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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 3:22-27 벙어리 파수꾼 2011. 11. 30

 

22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거기서 내게 임하시고 또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 들로 나아가라 내가 거기서 너와 말하리라 하시기로 23 내가 일어나 들로 나아가니 여호와의 영광이 거기에 머물렀는데 내가 전에 그발 강가에서 보던 영광과 같은지라 내가 곧 엎드리니 24 주의 영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내 발로 세우시고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네 집에 들어가 문을 닫으라 25 너 인자야 보라 무리가 네 위에 줄을 놓아 너를 동여매리니 네가 그들 가운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라 26 내가 네 혀를 네 입천장에 붙게 하여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그들을 꾸짖는 자가 되지 못하게 하리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니라 27 그러나 내가 너와 말할 때에 네 입을 열리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들을 자는 들을 것이요 듣기 싫은 자는 듣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니라

 

에스겔이 하나님의 파수꾼으로 부름을 받습니다. 파수꾼의 역할은 하나님의 뜻을 가감하지 말고 액면 그대로 전달하여야 합니다. 물론 저항하기도 하고 중재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이 파수꾼입니다. 파수꾼의 역할은 말로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모노드라마의 배우처럼 여러 가지 역할극을 하게 됩니다. 이사야나 예레미야 선지자도 말로만이 아니라 행위로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펴보는 에스겔도 여러 가지 역할극을 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 처음 역할입니다.

 

들로 나가라! 22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에스겔에게 임하십니다. 에스겔이 처음 여호와의 영광을 본 것은 그발 강가입니다. 그곳에서 여호와의 영광을 보고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델아빕에 와서 일주일을 답답하게 지낸 후에 파수꾼으로 세움을 받습니다. 지난주는 파수꾼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파수꾼의 생명이 달린 문제임을 보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파수꾼의 첫 역할인데 먼저 들로 나가게 합니다. 들에서 에스겔과 말씀하시겠다고 합니다. 에스겔이 들로 나가는 것은 하나님과의 말씀을 듣기 위한 것입니다.

 

성경의 선지자들은 자기들의 원하는 삶의 방식으로 살 수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살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모세도 광야로 나가서 40년을 보내야 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다시 광야에서 40년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 광야 40년을 사도행전 7:38절에서 광야 교회라고 합니다. 오늘날 교회도 광야교회여야 합니다. 지상에 영원히 거할 것처럼 부동산 확보하여 고정하는 것이 아니라 떠날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이 들로 나가듯이 세상과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주의 말씀을 묵상함이 정말 필요한 시대입니다.

 

마태복음 11:7-9절입니다. “7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세례요한이 보낸 사람들이 돌아가고 나서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 대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광야에 나간 이유는 선지자를 보려고 갔다고 합니다. 그 선지자에 대하여 예수님은 10절에서 말라기서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오리라고 한 엘리야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에 대하여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1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들로 나가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에스겔처럼 예수님도 자주 빈들로 나가셨습니다. 세례요한도 광야에서 활동을 하였고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 40년을 거쳐 나왔듯이 예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의 백성을 만들어 내시기 위하여 광야에서 출발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자주 한적한 곳을 찾아서 기도 하십니다. 마가복음 5:15-16절입니다. “15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16 예수는 물러가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분주한 세상에서 나만의 빈들이 있습니까?

 

네 집에 가서 문을 닫으라. 23-24절입니다. 들로 나아가니 여호와의 영광이 거기에 머물러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광경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예루살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 포로로 잡혀온 그곳, 그 빈들에 임하여 계시는 것입니다. 이 여호와의 영광은 그발 강가에서 보았던 그 영광이기에 에스겔이 바로 엎드립니다. 전에처럼 주의 영이 임하여 에스겔을 일으키시고 내 발로 세우시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집에 들어가서 문을 닫으라고 합니다. 처음 말씀이 들로 나가라고 하셨는데 들로 나가서 들은 처음 말씀이 네 집에 들어가서 문을 닫으라고 합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담지한 사람인데 문을 닫았다는 것은 심판을 보여줍니다.

 

왜 심판의 상황인지를 25절에서 봅니다. 주의 영이 에스겔을 인자라고 부르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무리가 네 위에 줄을 놓아 너를 동여 맬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 가운데 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반역하여 포로로 잡혀왔지만 하나님의 선지자에 대하여 얼마나 불만이 많은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묶고 감옥에 가두고 죽이는 것이 이들의 조상들이 한 일이며 바벨론 포로에 잡혀와 있는 중에도 거짓 선지자의 말을 듣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29:1-32절입니다. “봉독” 바벨론에 제일 먼저 포로로 잡혀가 있는 자들에게 예레미야 선지자가 편지를 보냅니다. 포로로 잡혀간 곳에서 집을 짓고 자식을 낳고 살면서 그 나라를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고 합니다. 70년이 되면 여호와께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편지를 보내니 이 편지를 받은 스마냐가 예루살렘의 백성과 제사장들에 편지를 보내어 예레미야 같은 미친 자와 선지자 노릇 하는 자들을 결박하여 가두라고 합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상태에서 예레미야가 보낸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예레미야를 결박하여 감옥에 가두라고 하는 이들이 에스겔인들 줄로 묶어 버리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므로 예레미야가 문을 닫고 들어가면 그들이 줄로 묶는 다는 말씀이 어느 정도로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벙어리가 되리라! 26절입니다. 전에 사용하던 성경은 벙어리로 되어 있습니다. 파수꾼이 벙어리가 되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벙어리를 파수꾼으로 세우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벙어리가 아닌 에스겔을 파수꾼으로 세우셨는데 그 혀를 입천장에 들어붙게 하셔서 그들을 꾸짖지 못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패역한 족속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파수꾼을 세워서 적이 쳐들어온다고 외쳐도 그들은 듣지 않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렇게 쳐들어오는 적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패역한 자들에게 선지자의 책망이 들리지 않으면 이것이 심판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회개의 소리가 어디에서 들리고 있습니까?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소리들은 요란하지만 정말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라고 외치는 자의 소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회개하라는 말을 하기는 하지만 그 회개의 말은 윤리도덕적인 수준이거나, 아니면 세상의 복을 받기 위한 회개의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가난하고 병든 것은 하나님을 잘 못 섬겨서 그런 것이라고 하면서 그동안 하지 못한 십일조를 다 하는 것이 회개하는 것이라는 말을 들어보았습니다. 물론 돈을 사랑한 것이 일만 악의 뿌리이지만 그동안 못한 십일조를 함으로 복을 받겠다는 것도 탐심이라는 우상숭배인데 이런 것을 회개라고 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되어있기에 그런 사람이 교회를 나와도 결국은 자기 자신을 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부르고 예수님과 성령님을 들먹거려도 결국은 자기를 위한 것이라면 이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그렇게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을 책망하면 아직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책망하고 또 하다가 그 책망마저 하지 않으면 그것은 심판밖에 받을 일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존교회의 여러 가지 만족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서 복음을 전한다는 교회로 찾아오지만 그러나 그 안에도 역시 자기중심적이라는 말입니다. 율법이나 복음이나 간에 자기 입맛에 맞는 말씀만 챙기는 사람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에스겔에게 이 말씀을 하신 분이 주의 영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의 영을 누가 보내신 것입니까?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신약에서 누가 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십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에서 주의 영으로 말씀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베드로전서 1:10절입니다.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예언한 것입니다.

 

에스겔은 입천장이 붙어서 꾸짖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 패역한 자들에 대한 심판의 행위라면 에스겔에게 이렇게 행하신 주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마태복음 12:41-42절입니다. “41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요나와 솔로몬보다 더 크신 분이 오셨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그들이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항상 그러나라는 말씀으로 인하여 반전이 일어납니다. 27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와 말할 때에 네 입을 열리니 너는 그들에게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다고 전하라고 합니다. 에스겔이 자기 임의로 말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벙어리 되게 하시는 것도 주님께서 하십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고 그런 것을 좋아하는 자들이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한 그들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스겔이 입을 열게 하시면서 전하는 말씀의 내용은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씀입니다. 이미 받아먹은 말씀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에스겔의 말을 듣고서 두 가지 반응이 나옵니다. 들을 자와 듣기 싫은 자입니다.

 

이렇게 참된 선지자들이 전한 말씀을 싫어하였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싫었으면 선지자를 죽이고 그 선지자를 보낸 예수님을 죽이고 이제 신약시대에는 역시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증거 하는 자들을 죽이고 핍박하였다는 것을 이미 기록된 성경에서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먹이시고 그 입을 열어서 전하게 하는 자들의 말은 듣기에 싫은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자신이 새롭게 계시를 받은 말씀이 아니라 이미 기록된 복음의 말씀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이 복음을 전할 때에 일어난 두 가지 반응이 있습니다. 듣는 자가 있고 듣기를 싫어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듣고 어찌할꼬? 하면서 회개하는 자는 소수이고 듣기를 싫어하는 자들이 다수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 역시 그들이 반역하는 족속이기 때문입니다. 벙어리가 되게 하시는 것은 그들이 패역한 족속이라서 그렇고, 입을 열게 하셔서 전하는데도 듣기를 싫어하는 것 역시 그들이 반역하는 족속이라서 그렇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대표로 예수님을 재판한 빌라도가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에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그도 패역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십자가에 못 박하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증거 하면 두 가지 반응이 일어나게 됩니다. 들을 자는 들을 것이요 듣기 싫은 자는 듣지 아니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지금까지 가치 있다고 여긴 모든 것들을 주님은 배설물이라고 하시면 아멘이 되십니까? 지금도 내가 귀하다고 여기는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만이 아니라 그래도 내가 선하다고 여긴 것들, 이것은 주님을 섬긴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서도 배설물로 버리라고 하시면 여기에도 아멘이 나옵니까? 그렇다면 들을 귀가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시록의 일곱 교회에 하신 말씀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