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설교]  [동영상 설교]

에스겔 3:1-11 두루마리를 먹이시며 2011. 11. 16

 

1 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하시기로 2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3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4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5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6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7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8 보라 내가 그들의 얼굴을 마주보도록 네 얼굴을 굳게 하였고 그들의 이마를 마주보도록 네 이마를 굳게 하였으되 9 네 이마를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 같이 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반역하는 족속이라도 두려워하지 말며 그들의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라 하시니라 10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를 모든 말을 너는 마음으로 받으며 귀로 듣고 11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듣든지 아니 듣든지 주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라는 명을 에스겔이 받았습니다. 2:8-10절을 봅니다. “봉독” 에스겔이 전하여야 할 여호와의 말씀이 두루마리 책으로 보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루마리형태의 책에 기록이 되어 있기에 두루마리를 먹으라고 하십니다. 그 책이 에스겔을 향하여 펼쳐져 있는데 안팎에 글이 있습니다. 안에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안팎으로 기록이 되었으니 양이 많습니다. 그 많은 양의 내용은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3:1-3절입니다. 발견한 두루마리를 먹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에스겔이 능동적으로 받아먹는 것이 아니라 피동적입니다. 구약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 번역에서는 피동형으로 ‘그가 내 입을 열어주시니’로 되어있습니다. 입을 벌리는 것도 하나님께서 벌리시고 두루마리를 먹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두루마리를 받아먹으라고 하시는데도 에스겔이 왜 적극적으로 말씀을 받아먹지 않습니까? 두루마리에 기록된 말씀이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씀이 가득합니다. 이런 말씀을 받아먹으려고 입을 벌리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디모데후서 4:1-4절입니다. “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구약이나 신약이나 인간의 실상은 같습니다. 자기 귀에 좋은 소리 듣기를 좋아하기에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른다고 합니다.

 

에스겔도 연약한 인간입니다. 애가와 애곡과 재앙이 가득한 말씀을 받아먹기를 주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입을 벌리시고 두루마리를 먹이시면서 네 배와 창자에 채우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속에 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받아먹는데 입에서 달기가 꿀 같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꿀보다 더 달다고 하는 말씀이 시편 119:103절에 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이 본 말씀은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이 어떻게 입에서 달다고 할 수가 있습니까? 내가 평소에 좋아하는 내용이 말씀에 나오면 달고 기쁘겠는데 내가 평소에 정말 싫어하는 내용이 말씀에 나오면 과연 그 말씀이 달까요?

 

예레미야 15:16-17절을 봅니다. “16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17 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말씀을 먹었는데 말씀이 기쁨과 즐거움이지만 기뻐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앉지 않고 즐거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을 때는 기쁨이지만 그 말씀이 삶으로 적용이 되면 고난이라는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10:8-11절입니다. “8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두루마리를 가지라 하기로 9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10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11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에스겔과 비슷한 소명을 사도요한이 받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에스겔과의 차이는 그 배에서는 쓰게 된다는 말씀이 에스겔에는 없고 사도 요한에게는 있습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에스겔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고 증거 함으로 쓴 맛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가시와 찔레와 전갈의 환경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환경을 요한계시록 18:15-21절에서 봅니다. “봉독”  바벨론의 멸망을 말합니다. 온 세상의 경제와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가 바벨론입니다. 바벨론에 붙어야만 살아남는다고 모두가 바벨론을 의지합니다. 그런데 이 바벨론이 온 세상을 취하게 하는 음녀인데도 그 보암직하고 먹임직 하고 세상이 자랑이 될 만한 것들을 향하여 달려가기를 멈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FTA 문제로 나라가 시끄러운데 학자들 마다 견해가 다르지만 아주 상식적으로 생각하여 이마트와 동네 구멍가게와 경쟁하면 누가 이깁니까? 명약관화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가려고 하는 이유는 약한 자는 죽더라도 강한 자는 살아남게 하겠다는 자유시장의 법칙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바벨론을 의지하지 않으면 북한 꼴이 납니다. 그들은 바벨론을 의지하지 않고 주체사상을 믿고 살기에 너무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남한은 바벨론에 적극 협조함으로 배는 부르게 되었습니다. 어느 것이 진리입니까? 둘 다 참된 생명을 주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보이지 아니하는 주님의 약속을 믿고서 주의 날이 임하기를 사모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얻어먹은 사람은 이 세상이 멸망할 때도 즐거워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은 사람이라면 세상의 사람들과 생각하는 것이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것은 울어야 하고, 세상 사람들이 우는 것은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갈라디아서 말씀에서도 보았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이 무엇인지 바울사도는 자신이 세상을 보면 세상이 죽은 것이고 세상이 자신을 볼 때에 자신을 죽은 자로 본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세상의 무너지는 소식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즐거워한다는 말씀이 요한계시록 18장의 내용입니다. 19-20절을 봅니다. 울며 애통하는 자와 즐거워하는 자로 대비가 됩니다. 우리는 어디에 속한 자들입니까?

 

우리가 에스겔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은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을 하게 됩니다. 내가 필요하고 내가 좋아하는 구절만 인용하여 아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모습은 성경을 자기 욕망의 도구로 사용할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본성상 슬픈 노래와 통곡과 재앙을 결코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입을 벌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입을 벌려서 말씀을 먹이십니다. 마치 농번기에 소가 지쳐서 여물을 먹지 않을 때 소의 주인이 억지로 입을 벌려 여물을 입안으로 밀어 넣어서 먹이듯이 자기 백성에게 말씀을 먹이십니다. 그렇게 말씀을 먹고 소화를 시키는 것이 말씀이 적용되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이 얼마나 두렵고 고통스러운지 배에서 쓰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본문 4절 이하에서 봅니다. 에스겔 선지자에게 말씀을 먹이신 것은 그 말씀으로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하기 위함입니다. 에스겔이 가기가 두려운 모양입니다. 5-6절에서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같은 말을 쓰는 자기 족속에게 가서 전하는데 그들이 에스겔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합니다. 에스겔의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히려 언어가 다른 민족에게 보냈다면 그들이 너의 말을 들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백성이 듣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이들의 상태가 어떤지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느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지 7절을 봅니다.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한다고 합니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그들의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었다고 합니다. 이마란 사람의 가장 앞선 부분 드러난 부분이라면 마음은 가장 깊은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안팎으로 전혀 듣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에스겔도 그들을 마주 대하도록 얼굴과 이마를 굳게 하시는데 화석보다 더한 금강석 같이 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비록 반역하는 족속이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느 정도로 마음이 굳어져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를 보내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0-11절입니다. 모든 말을 마음으로 받고 귀로 들어서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라고 합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다고 전하라고 합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선지자가 있었다는 말을 하기 위함입니다. 나는 선지자가 없어서 주의 말씀을 듣지 못하였다는 어떤 핑계도 되지 못하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지자를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방의 나라들은 어떻게 합니까? 이스라엘 주변 국가는 이스라엘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어떠하신 지를 보여주십니다. 그러면 더 멀리 있는 이방의 나라들은 핑계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도 핑계할 수 없도록 하나님의 말씀은 온 천하에 다 증거가 되었습니다. 시편 19:1-4절입니다. “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아무도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하지 못한다는 것을 바울사도도 로마서 1:18-20절에서 증거 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부름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한 것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구약 성경전체가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시면서 오직 은혜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최종적으로 확증하시기 위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친히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선지자들이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한 이유는 그들의 입에 들어간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친히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시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공관복음에서 나오는 악한 포도원의 품꾼 이야기에서 보았듯이 주인의 종을 때리고 죽이고서는 최후에 주인의 아들마저 죽였습니다. 이것이 구약에서 선지자를 보내시면서 장차 말씀 자체가 이 땅에서 오셔서 어떤 일을 당할지 미리 보여주었습니다.

 

마태복음 11:20-23절입니다. “봉독”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한 곳에서 회개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한 말씀과 그 권능을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에 전하였다면 그 성들이 오늘까지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친히 들은 가버나움이 심판의 날에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한 심판을 받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었습니다. 이 세상의 종말이 어떠한지를 들었습니다. 여러분이 받아들이든지 아니 받아들이든지 증거가 되었습니다. 주의 택하신 백성이라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사도행전 17:30-31절입니다.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이 말씀들이 주의 백성들에게는 입으로 들어가고 배로 들어가서 쓴 맛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쓴 맛이 실패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좁은 문 좁은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