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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27:3~12 분노와 질투 2018. 6. 20

 

3 돌은 무겁고 모래도 가볍지 아니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분노는 이 둘보다 무거우니라 4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 5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6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7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1)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 8 고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으니라 9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 10 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를 버리지 말며 네 환난 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지어다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나으니라 11 내 아들아 지혜를 얻고 내 마음을 기쁘게 하라 그리하면 나를 비방하는 자에게 내가 대답할 수 있으리라 12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본문 3절을 봅니다. 돌이 무겁고 모래가 무거운 것은 누구나 압니다. 그런데 돌과 모래를 합한 것보다 더 무거운 것이 미련한 자의 분노라고 합니다. 왜 이런 표현을 성경이 하고 있는 것입니까? 잠언에서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는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자를 말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다는 것은 자신이 피조물이며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주임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은 자신들의 분노가 아주 의롭고 정당하다고 여기기에 고쳐지지 않는 것입니다.

 

4절입니다.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설 수 있겠느냐고 합니다.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다는 이 표현을 직역하면 분노의 잔인함과 격분의 홍수입니다. 3절에서 돌과 모래보다 무거운 것이 미련한 자의 분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노보다 더 무거운 것이 투기라고 합니다. 3절에서는 미련한 자의 분노라고 하는데 4절에서는 특정 사람이 언급되는 것이 아니라 분노와 질투를 주어로 말하고 있습니다. 3절과 연결하면 미련한 자의 분노로 볼 수 있지만 3절과 연결하지 않으면 4절은 분노와 질투에 대한 의미만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이러한 분노와 질투가 무엇인지 중점적으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성경에서 처음 분노가 일어나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하나님께서 분노하십니다. 명시적으로 분노하셨다고는 나오지 않지만 이미 선악과를 따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뱀의 유혹을 받아 아담과 하와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아오십니다. 그러자 아담은 자신이 벌거벗었음으로 두려워하여 숨었다고 합니다. 두려움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3:10).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먹지 말라고 한 열매를 먹었느냐고 하시자 아담은 하나님께서 주신 여자가 주어서 먹게 하였다고 하나님과 여자 핑계를 됩니다. 여자는 뱀을 핑계됩니다. 하나님께서 뱀을 저주하여 땅을 기어 다니게 하시고 하와에게 해산의 고통을 아담에게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 것이라고 하시지만, 놀랍게도 뱀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지만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하시는 복음을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옷을 입히시고 에덴동산에서 추방합니다. 추방되고 나서 낳은 아이가 가인과 아벨입니다.

 

창세기 4:3~8절입니다.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3)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지난주일 오전에 기도와 평강이라는 말씀을 드릴 때에 언급한 내용입니다만 오늘은 분노라는 내용을 보려고 이 본문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아벨의 제사를 받아주시자 가인이 분노한 것입니다. 가인이 몹시 분노하여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고 여호와께서 왜 분노하며 안색이 변하느냐고 합니다. 네가 선을 행한다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고 합니다. 선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문에 엎드려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죄가 너를 원하지만 너는 죄를 다스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가인은 죄를 다스리지 못합니다. 죄를 다스리라는 것은 분노를 다스리라는 말과 같습니다. 분노를 다스리지 못함으로 아벨을 들로 데리고 나가서 돌로 쳐 죽이는 것이 인간의 처음 분노입니다.

 

인간이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미 타락하였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먹으라고 뱀이 유혹할 때에 어떻게 유혹합니까? 네가 그것을 먹으면 너도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져 선과 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될 줄 알기에 금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 유혹에 넘어가서 선과 악을 알게 되는 나무의 과일을 먹음으로 인하여 피조물인 주제에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게 됩니다. 인간이 분노하게 되는 근본 원인이 이것입니다. 이렇게 타락한 인간은 자기를 중심으로 선악을 판단하기에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언제나 화를 내기 마련입니다.

 

창세기 3:22~24절입니다. “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선악을 알고 판단하는 일은 하나님만이 하셔야 하는데 피조물이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되었으니 이들이 그 판단으로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 먹고 영생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에덴동산에서 추방합니다. 생명나무는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선물로 주어져야 하는데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자신의 선악의 판단을 따라 자기의 행위로 생명을 취하면 안 되기에 추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어 아담과 하와가 가인과 아벨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가인이 아벨을 살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이 개입되자 이미 선악의 판단을 자기중심으로 하는 인간이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노한 가인이 아벨을 살해한 것입니다.

 

가인의 이런 모습이 타락한 인간의 미련하고 어리석은 분노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다 이러한 미련하고 어리석은 분노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언제나 옳다고 여기기기에 돌과 모래보다 더 무거운 것이 미련한 자의 분노인 것입니다. 이러한 미련한 자가 질투를 하면 분노의 잔인함과 진노가 홍수처럼 밀려오는 것보다 더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인간들이 가득하게 사는 세상은 늘 분노와 질투가 끊어질 날이 없습니다.

 

지금 러시아 월드컵을 하고 있습니다. 정정당당한 스포츠 정신이 어떻다고 말하지만 경기하는 모습을 보면 심판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교묘하게 반칙을 합니다. 경기에 이기고 짐에 따라 온 나라가 환호하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합니다. 선수가 실수하면 온갖 악성 댓글을 답니다. 자신의 분노를 그런 곳에다가 쏟아 붓습니다. 군산에서는 술값 시비로 방화를 해서 여러 사람이 죽고 다쳤습니다. 어느 재벌 부인은 온갖 욕을 입에 달고 살다가 고발을 당하니 분노조절 장애라는 진단서를 제출합니다. 그러나 포토라인에서나 재벌들의 모임에서는 분노하지 않습니다. 자기 분노를 조절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만만한 자들에게 갑 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가나 개인이나 분노가 일어나는 것은 자기를 중심으로 선악을 판단하여 자신이 옳다고 여기기에 분노합니다.

 

본문 5~6절을 표준 새 번역으로 봅니다. “5 드러내 놓고 꾸짖는 것이, 숨은 사랑보다 낫다. 6 친구의 책망은 아파도 진심에서 나오지만, 원수의 입맞춤은 거짓에서 나온다.” 면책(面責)이라는 말은 대면한 자리에서 책망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숨은 사랑보다 낫다고 합니다. 면책을 받을 때는 비록 아프지만 그러나 친구의 책망이 진심에서 나온다면 아파도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원수의 입맞춤은 진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거짓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분노할 때에 그 사람이 옳다고 동조를 하면 분노하는 자가 좋아할 것입니다. 그런데 면책을 하면 서로 원수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면책을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은 미련한 자가 아니라 지혜로운 자입니다.

 

7절입니다.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달다고 합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단지 이런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 나오는 분노와 질투에 대하여 책망하는 것과 연결하여 보면 지금 분노하는 자에게 책망할 때에 자신이 의롭다고 여기는 자는 결코 책망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정말로 죄인임을 아는 사람은 책망도 달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경험은 어떻습니까? 대 놓고 책망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조그마한 지적에도 우리는 가인처럼 안색이 변하는 자들입니다. 그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여 상대를 살해하려고 하는 의지로 충만해 집니다.

 

8~10절입니다. 고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다고 합니다. 고향을 잃고 떠도는 사람은 둥지를 잃고 떠도는 새와 같다고 합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그런데 고향을 떠난 자는 면책할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있는 사람은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과 같이 즐거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를 버리지 말라고 합니다. 이들은 권면하고 충고해주는 사람들이기이 때문입니다. 환난 날에 형제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고 합니다. 가까운 이웃이 피붙이 보다 나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나눈 형제자매입니다. 세상의 피붙이는 이 세상으로 끝이 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눈 자들은 영원한 생명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가나안 교인이 많다고 합니다. 교회에서 전혀 복음이 전해지지 않아서 안 나간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인간관계에 얽히는 것이 싫어서 나가지 않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서로 권면하고 서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둥지 잃은 새와 같습니다.

 

11~12절입니다. 내 아들아 지혜를 얻고 내 마음을 기쁘게 하라 그리하면 나를 비방하는 자에게 내가 대답할 수 있으리라고 합니다. 지혜자의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혜의 아버지를 비방하는 자들에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지혜의 책망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지혜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씀의 책망을 받지 않고 오히려 분노하는 자는 자신이 옳다고 여기기에 결국 어리석은 자로 해를 받을 것입니다.

 

시편 2:1~11절입니다. “1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1)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3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4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5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9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10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12 그의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고 있습니다. 세상 나라가 늘 요란하고 분노하면서 서로 이합집산(離合集散)을 합니다. 나라들끼리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나 종교적인 단체들도 서로의 이익을 위하여 이합집산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단체들도 이합집산을 하면서 자기들의 덩치를 키우려고 합니다. 우리가 속한 교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유한국당의 초선 의원들이 살아남기 위하여 기존의 의원들 목을 쳐야 한다는 메모가 공개된 것을 보았습니다. 인간사 모든 곳에서 이렇게 하는 이유는 여호와와 그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매이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속성이 그대로 나옵니다. 우리가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면서 살아가겠다고 합니다. 이런 세상을 하나님은 비웃으시면서 시온에 왕을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그 아들에게 입 맞추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그 진노가 급하시기에 여호와께 피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시편 7:11~16절입니다. “11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12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13 죽일 도구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가 만든 화살은 불화살들이로다 14 악인이 죄악을 낳음이여 재앙을 배어 거짓을 낳았도다 15 그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16 그의 재앙은 자기 머리로 돌아가고 그의 포악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세상은 하나님의 진노를 모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자만이 여호와의 진노를 알고 그를 찬양합니다.

 

시편 76:6~10절입니다. “6 야곱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이 잠들었나이다 7 주께서는 경외 받을 이시니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 8 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매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나니 9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심판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 (셀라) 10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주님의 분노 앞에 세상은 조용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분노를 아는 자들은 주를 찬송할 것입니다. 그 남은 노는 주께서 금하십니다.

 

요나서 4:9~11절입니다.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 넝쿨을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나는 선지자입니다. 니느웨성에 가서 회개를 선포해야 할 선지자가 니느웨 성이 회개하면 망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다시스로 도망가다가 풍랑으로 바다에 던져지고 물고기 뱃속에 삼일을 있다가 니느웨로 온 요나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니느웨 성이 망하는지 보려고 언덕에 있는데 하나님께서 박 넝쿨로 그늘을 만들어 주시니 기뻐하다가 다음날 말라 죽게 되자 죽는 것이 낫겠다고 합니다. 박 넝쿨 하나가 말라 죽는 것이 자기와 관계가 있는 것이기에 분 내어 죽기까지 하여도 합당하다고 합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자신들이 분노가 언제나 옳다고 주장하기에 세상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 같이 복음의 교제를 하다가도 서로 갈라섭니다. 서로가 자기가 옳다고 주장합니다. 상대방을 비난합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 자신이 선악의 주체가 되어있음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분노는 비록 책망을 하시고 심판을 하시지만 그들을 돌이키게 하시는 것이며 그 질투는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스가랴 8:1~3절입니다. “1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 2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 3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만군의 여호와의 질투와 분노는 멸망한 시온에 돌아오셔서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시겠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고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진리의 성읍은 건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백성들을 말합니다. 이러한 일을 만군의 여호와의 질투와 분노로 열심히 이루어내십니다. 하나님의 분노와 질투는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입니다(20:5, 34:14).

 

분노와 질투에 대하여 잠언서과 시편과 스가랴서를 살펴보았습니다. 인간이 분노하는 이유는 타락한 인간이 자기를 중심으로 선악을 판단하기에 분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을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그 심판은 하나님의 아들을 시온에 세우시는 방식입니다. 그 아들에게 입을 맞추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급하십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왕으로 세우시는데 그 모습이 고운 모양도 없고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 앞에 엎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히브리서 10:26~29절입니다. “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이 본문의 앞뒤를 보면 율법은 그림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짐승의 피가 아닌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인하여 온전하게 된 자들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런 자들은 주의 오심이 가까움을 아는 자들입니다. 주님 오시는 그 날에 이 세상의 심판의 기준은 딱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기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에게 입을 맞추어야 진노를 받지 않습니다. 그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에 대하여 하나님은 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고 하시는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자는 분노가 찬양이 되며 그 남은 분노는 주께서 금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