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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서 1:17-25 성령으로 기도하며 2011. 10. 7

 

17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18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19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 20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21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22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23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24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25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이제 기도에 대한 주제별로 보는 것이 다음 주로 마지막이 됩니다. 오늘은 유다서에서 기도에 대한 내용을 보려고 합니다. 유다서는 아주 짧은 본문이기에 전체적인 내용을 개략적으로 살펴보고 기도에 대한 말씀을 보려고 합니다. 유다서는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고를 말하고 있습니다. 3절을 봅니다. 우리의 구원이란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로 얻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믿음으로 주신 도는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무너뜨리는 자들이 들어왔기에 싸우라고 합니다. 주일 낮에 보는 갈라디아서는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무너뜨리는 것이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유다서는 다릅니다.

 

이들의 모습을 4절에서 봅니다.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다고 합니다. 이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라고 합니다. 이런 자들은 심판 받기로 작정되어 있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들의 특징이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새 번역으로 봅니다. “어떤 침입자들이 여러분 가운데 몰래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옛날부터 정죄를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들입니다. 그들은 경건하지 못한 자들로서,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남용해서 방종한 생활을 하고, 오직 한 분이신 통치자요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방종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다른 사람들 말고 우리는 방종을 합니까? 안합니까? 할 때도 있고 안 할 때도 있습니까? 우리도 늘 방종을 합니다. 방종을 한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한분 통치자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사는 것을 방종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누가 주인으로 살고 있습니까? 오늘 교회로 올지 안 올 지를 누가 결정하였습니까? 내가 하였습니다. 이것이 방종입니다. 방종(放縱)이란 말은 풀어놓다, 내치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을 방종이라고 합니다. 오직 한분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다 방종을 합니다. 예수를 믿어도 내가 믿고 교회를 다녀도 내가 다니고 봉사를 하여도 내가 하는 것이 전부 방종입니다. 오직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와 다스림이 없는 것이 방종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그런 인생들입니다. 그런 자들이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로 붙잡혀 왔습니다. 날마다 방종 하는데 그보다 더 큰 손길이 장악하고 있기에 방종하면서 끌려가는 신세가 된 사람이 성도입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의 방종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입니다. 왜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는지를 더욱 실감하게 됩니다. 그런데 방종 하는 삶이 애통이 되지 않고 나는 이미 구원을 받았으니 내 육신은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는 자들이 초대교회 때 나타났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들의 죄를 짓는 일에 합리화 시킵니다.

 

로마서 6:1절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공동번역입니다. “그러면 "은총을 풍성히 받기 위하여 계속해서 죄를 짓자" 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의 복음을 들은 자들이 실제 이런 말을 하는 자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고 합니다. 베드로전서 2:16절입니다.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자유를 가지고 자기들의 악을 가리는 데 사용하는 자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초대교회 때에 이런 주장을 하는 자들을 영지주의라고 합니다. 이런 자들이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구약의 여러 경우를 들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출애굽 한 백성들이 광야에서 믿지 아니함으로 멸하신 일,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한 천사들을 심판의 날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어 두신 것,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비방하는 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며 이성 없는 짐승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한다고 합니다.

 

계속하여 가인, 발람, 고라의 길을 따라 가는 자들로서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 된 캄캄한 흑암으로 가는 유리하는 별들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자들이 남에 대한 경고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경고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방탕한 것으로 바꾸어가며 살지 않는가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였고 그 예언대로 노아 홍수 때에 심판이 일어나서 모든 경건 하지 아니한 것에 대하여 심판하였습니다.

 

이제 본문 17-19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그 말은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 정욕대로 사는 것이 오히려 성령을 소유한 신령한 자라고 여기며 다른 사람들을 육에 속한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라고 합니다. 자기들만이 특별한 자라고 하면서 정욕대로 행하지만 그들이 오히려 성령이 없는 자요 육에 속한 자라고 합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마지막으로 권고하는 내용이 20-23절의 말씀입니다.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고, 성령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고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고 합니다. 거짓 선생들에게 넘어간 자들을 말합니다. 또 어떤 자들은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점적으로 보려고 하는 것은 성령으로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동안의 기도를 주제로 살펴보면서 육체를 따라 기도하는 것에 대하여 많이 보았습니다. 그것을 간단히 말하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며 구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번 달 구역공부 빌립보서에도 나옵니다만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란 그들의 신이 배입니다. 유다서에도 자기 배를 섬기는 자들이 나옵니다. 자기 배를 섬긴다는 것은 자기 욕망대로 자기 정욕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들이 구하는 영광은 세상에서 영광이라도 하나님의 나라에서 보면 부끄러움입니다. 그리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령으로 기도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공생애 시작에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유일하게 성령이 임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은 바로 예수님이 불과 성령으로 세례주실 분임을 증거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으시고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고 모든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한량없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께서 얼마나 자주 많이 간절하게 기도하셨는지는 복음서를 통하여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기도는 성령으로 기도하신 것이며 그 기도의 결론은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여 십자가에 죽는 길이었습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기도하신 예수님의 기도의 결론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성령으로 기도한 결과이었는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등극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이제 성령을 부어주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사도행전2:23절입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이러한 성령을 부어주심이 바로 오순절 성령의 임하심입니다. 사도들이 성령을 받고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성령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증거 하게 됨을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을 중심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령에 대하여 보겠습니다.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가 강같이 흘러나온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 모든 것을 가르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고 또한 예수님을 증거 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죄의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고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알리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지상의 운명에 우리들의 운명도 겹쳐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짐입니다. 구원이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것입니다.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시는 것이 성령의 세례입니다. 성령의 세례란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되도록 성령께서 일하시고 계십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를 합니다. 육체에 속한 자들 즉 성령이 없는 자들의 모습은 자기의 경건하지 아니하는 정욕대로 행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들의 정욕을 채우는 일에 사용하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의 열매에 대하여 갈라디아서 5:16-26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봉독” 먼저 육체의 일을 봅니다.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 숭배, 주술,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 냄, 당 짓는 것, 분열,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한 것들입니다. 이런 열매를 맺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은 구원을 받았다고 오히려 이런 일들을 서로 권장하는 자들이 유다서에서도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합니다. 이러한 성령의 열매를 금지할 법이 없다는 것은 성령의 열매라는 것이 사람의 노력으로도 맺을 수 없지만 성령의 열매를 나오지 못하게 막을 법도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열매를 이야기하면 모조열매도 얼마든지 만들어 내는 사람들입니다. 보험회사에서 실적을 올리기 위하여 자기 돈으로 회원 늘이는 것처럼 교회에서도 그런 가짜 열매들을 맺는 척 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그렇게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은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또  열매로 경쟁하여 사랑 많이 실천하기, 기도 많이 하기, 성경 많이 읽기, 헌금 많이 하기 등의 경쟁들을 통하여 헛된 영광을 취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기도하시고 그 결국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이러한 예수님의 영이 임하였기에 결국 자기의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기도한다고 해서 이상한 말을 하고 환상을 본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도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알게 됩니다. 나의 정욕과 탐심이 십자가에 함께 못 박혀졌다는 것을 알고 그리스도께서 전적으로 통치하여 주옵소서! 이것이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를 유다서 1:24-25절에서 봅니다. “24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25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홀로 영광을 받으신다는 이런 말씀들이 더욱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가 우리 안에 풍성하여 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