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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19:21~29 오직 주님의 뜻만이 2017. 12. 13

 

21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22 1)사람은 자기의 인자함으로 남에게 사모함을 받느니라 가난한 자는 거짓말하는 자보다 나으니라 2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당하지 아니하느니라 24 게으른 자는 자기의 손을 그릇에 넣고서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 25 거만한 자를 때리라 그리하면 어리석은 자도 지혜를 얻으리라 명철한 자를 견책하라 그리하면 그가 지식을 얻으리라 26 아비를 구박하고 어미를 쫓아내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며 능욕을 부르는 자식이니라 27 내 아들아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을 듣지 말지니라 28 망령된 증인은 정의를 업신여기고 악인의 입은 죄악을 삼키느니라 29 심판은 거만한 자를 위하여 예비 된 것이요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예비 된 것이니라

 

지난주의 마지막 말씀이 20절이었습니다. 너는 권고를 들으며 훈계를 받으라고 합니다. 사람이 권고와 훈계를 받는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인 타락한 인생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권고와 훈계를 받겠습니까? 더구나 성경의 이 말씀을 누가 받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기록하고 만든 책을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로 주어진 말씀이라고 하면서 권고와 훈계를 받으라고 하면 사람들은 비웃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권고와 교훈을 받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택한 자들인데 이들의 필경은 지혜롭게 됩니다. 잠언의 지혜란 여호와 경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듣는 결국이 여호와 경외가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 경외는 여호와의 뜻을 믿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38~40절입니다. “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여호와 경외는 여호와의 뜻에 순복하는 것입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그 아들을 보고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오신 것이 성탄의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을 봅니다. 사람의 마음에 많은 계획이 있어도, 성취되는 것은 오직 주님의 뜻뿐이다.’ 이 말씀은 잠언 16:9절에서도 비슷하게 나왔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 두 곳의 말씀만 보아도 우리의 수많은 계획들이 있다고 하여도 결국 완전히 성취되는 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뜻만이 온전히 세워지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뜻이란 요한복음에서 본 것처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성경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마음의 뜻과 계획이 왜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까? 타락한 인간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하기 때문입니다(6:5,8:21). 이러한 모습이 자기 좋은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사고팔며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의 좋은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중심성이 죄악이 관영한 모습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그 모든 이기적인 자기중심성이 마음의 계획이기에 그 모든 일들이 항상 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간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이 지옥입니다.

 

버나드 쇼라는 아일랜드 극작가가 지옥의 정의를 이렇게 내렸다고 합니다. “지옥이란 당신이 원하는 것을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곳이다여러 가지 해석을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오늘날 같이 각 개인의 권리를 중요시 하는 사회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독재자의 기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독재자들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해야만 한다면 그런 곳이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도 원합니다. 모두가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려고 합니다. 며칠 전에는 의사들도 데모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각 사람이 원하는 것을 의무적으로 다 해야만 하는 곳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가 상대를 미워하여 죽이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이것을 의무적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면 상대방도 그 의무를 다 해야 합니다. 지금 세상이 이러한 곳이기에 지옥입니다.

 

그러나 이런 지옥에서도 그나마 살만하다고 여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두가 독재자로 살고 싶은데 그러한 개인의 권리를 보호해주는 역할을 누가 합니까? 국가가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국가는 복지국가를 지향합니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국가의 정책이 국민의 행복을 위하여야 세금을 낼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수주의자나 진보주의자도 다 국가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좋은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기독교인들은 어떻습니까? 보수적인 기독교인이든 진보적인 기독교인이든 국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국가가 교회를 보호하여주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이미 국가에 길들여진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교회의 등장은 세상의 위기입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던 시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복음의 선포는 산헤드린 공회의 반대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각 지역을 요란케 하는 전염병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24:5). 복음은 사람들의 소원을 이루어주거나 국가를 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18:36). 그러므로 복음은 세상이 견딜 수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가는 곳마다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런 핍박 중에도 믿는 자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복음이 변질되기 시작한 것이 4세기에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나중에는 로마의 국교로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변질됩니다. 이러한 사상을 콘스탄탄주의라고 합니다. 로마의 지배아래 있는 나라는 기독교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입니다. 로마가 그런 나라를 지켜주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그래서 중세 천년이 암흑기라고 합니다. 타락한 기독교에서 개혁한 것이 루터와 칼빈입니다. 그런데 루터와 칼빈도 완전한 개혁은 아닙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도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 하는 말입니다. 개혁을 말하는 자들도 국가 자체를 넘어서지 못하고 국가라는 이데올로기에서 머문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우리마음의 계획이라는 것이 우리의 환경과 사상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씀을 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국가에 충성하고 나라에 효도하는 것이 우리가 어릴 때부터 배운 국가관과 효도관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국민교육헌장을 암기하였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교회를 나오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것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우리의 마음의 계획이 과연 무엇입니까? 교단들마다 싸웁니다. 자기들이 진리편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우리도 핵을 무장하여 북한을 어떻게 하자고 합니다. 트럼프가 이스라엘의 수도를 예루살렘이라고 하자 온 세상이 요란합니다. 세대주의자들은 이런 기회를 틈타서 아마겟돈 전쟁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 마음의 계획이 무엇입니까? 지금도 힘 있는 자들이 자기 마음의 계획을 이루기 위하여 분탕질을 하고 있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계획이 다 이루어진다면 이 세상은 그야말로 지옥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의 계획과 뜻이 다 무너져 내려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믿는 길입니다.

 

본문 21절을 다시 봅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고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이 참으로 소망의 말씀이 됩니다. 이제 연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 해를 돌아보면서 새해의 계획을 세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의 계획이 전부 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뜻과 계획이 다 무너지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온전히 세워지기를 소원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겠습니까? 많은 교회들이 송구영신 예배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송구영신예배시의 기도제목이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것이며 아들을 믿는 다는 것은 내가 죽는 것입니다.

 

22절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인자함으로 사모함을 받는다고 합니다. 각주를 보면 인자를 베푸는 것이 사람의 즐거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인자를 베풀면 가난해집니다. 예수님께서 부요하신 분으로서 가난해 지심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뜻이며 연보의 의미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인자를 베풀면 우리가 가난해 집니다. 그러나 거짓말하여 부요하여 지는 것보다 인자를 베풀므로 가난해 지는 것이 낫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의 계획에는 이런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새해에는 베풀어서 가난해 지기를 소원하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23절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생명에 이르고,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당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그런데 족하게 지낸다는 말씀부터 보겠습니다. 이 족함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마음에 소원하는 것들이 다 이루어지는 그런 족함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이룰 수 있다는 그런 나라는 어느 가수가 부른 노래가사입니다. 그런데 이런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이런 나라를 헬 조선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족하다는 말씀입니까? 지난주 오후 찬송처럼 예수님 외에 더 원할 것이 없는 것이 자족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경외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며 이것이 생명이며 이것이 자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재앙을 당하지 않는 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구약에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선지자들 치고 핍박받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면 여호와로 경외하는 자가 무슨 재앙을 받지 않는다는 말씀입니까? 로마서 8:31절 이하를 보면 세상의 그 어떤 환난이나 죽음에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재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끊어지는 것이 참된 재앙입니다. 이것을 세상 사람들은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라면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참된 재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6:12~17절입니다. “12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 13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14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 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틈에 숨어 16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일찍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을 믿지 않는 자들이 받을 재앙이 얼마나 두려운지 산과 바위들이 자기에게 무너지기를 소원합니다. 이것이 재앙입니다.

 

24절입니다. 게으른 자는 자기의 손을 그릇에 넣고서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한다고 합니다. 잠언에서 게으른 자에 대하여도 많이 나왔습니다. 여기서 게으름의 정도가 어떤가 하면, 손을 자기의 그릇에 넣고서도 입으로 올리는 것도 괴로워한다고 합니다. 숟가락질도 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는 굶어죽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이 단지 세상의 게으름만이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밥상을 차려놓았는데도 먹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멀리 있는 사람들은 한번이라도 더 오려고 하는데 가까운 사람들은 배부른 모양입니다.

 

25절을 새 번역으로 봅니다. 오만한 사람을 치면, 어수룩한 사람도 깨닫는다. 명철한 사람을 꾸짖으면, 그가 지식을 얻는다.” 거만하고 오만 한 자가 징계를 받는 것을 보면서 어리석은 자가 지혜를 얻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지혜를 얻으면 그런 자는 지혜 자가 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그렇게 많은 징계를 받고서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돌이킬 수가 없음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명철한 사람을 꾸짖기만 해도 지식을 얻는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징계나 꾸짖음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며 지혜자라는 말씀입니다.

 

26절입니다. 아비를 구박하고 어미를 쫓아내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며 능욕을 부르는 자식입니다. 이것은 율법에만 나오는 내용이 아니라 어느 나라에도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자녀가 이렇게 하면 죽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부모의 역할은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일주일에 겨우 한 시간도 안 되는 시간을 교회 보냈다고 그 아이가 신앙으로 자란다는 착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평소에 학교 보내는 정성과 학원 보내는 백분의 일도 하지 않으면서 믿음으로 살 거라는 착각을 하지 마시고 아이들에게 신앙교육을 가정에서 하시기 바랍니다. 어려서부터 말씀에 바로 세워져야 늙어서도 그 말씀위에 살아갈 것입니다.

 

27절입니다. 내 아들아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을 듣지 말라고 합니다.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이란 다른 복음을 말합니다. 구약에도 거짓 선지자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사람을 좋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자들의 말을 들으면 결국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됩니다. 오늘날도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들이 넘쳐납니다. 지식의 말씀에 떠나게 하는 교훈이란 사람들의 원하는 것을 주려고 합니다. 바른 교훈은 그리스도만 남습니다.

 

로마서 10:16~17절입니다. “16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구약시대에도 복음이 전하여졌습니다(3:8). 그런데도 그들이 복음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누가 믿었느냐고 말한 대로 아무도 그 복음을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믿음은 어떻게 나옵니까? 들어야 합니다. 구약에서도 들었는데 믿음으로 화합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율법적인 행위로 화답을 하였기에 믿음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으로 그리스도가 증거 되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구약 성경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 하시듯이(24:25~27) 성령이 임한 사도들도 성경으로 그리스도를 증거 한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의 내용은 그리스도가 어떻게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지도 않은 자들을 찾아내시는 방식이 죽으심과 부활과 성령임하심입니다. 이 모든 일을 십자가로 다 이루심으로 주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믿는 것입니다.

 

본문 28절입니다. 망령된 증인은 정의를 업신여기고 악인의 입은 죄악을 삼킨다고 합니다. 망령된 증인이 악인입니다. 이런 자들은 정의를 업신여기고 죄악을 삼키는 자들입니다. 정의란 하나님의 판단과 법과 규례들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정의를 업신여긴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는 자들이기에 죄악을 삼키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죄악을 삼킨다는 말은 불의를 일삼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자들이 심판을 받습니다.

 

본문 29절입니다. 심판은 거만한 자를 위하여 예비 된 것이요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예비 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성도라면 이런 말씀을 보면서 이 말씀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의 이야기로 읽히게 됩니다. 자신이 얼마나 거만하고 어리석은 자인지를 아는 자가 성령이 임하여 구별된 성도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자기 죄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날마다 심판을 받아야 하고 채찍에 맞아야 당연합니다. 그런데 우리 대신 심판을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신 분이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으로 인하여 우리가 이렇게 믿음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이사야 53:10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3)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이사야 53장은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의 노래로 너무 유명한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과 연결하여 오직 주의 뜻만이 온전히 세워지리라는 그 말씀을 10절에서 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 원하심을 이루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가 속건 제물로 자신을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자기 백성을 구하여내시는 것이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입니다. 그 뜻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이 십자가의 다 이루심으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의 온갖 계획들이 다 무너지고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다 이루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담겨졌다면 참으로 영원한 생명의 복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