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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13:15~25 근실한 징계 2017. 7. 5

 

15 선한 지혜는 은혜를 베푸나 사악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 16 무릇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행하거니와 미련한 자는 자기의 미련한 것을 나타내느니라 17 악한 사자는 재앙에 빠져도 충성된 사신은 양약이 되느니라 18 훈계를 저버리는 자에게는 궁핍과 수욕이 이르거니와 경계를 받는 자는 존영을 받느니라 19 소원을 성취하면 마음에 달아도 미련한 자는 악에서 떠나기를 싫어하느니라 20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21 재앙은 죄인을 따르고 선한 보응은 의인에게 이르느니라 22 선인은 그 산업을 자자손손에게 끼쳐도 죄인의 재물은 의인을 위하여 쌓이느니라 23 가난한 자는 밭을 경작함으로 양식이 많아지거니와 불의로 말미암아 가산을 탕진하는 자가 있느니라 24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25 의인은 포식하여도 악인의 배는 주리느니라

 

지난주에 생명의 샘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에덴동산에 생명의 나무가 있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생들은 스스로 생명나무로 갈 수가 없습니다. 천사들이 두루 도는 화염검을 들고 지키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스스로 생명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없기에 사람들은 대체물을 생명처럼 여기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세상의 신이 하는 일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이 있으면 다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 마귀의 일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있습니다. 영원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한 백성들을 어떻게 생명의 길로 인도하실까요?

 

제가 부산에 갈 일이 종종 있습니다. 어머니도 계시지만 구역 모임이나 어느 경찰서 신우회 모임 인도를 위하여 갑니다. 그런데 경찰서 신우회 모임이 재송동에 있습니다. 제가 그 교회당을 알고 있지만 오랜만에 가는 곳이라 내비게이션을 켜고 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길이 아닌 다른 길로 자꾸만 우회를 시키는 것입니다. 새로운 길이 생겼는가 하고 따라 가보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좁은 골목길로도 인도합니다. 첫날에는 모임시간 2분전에 겨우 도착했습니다. 이제는 양산으로 가서 멀지만 빨리 갈수 있는 길로 갑니다. 그런데 내비게이션이 왜 우회를 시키는지 나중에 알고 보니 교통상황을 따라 실시간으로 막히지 않는 길로 인도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길도 이렇습니다. 내가 아는 길로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예측하는 길을 미리 설정해 놓고서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합니다. 잘 들어주지 않으면 철야도 하고 금식도 하고 조건을 내어 겁니다. 하나님께서 내 소원만 이루어 주시면 제가 이런 것을 해 드리겠다고 서원을 합니다. 그런데 내가 예측하고 목표를 세우고 가는 그 길이 멸망의 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길을 막아야 합니다. 내 뜻과 다른 길로 인도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그 생명의 길이 죽는 길처럼 보입니다. 우리의 본성상 좁은 문 좁은 길로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부인의 길로 가지 않고 자기 긍정의 길로 가려고 합니다. 이것이 멸망의 길이기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전복(顚覆)시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길을 고집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날 왜 이렇게 괴롭히느냐는 항변이 나옵니다. 전에 한번 예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외국 영화인데 배가 침몰한 것입니다. 그 배에서 탈출하는 주인공이 정말 힘들게 탈출을 합니다. 한 곳을 겨우 벗어나면 다른 곳이 막히는 것입니다. 몇 번이나 죽을 고생을 하면서 탈출하는 중에 하나님의 도움을 얼마나 구하였겠습니까? 그런데 도움은커녕 어려움이 가중되니 나중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발 부탁이오니 도움을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니 방해만 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혹 우리는 이런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도대체 하나님은 왜 나만 갈구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시다면서 왜 나의 환경만 이렇게 힘들게 만드느냐는 항의가 없습니까?

 

하나님의 선지자들도 이런 고민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욥기를 보았습니다. 욥이 까닭도 모르고 하루아침에 재산이 다 날아가고, 자식이 다 죽고, 아내마저 그런 하나님이라면 욕하고 죽으라는 말을 들을 때에도 욥이 입술로 범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이 와서 인과율로 위로한다고 하였을 때에 욥도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태어난 생일을 저주하였습니다. 차라리 태중에서 죽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모습이 원망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 돌아오는 것은 욕과 죽이려고 하는 음모들이기에 하나님을 말씀을 전하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모세도 내가 이 백성들을 낳았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근실(勤實)히 징계하심으로 인도하십니다.

 

오늘 본문 15절입니다. 선한 지혜는 은혜를 베풀지만 사악한 자의 길은 험하다고 합니다. 선한 지혜와 대비되는 내용이 사악한 자입니다. 그러면 선한 지혜를 인격화 하면 선한 자는 은혜를 베풀지만 사악한 자의 길은 험하게 된다고 보면 됩니다. 공동번역입니다. 마음이 어진 사람은 호감을 사지만 속임수를 쓰면 망한다이런 말씀으로 일반적인 세상의 교훈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궁극적인 진리를 말합니다. 선한 지혜 또는 선한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그 선하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이 선한 목자는 은혜를 베푸시지만 악한 자는 멸망의 길로 인도합니다.

 

요한복음 10:7~12절입니다.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선한 목자는 생명의 길로 인도하지만 도둑과 삯꾼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겉으로 보면 어떻습니까? 겉으로만 보면 정말 선한 목자와 같지만 그 속은 이리가 들어있습니다. 이들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간단하게 구별하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바울사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지 사람을 기쁘게 할지를 구별하는 기준으로 말합니다. 사람의 기쁨을 구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교회는 사람을 좋게 합니까? 하나님을 좋게 합니까? 나는 누구를 좋게 하는지 늘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본문 16절을 봅니다.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행하지만 미련한 자는 자기의 미련한 것을 나타내기 마련입니다. 슬기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목자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슬기로운 지식으로 행하지만 미련한 자는 자기의 미련한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방식은 슬기로운 지식 곧 생명의 길로 가는 자들이 아니라 자기의 미련한 것을 위하여 가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물론 스스로 발견하지 못합니다. 미련한 길 곧 멸망의 길을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갑니다. 사람들에게 주장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의 길이 옳다고 주장하는 자가 미련한 자들입니다. 이런 미련한 것들이 들통이 나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이러할 때 우리는 내가 가는 길이 미련한 것임을 알고 회개합니다.

 

17절입니다. 악한 사자는 재앙에 빠져도 충성된 사신은 양약이 된다고 합니다. 심부름을 하는 자가 게으르고 악하면 자기도 망치고 심부름을 시킨 분도 곤란하게 합니다. 그러나 충성된 심부름꾼은 그 보낸 자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전체적인 의미로 보면 악한 사자란 하나님의 계시를 바르게 전달하지 못하는 거짓 선지자로 봐도 됩니다. 이들의 말을 듣고 따르면 거짓 선지자와 함께 멸망의 길로 가게 됩니다. 그러나 충성된 사신은 시키는 대로 하는 자입니다.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자가 아니라 보내신 분의 뜻만 따르는 것입니다. 모퉁이 돌 선교회 이삭목사가 자신은 비전이 없다고 했습니다. 종이 무슨 비전이 있느냐고 하면서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가야 합니다.

 

18절입니다. 훈계를 저버리는 자에게는 궁핍과 수욕이 이르거니와 경계를 받는 자는 존영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세상에서도 통할 수 있는 말입니다. 바른 훈계를 저버리는 자에게는 궁핍과 수욕이 따릅니다. 창원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난 것도 뉴스를 통하여 보았습니다. 이보다 더한 충격적인 사건은 여중생의 나이에 어린이를 유괴하여 살해한 이야기입니다. 뉴스에 나온 이야기를 다 할 수는 없습니다만 어른이나 아이나 간에 바른 훈계를 저버린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우리는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 훈계를 저버린 것입니다. 결국은 수욕이 따라옵니다. 그러므로 훈계와 경계를 받아들이는 자는 존영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은 꼭 그렇지만은 않아 보입니다. 훈계와 경계를 받아들이는 자가 궁핍과 수욕을 당합니다. 훈계와 경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 세상에서 존영을 받고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도 어기지 않고 그대로 순종하신 예수님은 온갖 수모를 다 당하셨습니다. 그 당시 종교적인 존귀와 영광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었습니다. 정치적인 존영은 로마의 황제와 분봉 왕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도들은 어떤 대접을 받았습니까? 예수님과 같은 길로 갔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말씀을 세상의 현실로만 보면 안 됩니다. 잠언의 말씀도 십자가를 중심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버리는 자는 영원한 궁핍과 수치를 당하지만 십자가를 받는 자는 존영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를 우리가 스스로 취할 수가 없기에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분이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19절입니다. 소원을 성취하면 마음에 달아도 미련한 자는 악에서 떠나기를 싫어한다고 합니다. 우리도 소원이 성취가 되면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이 소원이 우리가 평소에 말하는 소원이 아님을 이어지는 말씀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미련한 자는 악에서 떠나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는 악에서 떠나기를 싫어하기에 소원의 성취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소원이 무엇이겠습니까? 악인이 원하는 소원과 의인이 소원하는 것이 전혀 다른 것입니다. 잠언 전체와 성경 전체에서 의인의 소원은 요한복음 1010절에서 본 것처럼 생명과 생명의 풍성함입니다. 그러나 미련한 자의 소원은 생존의 풍성함만을 바라봅니다. 생명도 아닌 썩어질 것들의 풍성함만을 바라는 자들은 미련하여 그 악에서 떠나기를 싫어합니다.

 

요한복음 3:17~21절입니다.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5)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그를 믿는 자는 5)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5)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6)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우리는 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 16절과 17절만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을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지만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함으로 벌써 심판을 받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심판이라는 말은 정죄라는 말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 곧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심판이며 정죄입니다. 그 이름을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주체가 되어 대상화 시킨 예수님을 믿어준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으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까지 다 포함된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내가 십자가에 들리면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3:14~15)하신 말씀을 다 포함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을 얻는 소원을 얻으려고 원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서 나옵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한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 행위가 악하여 예수님께 오지 않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한 자들입니다. 악하고 미련한 자들이 빛으로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앞에서 예를 든 살인한 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들의 의로 가득한 자들도 악한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자기들의 의가 더 좋기에 그 악에서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은혜는 사람이 붙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선물을 받으면 강도나 율법의 의로 흠이 없는 자나 간에 십자가만 붙들게 됩니다. 이것이 악에서 떠나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소원의 성취입니다.

 

20절입니다.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는다고 합니다. 이 말씀이 근묵자흑(近墨者黑)과 같은 말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는 자를 14절부터 보면 생명의 샘물을 마시는 자이며 교훈과 훈계를 받아들이는 자이며 슬기로운 자입니다. 이것은 주의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도 새 언약을 말씀하시고 우리 마음 안에 그 말씀을 새겨주신다고 합니다. 돌과 같은 딱딱한 마음이 부드러운 살과 같은 마음을 주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진 자아와 주체성이라는 것이 무너져 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과 동행하면 지혜의 풍성함으로 나아가지만 이와 반대로 말하고 가는 자들과 사귀면 해를 받습니다.

 

21절입니다. 재앙은 죄인을 따르고 선한 보응은 의인에게 이른다고 합니다. 이 한절만 보면 인과응보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오늘 함께 본 말씀들만 보아도 인과응보로 볼 수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재앙이 주어지는 자와 선한 보응이 주어지는 자를 겉으로만 보고 판단을 합니다. 그런데 현재 재앙을 당하는 것처럼 보여도 궁극적인 선한 보응이 있는 자가 있고, 지금 선한 보응을 받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재앙을 당하는 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의 겉모습을 보고 선과 악의 판단을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진짜 재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끊어진 것이 재앙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보응이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은 자들이 선한 보응을 받은 것입니다.

 

22절입니다. 선인은 그 산업을 자자손손에게 끼쳐도 죄인의 재물은 의인을 위하여 쌓인다고 합니다. 이런 표현은 전도서에서도 나옵니다. 죄인의 재물이 곧 무너지고 결국은 의인을 위하여 쌓여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살펴보려고 하는 내용은 선인의 산업이 자자손손에게 미친다는 것이 세상의 기업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세상의 산업은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이 아일랜드의 9백년 된 기업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도 영원에 비추어 보면 밤의 한 경점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산업을 자자손손에게 물려주기를 원하십니까? 우리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한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23절입니다. 가난한 자는 밭을 경작함으로 양식이 많아지거니와 불의로 말미암아 가산을 탕진하는 자가 있다고 합니다. 세상의 일반적인 교훈으로 받아도 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의 생존이라는 문제에 갇혀버립니다. 가난한 자가 밭을 경작한다는 것을 영적인 양식을 구하는 것으로 보셔도 됩니다. 영적인 양식은 누가 구합니까? 마음이 가난해져야 합니다. 마음이 가난해 진다는 말은 세상의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찾고 구하고 두드리게 됩니다. 이들에게 성령이 임하게 되면 생명의 양식으로 풍성하여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의는 이러한 것들을 탕진해 버리는 것이 불의가 됩니다.

 

25절을 먼저 봅니다. 의인은 포식하여도 악인의 배는 주린다고 합니다. 지난주에도 잠시 본 말씀입니다만 의인이 포식한다는 것은 세상의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를 말합니다. 이들은 생명의 양식으로 포식할 것입니다. 오리게네서의 강해에 이런 하석이 있습니다. 오리게네스는 2~3세기 사람으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대표적인 신학자입니다. 오늘 이 구절을 레위기 강해에서 어떻게 해석하는지 보겠습니다.

 

의인이 먹으면 자기 영혼을 만족시키지만, 불경한 자들의 영혼은 허기가 진다이 구절을 문자적 의미로 이해한다면, 잘못된 말처럼 보일 것입니다. 불경한 자들의 영혼은 열성적으로 음식을 취하며 만족을 추구하지만, 의인은 배고프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바울은 의인이었으며 지금 이 시간까지도, 우리는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를 맞습니다(고전4:11).” “또 굶주림과 목마름 잦은 결식에 시달렸습니다(고후11:27).” 그런데 어째서 솔로몬은 의인은 자기 영혼을 만족시킨다고 할까요? 의인은 중단 없이 늘 살아 계신 빵을 먹으며 하나님의 말씀과 그 분의 지혜이신 천상음식으로 자기 영혼을 채우고 만족시킨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의인이 하나님의 복에서 풍족하게 빵을 먹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2~3세기의 사람도 이렇게 해석을 했습니다.

 

끝으로 24절입니다.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오늘 이 시대에 이 말씀을 그대로 적용하면 부모가 정당하게 자녀를 훈육한다고 매를 들어도 아동학대죄로 신고를 당할 것입니다. 아동학대죄는 아동을 신체학대, 정서학대, 성적학대, 방임하는 것입니다. 친권자라도 이렇게 하면 처벌을 받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자녀의 잘못을 교정하기 위하여 정당하게 체벌을 하는 것도 얼마든지 신체적 학대가 되기에 아동학대죄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성경말씀은 구시대적인 산물로 폐기처분이 되어야합니까? 24절의 말씀은 자녀를 미워하는 것이 매를 아끼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녀가 분명한 잘못을 하였을 때에 그 잘못을 인지시키고 정당한 체벌을 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물론 자기의 분노를 자녀에게 푸는 것은 안 됩니다. 신약은 자녀를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다음에 또 나옵니다. 그때에 한 번 더 다루기로 하고 오늘은 하나님의 징계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간단한 해석을 들었습니다만 이러한 말씀들이 우리의 본성에 맞는 내용들이 있습니까? 타락한 이후의 인간 본성에 맞는 내용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본성으로는 생명의 양식을 찾아가지 않습니다. 영혼의 양식으로 배부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둘째 아들처럼 아버지의 유산으로 세상에서 탕진하며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탕진을 하고나서 정말 배가 고프게 되니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은 것을 알게 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볼 때에 둘째 아들이 사는 땅에 기근을 내린 분이 아버지라고 본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아버지의 집을 찾아오게 만드시는 것이 자식을 사랑하는 분의 근실한 징계입니다.

 

시편 10516~18절입니다. “16 그가 또 그 땅에 기근이 들게 하사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17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8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1)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19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이 기근이 들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양식을 다 끊으셨습니다. 그런데 기근이 들기 전에 하나님께서 요셉을 앞서 애굽에 보내신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이 미워하여 죽여 버리려고 하다가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것은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기를 너희 후손이 사대 만에 이곳으로 돌아오리라는 그 말씀이 성취가 되는 과정입니다. 그 말씀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인간의 죄악들이 드러나고 까닭 없이 고난 받는 자가 등장을 합니다.

 

시편 78:29~35절입니다. “29 그들이 먹고 심히 배불렀나니 하나님이 그들의 원대로 그들에게 주셨도다 30 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욕심을 버리지 아니하여 그들의 먹을 것이 아직 그들의 입에 있을 때에 31 하나님이 그들에게 노염을 나타내사 그들 중 강한 자를 죽이시며 이스라엘의 청년을 쳐 엎드러뜨리셨도다 32 이러함에도 그들은 여전히 범죄 하여 그의 기이한 일들을 믿지 아니하였으므로 33 하나님이 그들의 날들을 헛되이 보내게 하시며 그들의 햇수를 두려움으로 보내게 하셨도다 34 하나님이 그들을 죽이실 때에 그들이 그에게 구하며 돌이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고 35 하나님이 그들의 반석이시며 지존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질린다고 하면서 고기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고기를 주셨습니다. 메추라기 떼를 이스라엘 진중에 보내셨을 때에 이들은 일박이일동안 잠도 자지 않고 거두었습니다(11:32). 그러함에도 그들의 욕심을 버리지 않음으로 그들을 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십니다. 그제야 그들이 구하며 돌이며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간절히 찾았다는 단어가 하나님께서 근실히 징계하신다의 근실과 같은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근실히 징계하셔야만 간절히 찾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그들의 반석이며 지존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구속자임을 기억하였다고 합니다.

 

이어지는 36~39절입니다. “36 그러나 그들이 입으로 그에게 아첨하며 자기 혀로 그에게 거짓을 말하였으니 37 이는 하나님께 향하는 그들의 마음이 정함이 없으며 그의 언약에 성실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38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39 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근실히 징계하시면 그제야 간절히 여호와를 찾지만 숨 쉴 틈만 생기면 다시 반역합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향하는 마음이 정함이 없습니다. 그의 언약에 성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긍휼이 크심으로 그의 언약을 성실하게 지켜내십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죄악을 덮어주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켜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육체이며 가도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언약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상이며 모든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길은 결국 여호와의 근실한 징계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78:70~72절입니다. “70 또 그의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71 젖양을 지키는 중에서 그를 이끌어 내사 그의 백성인 야곱, 그의 소유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72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이렇게 반역하는 백성들을 이끌 목자로 다윗을 세웁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 대하여서도 죄를 범하면 사람 막대기와 인생채찍으로 다스리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버림을 받지 않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다윗 자신도 온전한 목자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다윗도 자신의 주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 백성의 온전한 목자로 아브라함의 언약과 다윗의 언약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십니다. 자기 양들을 자기 목숨을 내어주심으로 인도하여 가십니다. 어느 정도로 근실하게 자기 백성을 이끌어 가십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하나님의 약속을 다 이루시고 그 영을 우리에게 부어주십니다. 이제 우리 앞서서 인도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 안에 오셔서 인도하십니다. 우리 안에 오신 주님을 성령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합니다. 우리 안에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일하고 계십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고 계십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일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성령님의 일하심을 무시하고 살아갑니다. 우리 육체의 소욕들이 성령의 소욕을 무시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욕은 결국 무너집니다. 육체는 한계가 있습니다. 성령은 영원하신 하나님입니다. 결국 우리를 근실하게 징계하셔서 맏아들의 형상을 덧입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셔서 우리를 자신의 백성 삼으시고 우리를 거처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려면 얼마나 더 근실하게 우리를 징계하셔야 되겠습니까? 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습니다. 가짜 자아들이 온통 가득합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의 약속은 십자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언약에 신실하시고 성실하신 하나님께서 근실하게 징계하심으로 자기 백성을 자기의 처소를 삼으시는 일에 실패가 없습니다. 그런데 당하는 우리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괴롭힌다고 여깁니다.

 

시편 119:75절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심판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 때문이니이다 주님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 때문이라고 합니다. 시편 119편은 말씀에 대한 찬송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역사합니다. 우리의 심령과 관절을 찔러 쪼갭니다. 우리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냅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발가벗겨버립니다. 우리의 실상을 보게 하십니다. 이렇게 되어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또다시 자기의 행위로 자기를 치장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어려움을 보게 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성실하게 괴롭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라고합니다. 그러므로 근실하게 징계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사랑의 손길임을 아시고 오늘도 믿음의 길로 울며불며 끌려가는 자들이 성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