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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30:10~17 비방하지 말라 2018. 9. 19

 

10 너는 종을 그의 상전에게 비방하지 말라 그가 너를 저주하겠고 너는 죄책을 당할까 두려우니라 11 아비를 저주하며 어미를 축복하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 12 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면서도 자기의 더러운 것을 씻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 13 눈이 심히 높으며 눈꺼풀이 높이 들린 무리가 있느니라 14 앞니는 장검 같고 어금니는 군도 같아서 가난한 자를 땅에서 삼키며 궁핍한 자를 사람 중에서 삼키는 무리가 있느니라 15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오 다오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16 곧 스올과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이니라 17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오늘 본문에는 숫자 잠언이 들어있습니다. 숫자 잠언이란 15~16절의 둘과 서넛 등으로 나옵니다. 다음 주에 볼 18~31절은 전체가 숫자로 되어 있는 잠언들입니다. 그런데 10절과 17절은 숫자와 상관없이 비방과 조롱에 대한 내용이 있어서 제목을 비방하지 말라고 정하였습니다. 본문에서 제목을 정하는 것은 그 부분을 좀 강조한다는 뜻이지 전체를 담아내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제목을 너무 마음에 두지 말고 잠언의 특징인 한 절 한 절의 의미를 보시면 됩니다.

 

본문 10절입니다. 너는 종을 그의 상전에게 비방하지 말라 그가 너를 저주하겠고 너는 죄책을 당할까 두려우니라처음에 읽을 때는 사람이 어떤 종을 그의 상전에게 비방하지 말라고 읽었습니다. 이것은 별 무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의 대명사 그가라는 것이 종인지 종의 주인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선은 종의 주인으로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 종을 그 종의 주인에게 비방하는 것을 종이 들을 수 없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남의 주인이 자기의 종을 비방하는 것을 그 종의 주인이 싫어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른 번역을 비교해 보니 대명사인 그를 전부 종으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주석들을 살펴보니 딱 한 사람이 화이브래이라는 사람이 저주하다의 주어를 그 종의 주인으로 본 것입니다. 주인의 종을 비방한 자에게 강력하게 항의한다고 한 것입니다. 저는 이 사람의 주석이 반가운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본 이유는 로마서 14:4절의 말씀 때문입니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음식문제와 날짜 지킴의 문제에 있어서 같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서로 비방하는 것에 대하여 바울사도가 책망한 것입니다. 남의 하인을 왜 비판하느냐고 합니다.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신앙고백을 한 형제로서 믿음이 연약한 자를 비방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종이 저주한다는 것도 살펴볼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난한 자들의 하소연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품삯을 제대로 받지 못하거나(24:15), 가난하여 겉옷을 저당 잡혔는데 저녁에 돌려받지 못하여 추워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하십니다(22:27). 가난한 자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품삯을 제대로 주지 않는 자나 겉옷을 돌려주지 않은 자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종을 비방함으로 그 종이 해고를 당하거나 어려움에 처하여 부르짖는다면 비방한 사람이 죄책을 당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7:1~5절입니다.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오늘 본문 10절에서 다른 사람의 종을 비방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여기까지 연결하여 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다른 복음을 분별해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을 전하는 자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도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형제 안에서 믿음이 연약함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을 비방하고 비판하는 것은 자기 안에 들보가 눈을 가리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자신이 어떠한 죄인인지 알지 못하면 다른 사람의 작은 티가 많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의로 무장이 되어 있는 사람일수록 남을 비방하고 비판합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함으로 자신을 옳게 드러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5:1~7절입니다. “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3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5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6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비방하지 말라는 말씀을 잠언에서 시작하여 마태복음과 로마서 14장까지 연결하여 보면 이렇게 결론이 내려집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받아주심으로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방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 같은 죄인을 받아 주셨다면 약한 자들의 약점을 비방하지 말고 담당하는 것이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고 주를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서 드리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런 사랑과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면 형제의 약함을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짊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비방하는 일이 먼저라면 과연 자신이 주님의 용서를 받은 자인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복음과 십자가를 이야기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어떻게 받아주셨는지를 생각함으로 형제를 대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11~14절입니다. 여기서 무리라는 단어가 각 절에서 나옵니다. 첫째는 11절입니다. 아비를 저주하며 어미를 축복하지 않는 무리가 있습니다. 이 내용은 17절에서 다시 보겠습니다. 째는 12절입니다. 자기 자신은 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면서 자기의 더러운 것을 씻지 않는 무리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남을 비방하는 자들이 이런 자들입니다. 자신은 깨끗하고 바르다고 여기기에 다른 사람을 비방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더러운 것을 씻지 않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다고 비방할 때에 예수님을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너희의 그 속이 더럽다고 하십니다.

 

셋째는 13절입니다. 눈이 심히 높으며 눈꺼풀이 높이 들린 무리가 있다고 합니다. 눈이 높다는 것은 성경에서 교만함으로 말합니다. 잠언 21:4절입니다.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이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이미 앞에서 살펴본 내용입니다. 시편 101:5절입니다. 자기의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로다자기의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자들을 하나님이 멸하신다고 합니다.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자들이 오늘 제목인 비방과 연결이 됩니다. 이웃을 헐뜯는 이유는 그 사람의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죄를 안다면 이웃을 헐뜯을 수도 없고 눈이 높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눈으로 이 세상을 살펴보십니다. 여호와의 눈에서 피하여 숨을 곳이 없습니다. 하늘 위에도, 땅 아래도, 바다 속에도, 스올도 하나님의 눈길에서 피할 곳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101:6~8절을 봅니다. “6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 7 거짓을 행하는 자는 내 집 안에 거주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는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 8 아침마다 내가 이 땅의 모든 악인을 멸하리니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에서 다 끊어지리로다신앙은 하나님의 눈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넷째로 14절입니다. 앞니는 장검 같고 어금니는 군도 같아서 가난한 자를 땅에서 삼키며 궁핍한 자를 사람 중에서 삼키는 무리가 있다고 합니다. ‘무리세대로도 번역되는데 세상이라고 봐도 됩니다. 세상은 늘 부모를 거역하고, 자기를 깨끗한 줄로 착각하고, 눈이 높고, 약한 자를 집어삼키는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무리라는 번역보다 세대라는 번역이 더 좋습니다. 무리라고 번역한 것은 그렇지 않는 자들이 있다는 뉘앙스를 주지만 그런 세대라고 번역하면 모두가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언제 이 세상이, 아니 우리 자신이 이렇게 하지 않고 산 적이 있습니까? 부모에게 정말 순종합니까? 자신이 정말 더러운 자임을 인식하십니까? 눈이 높지 않습니까? 눈이 높으니 매사가 불만인 것입니다. 약한 자를 삼키지 않습니까? 이렇지 않는 세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이 자기 자신임을 성령으로 통하여 인식이 되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본문 15~16절입니다. 숫자 잠언입니다. , 서넛 이런 식으로 잠언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거머리를 말하면서 스올, 아이 배지 못하는 태, 물로 채울 수 없는 땅, 족하다 하지 않는 불이 나옵니다. 이 내용들은 다 자족을 모르는 사람의 탐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거머리에게 두 딸이 있어서 늘 다고 다고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사람의 탐심을 말합니다. 거머리는 사람이나 다른 생물의 피를 빨아 먹는 흡혈 판이 있습니다. 어려서 거머리에 피가 빨리기도 하고 잡아서 놀기도 했습니다. 배설구가 보이지 않아서 배설구가 없는 줄 알았는데 배설구가 있기는 하지만 피를 빨아먹기에 배설할 것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머리로 자족을 모르는 인간의 탐심을 말한 것입니다.

 

거머리로 자족함을 모르는 것을 말하면서 만족을 모르는 것 서너 가지를 말하는데 그 중에 첫째가 스올입니다. 스올을 죽은 자들이 가는 곳으로 무덤이나 죽음의 세계를 말합니다. 아담 이후로 인간들이 다 죽어갔습니다. 이 땅에 태어나서 죽은 자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함에도 스올은 족하다고 하는 법이 없이 계속하여 지금도 사람들이 죽어 무덤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도 자족함을 모르는 인간의 탐심을 말합니다. 오늘도 그 죽음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둘째로 물로 채울 수 없는 땅입니다. 우리나라는 인공적이지 않아도 물이 저장되는 늪이 있습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땅이나 사막지역은 아무리 비가와도 곧 물이 땅으로 스며들어가 버립니다. 그러니 물로 채울 수 없는 땅이라고 합니다. 이것도 역시 자족을 모르는 인간의 탐심을 말합니다.

 

셋째로 아이 배지 못하는 태라고 합니다. 결혼한 여자가 아이를 배지 못하면 수치로 여겼습니다. 고대로 갈수록 더 심하였습니다. 호세아 9:14절입니다. 여호와여 그들에게 주소서 무엇을 주시려 하나이까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젖 없는 유방을 주시옵소서북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배반하였기에 심판을 하여 달라는 내용입니다. 아이 배지 못하는 것이 심판입니다. 불임여성이 들으면 아픈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성경은 그러한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를 배반한 이스라엘의 심판을 말하는 것이며 잠언은 인간의 만족을 모르는 탐심으로 말한 것입니다.

 

넷째로 불입니다. 불은 탈 재료만 있으면 계속하여 탑니다. 겨울철에 가끔씩 강원도 지역에 산불이 나면 얼마나 엄청난 피해가 일어나는지 보았습니다. 잠언 26:20절입니다.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쟁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나무가 있는 한 불이 꺼지지 않습니다. 이것을 말쟁이와 비교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말쟁이가 있는 한 다툼은 쉬지 않는 것처럼 불에 태워질 재료가 있으면 불이 꺼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거머리, 스올, 아이 배지 못하는 태, 물로 채울 수 없는 땅, 꺼지지 않는 불과 같은 이미지로 자족을 모르는 인간의 탐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17절입니다.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합니다. 본문 11절입니다. 아비를 저주하며 어미를 축복하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패역하고 술에 잠긴 자는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고 성읍의 사람들은 그를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합니다(21:18~21). 그러므로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나는 자는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부모의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로 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부모라면 더욱 우리의 자녀들에게 여호와 경외를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부모를 둔 자녀라면 그 부모가 전하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비방하지 말라는 말씀과 자족을 모르는 것에 대하여 보았습니다. 자족을 알지 못하는 서너 가지 중에서 스올에 대하여 말씀을 보고 마무리 하겠습니다. 스올은 죽은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아담 이후로 계속하여 죽었더라! 죽었더라는 역사입니다. 그러함에도 스올은 만족함이 없이 계속하여 죽은 자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죽음이 가두어 둘 수가 없는 분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죽으신지 삼일 만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구약에서 예언합니다.

 

시편 16:8~11절입니다. “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9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2)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10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다윗이 그리스도 영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한 내용입니다. 이러한 시편의 내용을 성령이 임한 사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증거 합니다.

 

사도행전 2:22~32절입니다. “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2)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23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24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25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26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28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 29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30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31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3)이 일에 증인이로다오순절 성령이 임한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스올을 이기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도행전 13:34~35절입니다. “34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이르시되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며 35 또 다른 시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바울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사야 55:3절과 시편 16:10절의 말씀으로 증거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스올을 이기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올로 비유한 만족을 모르는 세상과 인간들에게도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생명으로 오시면 자족을 배우게 됩니다. 거머리와 같고, 스올과 같고,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같고,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같고, 족함을 알지 못하는 불과 같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자족함을 알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가 강 같이 흐를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말씀하신 것입니다(7:38,39).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성령이 임하게 되면 자족도 배우고 자신의 죄도 알게 되기에 형제 비방에도 브레이크가 걸리는 것입니다. 비방하지 말라는 말씀은 이미 앞에서 마태복음과 로마서를 통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알기에 비방하는 입을 닫고 회개하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남의 작은 티를 보면서 비방하기보다 자기 안에 더 큰 들보를 보게 되기에 더 이상 비방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음으로 임한 성령이 우리 안에서 생수로 흘러나오기에 자족도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 외에 더 이상 원할 것이 없다는 것이 자족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안에 가득하여 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