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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20:1~10 왕의 진노 2017. 12. 20

 

1 포도주는 거만하게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이에 미혹되는 자마다 지혜가 없느니라 2 왕의 진노는 사자의 부르짖음 같으니 그를 노하게 하는 것은 자기의 생명을 해하는 것이니라 3 다툼을 멀리 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거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 4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하리라 5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라 그럴지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내느니라 6 많은 사람이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 7 온전하게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 그의 후손에게 복이 있느니라 8 심판 자리에 앉은 왕은 그의 눈으로 모든 악을 흩어지게 하느니라 9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냐 10 한결같지 않은 저울추와 한결같지 않은 되는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

 

본문 1절을 봅니다. 포도주는 거만하게 하고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기에 이에 미혹되는 자마다 지혜가 없다고 합니다. 술에 대한 내용은 잠언 23장에서 잘 나옵니다. 그때 자세히 보도록 하고 오늘은 간략하게만 봅니다. 술에 취하면 이성적인 뇌의 작용을 진정시킨다고 합니다. 그러면 겁이 없어지니 상관을 마구 욕하기도 하고 떠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술에 미혹이 되는 자는 지혜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술만이 아니라 오늘날 더욱 많은 미혹거리가 있습니다. 문명이 발달하면 좋은 것이 아니라 미혹거리만 더 늘어납니다. 아이들의 게임중독이나 스마트 폰이나 인터넷을 통한 온갖 범죄들이 범람합니다. 비트 코인의 광풍도 인터넷이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온갖 것들에 중독되는 것이 지혜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중독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중독치료센터도 많기에 도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근원적으로는 참된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참된 지혜는 성경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하여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가 되시는 분의 진노를 알게 된다면 중독을 이길 지혜를 얻을 것입니다.

 

2절입니다. 왕의 진노는 사자의 부르짖음 같으니 그를 노하게 하는 것은 자기의 생명을 해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왕의 진노가 무엇인지 알면 사람이 조심을 할 것입니다. 왕으로 하여금 진노하게 하면 자기의 생명을 해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조선시대만 하여도 왕을 진노하게 하면 사형을 당합니다. 더구나 역적이 된다면 구족을 멸하여 버립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러한 전제군주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의로운 왕을 말합니다. 왕의 진노는 8절에서 다시 보겠습니다.

 

3절입니다. 다툼을 멀리 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거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다툼을 멀리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지만 세상은 참으로 많이 다툽니다. 왜 다투는 것입니까? 사람들이 더 가지려고 다투기도 하고, 자존심이 상했다고 다투기도 하고, 자기가 옳다는 것 때문에도 다툽니다. 이러한 다툼을 일으키는 자를 성경은 미련하다고 합니다. 미련함이란 지혜가 없는 것입니다. 지혜는 여호와 경외이기에 지혜가 없다는 말은 여호와 경외가 없으니 다투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가 다툼을 멀리한다는 것은 주 예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1:36절입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만물이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모든 것이 다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을 믿는다면 다툴 일의 결국도 사람의 판단에 달린 것이 아님을 알기에 주님께 맡길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직접 해결하려고 하니 온갖 다툼이 요란한 것입니다.

 

4절입니다.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치입니다. 게으름에 대하여서 잠언에서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씨를 뿌릴 때 게을러서 뿌리지 않으면 거둘 것이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씀이 갈라디아서 6장을 보면 두 가지로 말씀합니다. 육체로부터 심는 것은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는 것이며 성령으로부터 심는 것은 영생을 거둔다고 합니다. 우리의 혈육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썩어진 것을 거둘 뿐입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심어야 영생을 거둡니다. 우리는 무엇에 게으르며 무엇에 부지런하십니까?

 

5절입니다.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다고 합니다. 그럴지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낸다고 합니다. 교육(education)이라는 단어를 파자하면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이끌어 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을 명철한 사람이 길어낸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의 마음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의 영 외에는 그 사람의 마음을 모릅니다. 이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영만이 하나님의 깊으신 마음을 압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그 뜻이 성경에 계시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같은 성령이 임하면 서로의 마음에 있는 것을 나눌 수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0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린도 교회에 분쟁이 있습니다. 3절처럼 다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 파당이 생긴 것입니다. 그럴 때에 바울은 한마디로 정리합니다. 누가 십자가를 졌느냐? 십자가도 지지 않은 인간들을 중심에 두고 파당을 나눈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책망합니다. 이런 책망을 기꺼이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한 성령이 임하여 한 주를 믿기에 그 마음의 깊은 것을 길어 낸 것입니다.

 

6절입니다. 많은 사람이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겠느냐고 합니다. 여기서 인자함을 문맥에 따르면 신실함으로 봐도 됩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인자를 베풀거나 신실하면 자기를 자랑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충성되고 신실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겠습니까? 신실하고 충성된 자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죽도록 충성하고서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 무익한 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17:10). 이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자신들에게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하실 때에 주신 말씀입니다. 이것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입니다.

 

7절입니다. 온전하게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 그의 후손에게 복이 있다고 합니다. 율법에서도 율법을 온전하게 행하여 지키면 천대를 복을 받고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삼 사 대가 저주를 받는다고 합니다(20:5,6). 그런데 우리 인간의 행위로 복을 받게 할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여 신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3:10).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온전한 행위를 하여 후손이 복을 받게 하려면 복은커녕 저주밖에 갈 것이 없습니다. 모든 율법을 지켜 행하다가 하나만 어겨도 다 어긴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2:8). 그러므로 이 말씀도 예수님으로 증거 하지 않으면 풀리지 않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의 온전한 행위로 인하여 죄 사함을 받을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는 것이 참 복입니다.

 

10절을 먼저 봅니다. 한결같지 않은 저울추와 한결같지 않은 되는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고 합니다. 6절을 보면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나볼 수 있겠느냐는 말씀이 있습니다. 한 교회에 20년 가까이 목사로 있다고 보면 한 결 같이 충성된 자가 누구인지 대략적으로는 알 수가 있습니다. 물론 이런 충성이라는 것도 사람이 보는 시각이지만, 자신이 맡은 일이 크든지 작든지 알아주든지 알아주지 않든지 간에 한 결 같이 그 일을 하는 사람이 귀합니다. 연말이 되면 어떤 일을 맡겨야 하는데 누구에게 딱히 맡길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한결같다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주님이십니다(13:8). 그러므로 주님은 한결같지 않는 저울추와 되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상거래의 속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인생살이와 믿음을 다 말합니다. 자기 기분이 좋으면 열심히 하다가 기분 나쁘면 교회도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 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억울한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강청하는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을 강청 기도라 하여 소원을 이루어내자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억울할 일을 당하며 살아가는 세상살이 속에서 주님의 약속을 믿고 한 결 같이 주님을 기다리는 자들이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본문 8~9절입니다. “8 심판 자리에 앉은 왕은 그의 눈으로 모든 악을 흩어지게 하느니라 9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냐오늘 제목이 2절과 이 내용을 가지고 왕의 진노라고 잡았습니다. 왕이 진노하면 심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왕이 심판의 자리에 앉아서 그의 눈으로 모든 악을 흩어지게 한다고 합니다. 정직하고 바른 왕이라면 그의 눈빛으로도 악을 흩어지게 할 것입니다. 이러한 왕 앞에서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거나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고 할 자가 누구냐고 합니다. 주님의 눈길에서 피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계시록 1:14~19절입니다. “14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 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16 그의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부활하신 영광의 주님을 사도요한이 본 장면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 장면을 보고서 엎드려 죽게 되었습니다. 주께서 일으키시고 계시를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의 눈이 불꽃같다고 합니다. 주님의 눈앞에 숨겨질 것이 없습니다. 세상 만물이 다 드러나면 우리의 속도 다 드러납니다.

 

계시록 5:6절입니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일찍 죽임 당한 어린 양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다고 합니다. 뿔은 권세를 상징합니다. 일곱은 완전을 말합니다. 그러면 일찍이 죽임 당한 그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권세를 곧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것입니다. 이 분의 눈이 일곱이라고 하는 것도 온 세상을 다 살펴보시는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믿는다면 죄에 대하여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인하여 환난을 당하는 자는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시편 21~12절입니다. “1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3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4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5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9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10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12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본문 3절에서 다툼을 멀리하는 자가 영광스러울 것이며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킨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시편 2편을 보면 세상이 요란한 이유가 여호와와 그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그 맨 것을 끊어버리려고 요란한 것입니다. 온 세상이 요란한 것은 예수님을 주로 믿지 않고 각자가 다 주가 되고 싶어 합니다. 피조물 주제에 감히 주가 되려고 하는 자들이 모여서 국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라들마다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 이러한 세상을 하나님이 비웃으시고 따로 왕을 세우시는데 그 왕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지금도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 지신 만왕의 왕을 조롱합니다. 이런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데 그 진노의 기준이 그 아들에게 입 맞추지 않는 자에게 진노합니다. 그 진노가 이 역사 끝에 나타날 것입니다.

 

계시록 6:15~17절입니다. “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틈에 숨어 16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일찍 죽임 당한 어린 양, 십자가에 조롱과 수치와 저주받아 죽으신 그 분이 진노하시는 날이 이 역사의 마지막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이 말씀들을 믿는 다면 알게 됩니다.

 

시편 130:1~8절입니다. “1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2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3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4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5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6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7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8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주께서 죄를 살피시면 그 앞에 설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님께 있기에, 그 인자와 풍성한 속량이 주님께 있기에 오늘도 우리는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