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설교 바로듣기]  [음성설교 다운받기]


전도서 2:12~17 일반(一般)인 죽음 2018. 11. 21

 

12 내가 돌이켜 지혜와 망령됨과 어리석음을 보았나니 왕 뒤에 오는 자는 무슨 일을 행할까 이미 행한 지 오래 전의 일일 뿐이리라 13 내가 보니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둠보다 뛰어남 같도다 14 지혜자는 그의 눈이 그의 머리속에 있고 우매자는 어둠 속에 다니지만 그들 모두가 당하는 일이 모두 같으리라는 것을 나도 깨달아 알았도다 15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우매자가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게 지혜가 있었다 한들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하였도다 이에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 하였도다 16 지혜자도 우매자와 함께 영원하도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모두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17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미워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에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로다

 

오늘 본문에서는 죽음이 일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은 세상에서도 합니다. 교회 다니면서 자주 들은 예화인데 다른 종교는 부활이 없지만 기독교는 부활이 있다고 하면서 예를 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을병이 든 자를 살리려고 부처에게 찾아가면 이렇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한 번도 죽은 사람이 없는 집안의 감나무 가지를 가져오면 살릴 수 있다고 알려줍니다. 그 말을 듣고 그런 감나무 가지를 구하기 위하여 집집마다 돌아다니다 보면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이 없기에 죽음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임을 지혜로 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죽음이 일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의 지혜와 성경의 지혜가 죽음이 일반이라고 한 다면 그 차이가 무엇입니까?

 

본문 12절을 봅니다. 내가 돌이켜 지혜와 망령됨과 어리석음을 보았나니 왕 뒤에 오는 자는 무슨 일을 행할까 이미 행한 지 오래 전의 일일 뿐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망령된 일이란 전도서에서 미친 것(1:17, 7:25)과 미친 마음(9:3)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전도자는 자신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을 다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미 앞에서도 인생의 즐거움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하여 자신의 지혜와 권력과 부를 가지고 인생들이 즐겁다는 것을 다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헛됨을 알았습니다. 그러함에도 무엇이 지혜롭고 어리석은 것인지 더욱 애써서 알아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혜와 망령된 일들과 어리석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알아보아도 왕 뒤에 오는 자가 무엇을 행할 것인지 생각해 보니 그것도 오래 전의 일일 뿐이라고 합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솔로몬 자신도 이미 앞선 왕이 한 일을 한 것뿐이며 자기 뒤의 왕도 이미 한 것을 할 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이렇게 증거 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다는 사람들조차 그 피곤한 일들을 온 힘을 다하여 행하고 있습니다.

 

어느 시골마을을 가보았습니다. 작은 교회당이 있었습니다. 역사가 백년이 넘는 교회라고 교회당 입구에 자랑스럽게 소개해 놓았습니다. 주보를 보았는데 교인이 8명입니다. 그런데 주보의 앞뒤에 표어와 실천사항이 얼마나 많은지 대형교회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 주보를 보고서 교인들이 참으로 피곤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 대형교회나 개척교회나 왜 이렇게 피곤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오늘 우리들은 왜 이렇게 사는 것이 힘들고 피곤한 것입니까? 이미 전도서를 보면서 말씀으로 다 확인을 했습니다. 만물의 피곤함과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타락한 인간이기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말씀을 잊어버리고 여전히 헛된 일에 분요하며 마음을 빼앗기고 살아가기에 해 아래 새 것이 없는 그 일을 하고 살아갑니다.

 

본문 13~14절을 공동번역으로 봅니다. “13 빛이 어둠보다 낫듯이 지혜가 어리석음보다 낫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14 지혜로우면 제 앞이 보이고 어리석으면 어둠 속을 헤맨다고 했지만, 그래 보아야 둘 다 같은 운명에 빠진다는 것을 나는 안다.” 빛과 어둠이 차이가 얼마나 분명합니까? 지혜가 빛이고 어리석음이 어둠이라고 하여도 그 두 사람의 결론이 같은 운명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둘 다 일반적인 죽음을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과 같은 내용을 봅니다.

 

시편 49:10절입니다. 그러나 그는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어리석고 무지한 자도 함께 망하며 그들의 재물은 남에게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을 보게 되리로다아삽의 시로 되어 있습니다.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다 들으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생명을 속할 수도 없는 재물을 쌓기 위하여 발버둥을 치면서 살아갑니다. 생명의 속량이 너무 귀하기에 어떤 재물로도 영원히 속량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재물을 쌓아두면서 든든히 여깁니다. 부동산을 자기 이름으로 등기하여 놓고 이것이 영원하다고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자들을 향하여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일반인 죽음 앞에서 무엇이 지혜입니까?

 

시편 49:13~20절입니다. “13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 (셀라) 14 그들은 양 같이 스올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그들의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들이 아침에 그들을 다스리리니 그들의 아름다움은 소멸하고 스올이 그들의 거처가 되리라 15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리로다 (셀라) 16 사람이 치부하여 그의 집의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17 그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의 영광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18 그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19 그들은 그들의 역대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20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세상의 지혜와 성경의 지혜에 대한 차이를 분명하게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본문 15~17절을 새 번역으로 봅니다. “15 그래서 나는 스스로 물었다. 어리석은 사람이 겪을 운명을 나도 겪을 터인데, 무엇을 더 바라고, 왜 내가 지혜를 더 얻으려고 애썼는가? 그리고 나 스스로 대답하였다. 지혜를 얻으려는 일도 헛되다. 16 사람이 지혜가 있다고 해서 오래 기억되는 것도 아니다. 지혜가 있다고 해도 어리석은 사람과 함께 사람들의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린다. 슬기로운 사람도 죽고 어리석은 사람도 죽는다. 17 그러니 산다는 것이 다 덧없는 것이다. 인생살이에 얽힌 일들이 나에게는 괴로움일 뿐이다. 모든 것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헛될 뿐이다.”

 

전도자가 온 힘을 다하여 살펴본 결과 자신의 죽음과 어리석은 자의 죽음이 별 다를 바 없이 일반적인 죽음이 닥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더 바라고 지혜를 얻으려고 애를 썼는가 하는 말입니다. 흔히 말하는 인생의 즐거움을 다 누려보았지만 그것도 헛되기에 이제는 온 힘을 다하여 지혜와 어리석음에 대하여 살펴 본 것입니다. 어리석음은 어둠과 같아서 자기 앞길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지혜는 빛과 같아서 자기의 앞길을 알고 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알고 가든 모르고 가든 결국 죽음 앞에서는 일반이기에 덧없고, 괴롭고, 헛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 마음이 홀가분해 지십니까? 허무해져서 아무 일도 하기 싫어지십니까? 어차피 일반적인 죽음을 죽을 것인데 그냥 탁 죽고 말자는 마음이 듭니까? 전도서는 무엇이 참된 지혜인지를 밝히지만 인생살이의 헛됨을 처절하게 알게 하는 것이 전도서의 우선적인 목표입니다. 해 아래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헛됨을 아는 자들만이 참된 지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시편 49편에서 보았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일반적인 죽음을 죽지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헛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헛된 인생살이의 결론인 스올에서 건져 올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죽음과 다른 죽음이 있음을 성경이 증거 합니다.

 

창세기 5장을 보면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3백년간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께서 데려가심으로 땅에서 사라졌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평균수명 삼분의 일 밖에 땅에 거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행방불명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에녹은 하나님의 선지자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한 자라고 유다서에 나옵니다. 그가 65세 때에 므두셀라를 낳았을 때에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계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므두셀라 죽을 때에 노아 6백세가 되고 그때에 홍수로 심판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녹은 일반인 죽음과 다른 별세였습니다.

 

신명기 34:5~7절입니다. “5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6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 7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참으로 특이한 죽음입니다. 늙고 병들어 죽은 것이 아니라 나이 백이십 이었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않았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는데 죽었다고 합니다.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율법을 받아 전한 자가 들어가지 못하고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세의 시체에 대한 다툼도 유다서에 나옵니다만 이런 모세의 죽음도 특이합니다.

 

열왕기하 2:11절을 새 번역으로 봅니다. 그들이 이야기를 하면서 가고 있는데, 갑자기 불 병거와 불 말이 나타나서, 그들 두 사람을 갈라놓더니, 엘리야만 회오리바람에 싣고 하늘로 올라갔다.” 그런데 엘리야의 제자들이 엘리사에게 엘리야의 시체를 찾겠다고 합니다. 엘리사가 가지 말라고 해고 고집을 부려서 허락합니다. 50명이 삼일을 찾았으나 시체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특이한 별세의 일들이 성경에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솔로몬의 지혜로 살펴본 세상의 일반적인 죽음과 다른 죽음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지혜는 죽음을 넘어선 지혜입니다.

 

누가복음 9:27~32절입니다. “27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십자가 지기 전에 예수님의 영광을 세 명의 제자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지기 전에도 영광의 주님이셨습니다. 예수님 영광의 모습으로 변화하실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하였습니다. 이들의 죽음은 다 특이한 죽음입니다. 죽음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모든 죄인이 죽어야 하기에 이들이 지상의 죽음의 보이지 않아도 홀연히 변화해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함으로 참으로 특별한 죽음을 죽으시는 예수님을 증거 합니다.

 

별세를 의논하셨다는데 이 단어가 출애굽이라는 엑소더스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특별한 죽음인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죄 없는 분의 죽으심입니다. 이 죽으심은 자기 백성을 함께 끌어안고 별세하시기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버리시는 죽음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하여 죽은 자들이기에 어떻게 죽든지 간에 죽은 자가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기에 죽으실 이유가 없는 분이 죽으시는 것은 스스로 목숨을 버리시는 죽음입니다. 이런 죽음을 율법과 선지자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의 별세를 증거 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19~21절입니다.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20절은 잘 아는데 전후의 말씀을 잘 보지 않습니다. 바울이 무엇에 대하여 죽은 것입니까?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입니다. 이런 자들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선악판단의 주체로 살아가는 자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율법체제로 돌아간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이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를 불리하게 하고 거스르는 율법을 지우시고 제거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2:14,15).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어떤 죽음을 원합니까?

 

빌립보서 3:10~14절입니다.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3)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의 삶의 방향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기 전에 바울은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하면서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고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시자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임을 알고 이 남은 육체의 기간을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 받기 위하여 산다고 합니다. 이것이 일반의 죽음을 죽는 자와 다른 삶의 모습입니다.

 

빌립보서 3:15~21절을 봅니다. “봉독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들은 하늘에 시민권이 있는 자라고 합니다(2). 이러한 자들은 위의 것을 찾습니다. 일반적인 죽음을 죽는 자들은 땅의 것만 찾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 그 주님의 날에 우리의 이 낮은 몸을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과 같이 변하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자들은 하루라도 빨리 죽기를 소원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