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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29:24~27 사람을 두려워하면 2018. 8. 29

 

24 도둑과 짝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미워하는 자라 그는 저주를 들어도 진술하지 아니하느니라 25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26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 27 불의한 자는 의인에게 미움을 받고 바르게 행하는 자는 악인에게 미움을 받느니라

 

우리들의 평소의 삶에서 사람을 두려워합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합니까? 우리의 일상은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살기보다 사람들을 의식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요즈음은 개념 상실의 시대라서 그런지 아니면 너무 개성이 강해서 그런지 사람들의 눈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능하셔서 천지만물을 살펴보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 성령으로 임하신 주님을 믿고 산다고 말로는 하는데 살아가는 모습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식하지 않습니까? 더구나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시간도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식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이런 모습은 결국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두려워하는 불신앙의 모습입니다.

 

본문 24절입니다. 도둑과 짝이 되었다는 것은 도둑질한 이익을 나누어 가진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자기의 영혼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도둑과 짝이 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그 이익이 보이지 않는 영혼의 이익보다 나아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도둑과 짝이 된 자들은 저주를 들어도 바른 진술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의 모든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법정이나 청문회에서 거짓 없이 사실을 말하겠다고 선서를 합니다. 위증을 하면 벌을 받겠다는 선서도 하지만 얼마나 도둑들과 짝이 되었는지 거짓 증언을 합니다.

 

나중에 거짓이 드러나면 또 다른 핑계를 됩니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거나 위에서 시켜서 할 수 없이 했다고 합니다. 유대인 학살을 주도한 아이히만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패전 후에 이름을 바꾸어 아르헨티나로 도망간 것을 이스라엘의 모사드가 잡아서 예루살렘에서 심문을 할 때에 상부에서 시키는 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독일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홀로코스트와 같은 역사 속 악행은, 광신자나 반사회성 인격 장애자들이 아니라, 국가에 순응하며 자신들의 행동을 보통이라고 여기게 되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행해진다고 했습니다. 전두환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킨 노태우도 선거 구호가 보통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이 누구와 짝하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나는 국가에 충성하고 회사에 성실하고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가 지금 누구와 짝하고 있는지 세계적인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이익이 다른 회사와 다른 나라에 얼마나 큰 피해를 주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정도의 시각은 휴머니즘적인 시각은 될 수 있지만 성경의 시각은 아닙니다. 성경의 시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어떻게 보느냐는 것이 관점입니다. 십자가를 부적이나 적을 공격하는 상징으로 사용하기도 한 기독교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성경을 통하여 나는 누구와 짝이 되어 있는지 봐야 합니다. 공동번역은 이렇습니다. “죽고 싶거든 도둑과 짝이 되어라. 법정에서 선서하고도 말문이 막힌다.”

 

본문 26절을 먼저 봅니다.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주권자란 세상의 권세 있는 자를 말합니다. 새 번역입니다. “많은 사람이 통치자의 환심을 사려고 하지만, 사람의 일을 판결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누구의 환심을 사려고 합니까? 통치자의 환심을 사려고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처세술입니다. 떡고물이라도 얻어먹으려고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일을 판결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의 권력자에 환심을 사려고 하는 자들이 아니라 세상에 대하여 심판을 선포하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을 향하여 회개하라고 하는 자가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성도가 세상의 권력에 아부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본문 27절입니다. 불의한 자는 의인에게 미움을 받고 바르게 행하는 자는 악인에게 미움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수동태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새 번역은 이렇습니다. 의인은 불의한 사람을 싫어하고, 악인은 정직한 사람을 싫어한다.” 당연히 이러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불의 한데 불의함을 모르고 의롭다고 여기고 살면 참된 의인을 미워하게 됩니다. 세상의 요란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이 의롭다고 여기고 상대를 불의하다고 여기기에 싸움이 일어납니다. 이런 세상을 하늘에 계신이가 비웃으시면서 한 왕을 세우십니다(2:6). 그런데 그 왕이 미움을 받습니다.

 

요한복음 15:18~19절입니다.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세상에서 예수님의 택하심을 입었기에 세상이 우리를 미워한다면 이것이 예수님께 속한 증거가 됩니다. 우리가 악행으로 미움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베드로 사도도 증언합니다(벧전4:15,16).

 

본문 25절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설교시작부터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들도 결국 이 말씀의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24절의 도둑과 짝하여 이익을 챙기는 것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26절의 세상의 권세 자에게 도움을 얻기 위하여 아첨을 하는 자가 많은 것도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27절에서 불의한 자들에게 미움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사람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결국 여호와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처음 설교시작에 질문한 것을 다시 묻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두려워합니까? 눈에 보이는 세상의 힘과 권세를 두려워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 두려움만이 아니라 세상의 평판도 두려워하면서 살아갑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범죄현장에 누가 본다고 하면 사람들은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살핍니다. 그럴 때에 하늘을 쳐다보지 않습니다. 물론 요즈음은 위를 쳐다보기도 합니다. 케이블 카메라가 장치되어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의식하는 바리새인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인인지 말씀으로 점검을 해 봐야 합니다.

 

성경 최초의 두려움은 아담의 타락이후에 등장합니다. 타락이전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친밀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 먹고 나니 눈이 밝아져서 자신의 벌거벗음이 보입니다. 그래서 무화과 잎으로 가리고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나무아래 숨었습니다. 이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으십니다. 전에는 두렵지 않았는데 이제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대답하기를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다고 합니다(3:10). 이후로 에덴동산에서 추방이 되고 모든 인간들을 두려워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 두려움을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이겨내려고 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힘을 가지려고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후에 아담과 하와가 가인과 아벨을 낳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지만 하나님은 이들의 제사를 받아주실 이유가 없습니다. 죄인의 것을 받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아벨의 것을 받아주신 것은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이 은혜에 대하여 분노가 일어난 가인은 아벨을 죽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다스리라는 경고를 하셔도 죄를 다스릴 수 없는 죄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그 피를 물으시면서 땅에서 유리하면서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러자 가인은 자신의 죄벌이 너무 무겁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낯을 뵙지 못하고 땅에서 유리하면서 살아갈 때에 사람들이 자기를 죽일까 두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인을 죽이지 못하는 표를 주셨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가인의 후손들은 성읍을 쌓고 무기를 만들어 자기를 지키며 살아갑니다. 남한과 북한도 미국과 중국도 이렇게 살아가기에 늘 요란한 세상입니다.

 

죄악이 가득한 세상을 하나님은 홍수로 심판하십니다. 노아의 가족은 은혜를 입어 방주를 준비하고 방주에 탑니다. 그러나 은혜를 입지 못한 자들은 자신들의 행복을 자신들이 지키기 위하여 먹고 마시며 사고팔며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에 모든 것을 다 바친 것입니다. 노아 홍수 이후에 흩어지라는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바벨탑을 쌓다가 언어의 혼잡으로 어쩔 수 없이 흩어져서 살게 됩니다. 이렇게 흩어져서 살아가는 중에 하나님께서 셈의 후손 중에 아브람을 부르십니다. 아브람을 고향 친척을 떠나게 하시고 약속의 땅으로 가게 하십니다. 육신의 안전한 곳에서 떠나게 합니다.

 

약속의 땅에 왔는데 그곳에 흉년이 들어 이집트로 들어갑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아름다운 여인이라서 자기를 죽이고 그 아내를 빼앗아갈 것 같아서 아내를 여동생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사래를 바로 왕의 아내로 내어줍니다. 그것도 많은 선물을 받고 내어줍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로 왕에게 나타나셔서 책망하심으로 사래를 돌려보냅니다(12). 이럴 때에 바로 왕 보다 아브람이 더 놀랐을 것입니다. 자기를 부르신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조금씩 알아갑니다. 그런데 나중에 가나안 땅에 돌아와서도 같은 짓을 합니다(20). 나중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같은 짓을 합니다(26). 야곱도 아버지와 형을 속였기에 두려워서 도망갑니다. 얍복 강가에 형에게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밤새 천사와 씨름하였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다 두려워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자들을 부르시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약속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15:1절입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니 아브람이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방패가 되어 주시겠고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상급이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약속을 받았지만 아브람은 여전히 두려워서 가나안 왕 아비멜렉에게 자신의 아내를 여동생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런 자를 하나님은 결국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내시는 것입니다.

 

이삭을 약속하실 때에 아브람이나 사래가 다 비웃었습니다. 아브람 99세이며 사래는 불임 여인이었는데 경수까지 끊어진 상태에서 이삭의 약속을 주셨기에 둘 다 비웃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그런 비웃음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런 이삭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바치라고 할 때에 망설임 없이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갑니다. 이러한 믿음은 결국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보여줍니다. 이런 믿음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일하심 입니다(4:17).

 

그러므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임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하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아들 중에 요셉은 이러한 믿음으로 살아가면 어떤 일을 당하는지도 보여줍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후에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팔려갑니다. 그곳에서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을 때에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기에 이런 죄를 지을 수가 없다고 하면서 유혹을 물리친 것입니다. 그런데 모함을 받아 옥에 갇힌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살면 이런 환난을 당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그런 일을 통하여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일로 사용하시기에 세상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무엘상 15:24절입니다.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하였습니다. 아말렉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을 최초로 공격한 민족이기에 여호와께서 아말렉을 대대로 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17:16).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처음 왕이 된 사울에게 사무엘이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하였지만 좋은 짐승 떼를 남겨오고 아각 왕을 사로잡아 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고 남겼다고 합니다.

 

사무엘상 15:22~23절입니다. “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사울 왕이 여호와를 버린 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다는 말씀을 듣자 사울이 하는 말이 24절입니다. 백성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보다 백성을 두려워하였기에 왕의 자리에서 버림을 당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의 회계 장로가 헌신을 많이 하였는데 나중에 헌금 장부까지 들고 다른 교회로 간 것입니다. 그래서 장부를 되찾아 와서 보니 횡령한 것이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돌려달라고 해도 돌려주지 않으니 고발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는 목사가 그 목사에게 그것을 포기하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다른 장로와 교인들이 그러면 안 된다고 고발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 장로도 고소를 하여 지금 상당히 어려움에 처하여 있다고 합니다. 그 목사가 고발하지 말고 성경대로 손해를 보자고 계속하여 고집하면 교인들이 떠나갈까 봐서 못한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사울은 백성을 두려워하여 이렇게 하였다고 말하지만 이미 13장에서도 백성들이 흩어짐이 두려워서 자기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레 동안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사울에게는 군사가 3천 명인데 쳐들어 적은 병거만 삼만 이며 마병이 육천이며 백성들은 해변의 모래같이 많습니다. 사울의 군인들이 두려워 도망을 갑니다. 그러니 백성들의 흩어짐을 면하려고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힘을 의지한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위기라는 말은 식상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교회들마다 유명하다는 목사들마다 온갖 처방책을 다 내어 놓습니다. 수많은 방법론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런 방법으로 교회가 신뢰를 얻으려고 하고 흩어지는 교인들을 다시 모으려고 하는 것은 사울의 방법과 다를 바가 없다고 봅니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찾아내신다고 하였습니다(6:39). 그렇다면 사람을 좋게 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봐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1:6~10절입니다.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사람을 좋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은 세상 사람들이 좋아할 내용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할 인간이 아무도 없기에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오셔서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나는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그런데 이 역사 속에서는 함께 죽는 모습으로만 보입니다. 함께 살아나고 함께 하늘에 앉혀지는 것은 계시인 성경을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는 십자가만 보이기에 이런 복음을 좋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갖 다른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을 모으려고 하는 것은 사람을 좋게 하려는 것이기에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3:14~17절입니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으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소망은 세상에 보이는 것이 다 날아가도 변함이 없는 영원한 소망입니다.

 

요한일서 4:15~19절입니다.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립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길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 안에 들어가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이 십자가로 나타났습니다(5:8). 그러므로 그 온전한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그 십자가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여호와를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이 사랑 안에 거하기를 소원합니다. 이런 자들은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고 큰 나팔이 울릴 때에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마라나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