이 아니라 허무한 아벨의 피가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4:16~24절입니다. “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4)놋 땅에 거주하더니 17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18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19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0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23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가인의 삶이 허무합니까? 아벨의 삶이 허무합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은 아벨의 삶이 허무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인의 삶이 영원히 허무한 삶이 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복음을 듣습니다. 복음은 생명과 썩지 아니할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다 이루셨다는 그 내용들이 우리 안에 담기는 것이 허무하지 않는 인생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이 우리 안에 담겨지기 위하여 세상의 허무한 것들이 털려 나갑니다. 비워집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만이 담기게 됩니다. 이 생명을 담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그 생명을 불어넣으십니다.

 

요한복음 20:22절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두려워 문을 닫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입니다. 성령이 헬라어로 프뉴마이지만 히브리어로 하면 루아흐입니다. 여기서 숨을 내신다는 단어도 히브리어로 번역을 하면 하나님께서 아담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신다는 단어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인 이유는 가인의 삶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배신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시고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면 그제야 가인의 삶이 헛됨을 알고 아벨의 삶이 헛된 것이 아니라 생명의 길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아벨의 삶이 생명의 길임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이 역사 속에서 성도에게 일어나는 일은 환난입니다. 고난입니다. 그 환난과 고난을 통하여 세상의 허무함을 알게 하시고 세상이 보면 저주 받아 허무하게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헛되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헛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